생선 가겟집 아들 수로 앞에 나타난 여우 씨는 어딘가 뻔뻔한 인상이다. 날씬한 몸매에 갈색 양복, 하얀 구두로 치장한 여우 씨가 막 인사를 하려는 듯, 모자를 잡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 듣고 싶은 말만 솔솔 쏟아질 듯한 얄미운 입매, 아름다운 스카프는 바람에 너풀거린다. 그를 감싸고 있는 분홍빛은 아름답고, 녹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공기는 어딘가 두렵기도 하다. 이 여우 씨가 뭐라고 하는가? “제가 이 생선 가게를 봐 드리겠습니다. 주인님은 어서 나가 실컷 놀다 오세요.” 그렇다, 수로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다. 게다가 대가는 생선 한 마리 뿐이란다. 그림처럼 꼭 이렇게 생긴 여우가 이런 제안을 하는데 거절할 강심장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수로도 냉큼 가게를 맡기고 놀러 나가는데 여우는 곧 본색을 드러낸다. 일손이 필요하다며 하나 둘 식구를 데려오더니 엿새 만에 가게 생선을 바닥낸 것이다. 그러곤 말하길, “생선 한 마리씩! 게다가 주인님은 제가 식구들을 데려오는 것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인상대로 뻔뻔한 여우였다. 여기서 ‘인상’의 최소한 절반은 그림에서 온 것이다. 좋은 삽화가 ‘글과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면, 「상냥한 여우 씨와 식구들」의 여우 그림은 좋은 삽화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김기정 동화집 『금두껍의 첫 수업』에는 열 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10여 년 간 쓰인 작품이 모인 자리다 보니, 주제도 내용도 아롱이다롱이다. 「금두껍의 첫 수업」처럼 아름답고 신 나는 환상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고, 「만보의 자장면」처럼 현실의 아이를 위로하는 작품도 있다. 그리고 작품마다 그에 걸맞은 허구의 그림이 독자의 감상을 거들고 있다. 「무지의 상상력 대결」에서 도전장을 받고 가마에 올라탄 무지를 보라. “누군가한테서 도전을 받는 일은 절대 싫은 일이 아니”라는 무지가 마침 하얀 태권도복을 입고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무지처럼 당당한 표정을 짓게 된다.
주로 화려하게 펼쳐지던 그림은 “한 아이가 떠났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시인과 선생님」에 이르러 갑자기 차분해진다. 단순하고 부드러운 선과 검은색만으로 표현된 인물은, 그림만으로도 문득 슬픔을 전한다. 엉뚱한 순간에 “니야아옹!” 소리를 내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꼬마 시인 입에 사랑스러운 고양이 얼굴을 그려 넣다니.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라 해도 이런 그림을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책에서 글과 그림의 어울림은 합이 잘 짜인 무술 겨루기 같다. 작가는 작품을 써서 보여 준다. 화가는 그것을 보고 그림을 그려 낸다. 작가는 흠칫 놀라면서 다른 작품을 보여 준다. 화가는 천연덕스럽게 또 그림을 그려 보인다. 이것도 그릴 수 있을까? 이것도? 작가는 신이 나서 쓴다. 화가도 아마 웃으면서 그릴 것이다. 그야말로 작가와 화가의 상상력 대결 아닌가.
* 마음대로 쓰래서 마음대로 썼다가 마음대로 썼다고 까인 원고를 마음대로 여기 올리는 나란 여자 자유로운 여자. (그런 거 아니잖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