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씨앗을 심은 후부터
-영화 <길>에서 사랑의 고백
백미혜
물오리가 없으면
아가씨가 대신 물오리가 되라고
당신은 말했죠. 마을 장터에서
공기총으로 나를 겨냥하면
심장을 엎지르며
나는 죽는 시늉을 했어요.
해장국도 끓일 줄 모르고
쓸모없이 나뒹구는 돌처럼
한때는 심장의 빈 어둠으로 사는 것이
온통 지긋지긋했지요.
그러나 내가 당신 곁을 떠나면
누가 당신의 공기총을 반짝이도록
닦아줄까요. 당신이 코를 골며
잠자고 있는 동안에
나는 들로 나가 토마토를 심었답니다.
떠도는 우리들이라
토마토의 수확을 기다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빈 깡통 안에 무심히 떨군
토마토 씨앗 하나가
내 안에서 싹을 틔웠답니다.
토마토 씨앗을 심은 후부터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달라졌어요.
어쩌면 내가 토마토를 심은 그 다음부터
우린 마음속에 토마토 밭을
안고 다니기 시작한지도 모르죠.
자, 그러니 이제 당신의 마음도
내게 말해 보세요.
-
그의 별명이 토마토라는 사실을 알았을 무렵, 나는 우연히 이 시를 알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준비된 운명처럼 느껴졌더랬다.
그리고 어느 날 토마토 그림이 그려진 컵을 씻을 때
문득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나는
눈물이 쏙 났다.
내 눈 앞에서 빨간 토마토들이 부풀어 오르다가 부풀어 오르다가
완전히 익은 채 내 손에서 뭉개져버렸다.
다시는 토마토를 먹을 수 없을 거라고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어제 저녁
손님이 사들고 온 토마토와 함께 와인을 마시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 시가 생각났다.
‘친환경 농산물’ 봉지에 담긴 토마토를 내가 썰자
동거녀가 발사믹 소스와 올리브오일을 뿌렸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