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산적 그랍쉬와 땅딸보 부인 1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52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김영진 옮김, 롤프 레티히 그림 / 시공주니어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대부분 서로 너무 다른 남녀가 만나 싸우고 친해지고 밀고 당기다가 연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분이든 성격이든 취향이든, 주인공들이 '서로 너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에게 없는 것, 나와 다른 것 때문에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연애가 성사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기지다. 연인이라면 모름지기 나와 달라야 매력이 있다. 하지만 또 그 차이 때문에 헤어지는 일도 다반사. 만나는 이유도 헤어지는 이유도 사실은 그런 것이다. "너는 나랑 너무 달라."

 

『거인 산적 그랍쉬와 땅딸보 부인』은 그렇게 만난 연인의 그 다음 이야기, 그래서 결혼까지 한 사람들의 다음 이야기를 그린 책이다. '거인'이라 불릴 만큼 덩치 큰 그랍쉬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벌벌 떨게 하는 무서운 산적이다. 올리는 깐깐한 이모 아래서 조신하게 사는 데 지친 작고 통통한 아가씨다. 이 둘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주변(이라고 해야 올리의 이모밖에 없지만)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한다.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쌩하니 진행된다. 문제는 이 '해피엔딩' 다음부터다.

 

그랍쉬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나갔고, 아빠는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할아버지 혼자서 그랍쉬를 키우면서 훌륭한 산적으로 만들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 도둑질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쯤 자기 직업을 좋아하기까지 한다. 덤불이 우거진 동굴 속에서 쓰레기 더미와 더불어 살았고, 머리며 수염이며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용감하고 당찬 올리는 그랍쉬를 무려 "새끼 양"이라고 부르며(처음 이 말을 들은 그랍쉬는 잠을 설쳤다) 수염도 다듬고 동굴도 청소한다. 그랍쉬는 그런 정도는 올리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참아 보지만, 도둑질은 어떻게 되질 않는 것이다! 그랍쉬는 산적이므로 도둑질을 해야 한다. 정체성의 문제다. 게다가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이제 먹고살 수가 없다. (동네로 내려가면 감옥에 갇힐 게 뻔하다.) 올리로서는 도둑질로 먹고사는 일이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 돼지저금통에 코를 그려 넣는 일이 지겨웠던 걸 생각하면 숲 속의 모험은 너무나 신나지만 가끔은 문화생활도 누리고 싶다. 무엇보다 떳떳하게 살고 싶다. 둘은 사랑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아기까지 생겼다! 그랍쉬는 아기를 위해서 도둑질을 해야 하고, 올리는 아기를 위해서 도둑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 서로에게 얼마나 잘 맞추어갔는지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나는 책을 덮었을 것이다. (무려 두 권이나 된다고!) 둘은 아주 잘 싸운다. 끈질기게 고집을 부린다. 이러다 둘이 화해 못하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다. 다행히 싸우는 와중에도 짬짬이 애정 행각을 잊지 않는다. 둘은 서로를 다양한 애칭으로 부르는데, "쪽쪽 주둥이, 귀여운 꼬꼬닭, 기쁨 핥아 먹는 거인" 등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올리가 그랍쉬더러 "꼬마 킹콩"이라고 한 것이다. 얼마나 적절해?) 애정을 바탕으로 한 끈질긴 싸움 끝에 둘은 차근차근 답을 찾아간다. 그랍쉬는 도둑질을 봐가면서 하고(응?) 올리는 라디오보다 개구리 소리 듣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다. 그랍쉬는 동굴은 별장처럼 두면서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새 집을 짓고, 올리는 그랍쉬가 훔쳐 온 병에 잼을 담아 팔아서 먹고살 길을 찾는다.  

 

산 속에 고립되어 살 던 그랍쉬는 결혼과 더불어 온갖 사건에 휘말리면서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때로는 도움을 주고, 더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랍쉬는 차차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올리는 숲 속에서 발가벗고 목욕하고 뛰놀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엄마가 되고, 농사를 짓고, 꾀를 내어 먹고살 궁리를 한다. 2권까지 이어지도록 내내 둘은 싸우고, 화해하고, 모험을 함께하고, 자식을 낳고(많이도 낳는다), 한걸음씩 성장하다 아주 성대하고 따뜻한 결말을 맺는다.

 

친구든 연인이든 서로 달라서 좋아하고 그래서 갈등하는 사람이라면 어린이나 어른, 누가 읽어도 좋을 책이다. 서로를 위해 맞추는 것만큼이나 고집도 잘 부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속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구드룬 파우제방 특유의 재치 넘치는 문장, 빙긋 웃게 되는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짧지 않은 책을 끝까지 읽게 한다. 그림을 그린 롤프 레티히는 그 유명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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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3-05-09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고집도 잘 부릴 줄 알아야 해요. 잘 지냈어요, 네꼬님?

네꼬 2013-06-12 16:18   좋아요 0 | URL
섬사이님, 잘 지내고 계세요? 저야 고집스럽게 놀고먹고 있죠. 호호. (노는 데 조금 지치고 있어요...)

도넛공주 2013-06-1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못 본 사이에 막 유부녀가 되어있는 네꼬님...

네꼬 2013-06-12 16:18   좋아요 0 | URL
도넛공주님! 못 본 사이에 저 유부녀도 됐고 백수도 됐어요!! 크하하. 공주님도 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