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가 흐르는 걸 확인한 미나는 때리길 멈추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미나의 울음에 아니 나도 미나의 코에서 흐르는 빨간 피를 보고 놀랐다. '내가 안때렸어....' 미나에게 말했지만 소심한 변명은 미나 울음 소리에 묻혀 내게도 들리지 않았다. 꼬집고 할퀴는 미나의 손톱을 막다가 내 팔 어딘가에 부딛힌건지, 미나 혼자 벽돌 담벼락에 부딛힌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골목엔 나와 미나 둘 뿐이었고 아무도 모르는-미나와 나 조차도-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큰일이 났다는 사실만은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집은 세탁소였는데 작은 방 한 칸과 쪽부억이 가게에 달려있었고 그런 작은가게 네 개가 블럭 늘여놓은 것처럼 일 층에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뒤안에는 공동 마당과 빨래터와 화장실 두 칸이 있었다. 주인할머니는 이 층에 살았는데 종이 수첩을 들고 월세를 받으러 다니는 모습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빤 매일 복덕방에 가서 화투를 쳤고 눈썰미 좋은 엄마가 어께 너머로 세탁일을 배워 세탁일을 맡아 했는데 가끔 어려운 수선일이-이게 돈이 됐다- 들어오면 엄마는 내게 아빠 찾아오라 소리를 질렀다. 아빠 불러도 안온단 말이야, 나는 담배냄새 자욱한 노름판에 가는게 싫었지만 두 번 대들었다가는 엄마한테 등짝이라도 한 대 맞을게 분명하니 혼자 투덜대며 복덕방엘 억지로 갔다. 아빠는 담배를 물고 화투를 치고 있었는데 화투에 집중하는 아빠에게 말을 걸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빠, 아빠 엄마가 오래.... 말이 뒤로 갈수록 작아지고 급기야는 목구멍이 내 목소리를 잡아먹어버리고 만다. 화투판에 일곱살 꼬마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신경을 써 주는 어른은 하나도 없었다. 아빠가 미웠다. 아빠는 내가 등 뒤에 서 있는 걸 알면서도 화투에만 집중했다. 오도가도 못하고 멀뚱히 서 있는 세탁소집 아들이 거슬렸던 쌀집 아저씨가 백 원 짜리 동전을 쥐어주며 아빠 금방 갈꺼야, 하고 웃으며 등을 토닥여 줬다.
아빠는 일을 참 잘했는데 일을 할 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아이롱을 할때 특히 멋있었는데 스팀을 치익~ 치이익 뿜으며 하얀 와이셔츠니 양복을 다릴때 아빠는 화투를 칠 때처럼 어둡지 않았고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빠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동네에선 쌀집 아저씨, 연탄집 아저씨 다음으로 키가 컸다. 쌀집 아저씨는 쌀 짐을 많이져서 그런지 어딘가 구부정했고, 연탄집 아저씨는 오다리였다. 아마 연탄 리어카를 오래 끌어서 그런 것 같다.
아빠는 키도 적당히 컸고 얼굴도 잘생겼었다.-엄마는 아빠의 인물만 보고 결혼했다가 신세 망쳤다고 한탄을 하곤 했다- 그보다 아빠가 자랑스러웠던 건 아빠가 결혼 전에 국민학교에서 선생질을 잠시 했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어서였다. 그 때는 내가 학교에 가기 전이라 학교에 가면 꼭 우리 아빠 같은 남자 선생님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 가 보니 남자 선생님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말수가 없었고 나는 말주변이 없었다. 일곱 살 짜리가 무슨 말주변이냐 하겠지만 또래 아이들이 청산유수로 말하는 걸 매번 듣기만 한 나로서는 일곱살 짜리가 맘 속 생각을 표현 못할 때 느끼는 답답함은 어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아빠 앞에선 말이 나오질 않았는데 지금도 어려운 자리에선 말문이 닫히곤 하는걸 보니 그 때의 기억이 내 안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세탁소 안은 형광들 불빛으로 환했고 아빠는 미나 할아버지에게 혼나고 있었다. 미나는 할어버지 손을 잡고 그 때까지 울고 있었는데 울면서도 날 힐끔 쳐다보며 '넌 죽었다' 메롱하는 눈치를 주었다. 난 안 때렸는데, 안 때린거 같은데 미나가 때렸는데...
할아버지는 날 밀치고 미나는 울음을 멈추고 그 둘은 슈퍼로 들어갔다. 고개들어봐, 아빠 특유의 낮은 목소리는 거역할 수 없었지만 매번 너무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빠의 손이 내 턱을 잡고 얼굴을 위로 향하게 했다. 형광들 불빛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고 아빠는 내 얼굴을 한참 쳐다 본 후 잘했어. 앞으로도 맞지만 말고 같이 때려. 기집애한테 맨날 맞고 다니지 말고. 조금 있다가 우리도 가게(슈퍼)가자. 들어가서 엄마한테 얼굴에 약 발라달라고 해.
그 때부터 울기 시작했는데 아빠는 기가 찬지 어서 들어가라 했고 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는데 울음을 삼키느라 울음소리 더 커지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울음 소리... 나오는 울음소리와 되먹는울음 소리가 목구멍에서 만나 헉! 하는 숨막히는 소리.
아..빠 나 안 때렸...어.. 안 때렸.. 헉!...끄윽... 미나누나가 때렸...,
누가 누나야! 참 미나한테 누나라 부르면 안 되는데 아빠 앞에서 누나라 부르면 안 되는데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빠가 나한테 소리지르는 몇 가지 일 중에 하난데 서러워서 또 깜박하고 말았다. 아빠의 눈을 보니 또 오금이 저려온다.
헷갈렸다. 난 친구가 미나 밖에 없는데 미나 할아버지는 나이는 같아도 미나는 학교에 다니니 누나라 부르라 하고 아빠는 생일이 석 달 차이 밖에 안나는데 무슨 누나라 하느냐며 내가 미나를 누나라 하는 걸 싫어했다. 나는 뭐라 불러도 상관 없었다. 미나도 학교에 다니고 부터는 변덕이 있긴 했지만 별로 상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랑 미나 할아버지는 내가 미나를 어떻게 부르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미나 할아버지는 우리 옆옆 집에서 '미나 부동산이라는 상호의 복덕방을 하셨다. 미나누나 놀자~, 매일 같이 난 미나네 집엘 갔다. 미나랑은 주로 소꿉 놀이를 했고 가끔은 테레비도 봤다. 미나는 구창모를 좋아해서 나는 구창모의 희나리를 부르고 미나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만족해 했었다.
미나는 아빠가 미국에 돈 벌러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살았는데 난 미나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미나나 나나 일종의 금기였던 것 같다. 별로 재밌는 화재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금기를 깨고 가끔 미나가 우리 아빠 흉을 잡곤 했었다.
니네 아빠 너무 무서워..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사기 당하고 사람이 이상해졌다고 했어... 젋은 사람이 노름이나 하고 니네 아빠 월세도 못내면서 일도 안한다고 할아버지가 너랑 놀지 말래.
그래도 미나는 나랑 놀았고 나도 미나랑 노는게 좋았다. 미나 할아버지는 미나 말에 꼼짝도 못했고 매 번 내 아이스크림까지 두 개를 사야만했다.
미나는 날 데리고 오줌누러도 같이 갔는데 나는 어른들한테 혼날까 무서웠지만 미나가 같이 가는 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같이 화장실에 있으면 재밌기도 해서 둘이 화장실에도 가곤 했다. 오줌 누고 아래를 화장지로 닦는 미나에게 똥쌌어?, 하고 물으면 여자는 오줌 싸도 닦아야 돼~ 하면서 오줌닦은 화장지를 내게 내밀기도 했었다.
미나는 우리 아빠를 많이 무서워했는데 그건 미나가 날 많이 때렸기 때문인 것 같다. 미나는 날 꼬집고 나면 내 얼굴의 상처를 자기가 먼저 보고는 내가 어떤 잘 못을 해서 꼬집혔는지를 자세히 알려주었고 알았느냐,며 재차 확인을 하곤 했었다. 아빠는 맨날 맞고 다니면서도 쫓아다니는 나도, 약은 미나도 싫어했었지만 그다지 신경은 안 썼던 것 같다. 아빠는 화투를 치거나 담배를 피거나 가만히 생각을 하곤했는데 가끔은 우리가 아빠 앞을 지나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여튼 미나도 나도 아빠를 싫어했었다. 미나가 우리아빠를 흉보면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미나네 아빠처럼 우리 아빠도 미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적이 있었다. 미나는 내 얼굴을 꼬집었고 또 울기 시작했다. 미나 할아버지는 내가 미나랑 방에서 소꼽놀이 하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미나가 울자 언제 또 들어왔냐,며 날 쫓아내고 미나랑 슈퍼에 간다. 나는 아빠가 화투치는 복덕방 앞까지 가서 쪼그리고 앉아 아빠를 기다린다. 미나가 꼬집은 상처가 쓰라리다. 아까진끼 발라야 하는데 엄마한테 가면 또 맞을테니 집에도 갈 수 없다. 아빠가 돈을 따서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쌀집 아저씨가 돈을 따면 나한테 오백원씩 주니까 그것도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