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말을 해주면 고치겠노라고 사정하는 여자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냥. 퇴근을 하고 갔는데, 여자 슬리퍼 하나, 남자 슬리퍼 하나, 여자 구두 하나가 일년 내내 그 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게 무서워서. 그 옆에 내 구두를 벗어놓기 무서워서. 하나둘씩 늘어나는 세간도 무섭고, 그것들이 반짝반짝 윤을 내는 것도 무섭고. -소멸中
#2. 가설랑은 다시 안 올라요. 암만 존 시상을 준다개도 나는 싫어라. 이녘 각시로도 싫어라. 무정한 이녘이 싫어서는 아니고라.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의 애달븐 운멩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허고 애달프요. 긍게 우리, 허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생명 가진 잡초로도 말고라, 사램으로도 말고라, 뵈도 않는 먼지 같은 것으로나 날라먼 나서 말이어라, 슬픔도 없이 기쁨도 없이, 여그저그 떠돔시로나, 암것에도 맘 주지 말고 말이어라, 시시허게 고로코롬이나 살아볼라먼 살아보등가요. 벹이 좋소. 짜울짜울, 나도 잠이 와라. 안 깻으먼 좋겄소. 이냥 이대로 봄벹 속에 잠을 잠시로 다시는········
#3. 살아봉게 말이어라. 시간은 앞으로만 흘르는 것이 아니고라. 멫살부텀이었능가는 몰라도라. 옛 기억들이 시방의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서라, 앞도 뒤도 읎이, 말하자먼 제 꼬리를 문 뱀맹키 말이어라.나는 말이어라.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되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맹키어라. 이럴 중 알았으먼 말이어라, 날 서고 아픈 기억 말고라, 되새기기 좋게, 되새기먼 함박웃음이나 벙글어지는 말랑말랑 보들보들, 그런 기억이나 맹글어서라, 요리 벹 좋은 날에 벹 속에 나앉아 따독따독 이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먼 안 좋았겄소이. 누군들 그리 살고 싶지 않았겄어라. 그리 살고 싶어도 안되는 것이 시상지사(世上之事)지라. -세월中
#4. 어려서는 하늘만 우러렀으나 나이드니 발밑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남은 물론이거니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나의 실수, 나의 못남조차 애처롭다. 사람이란 기대어 사는 것이라고 스무살이나 어린 제자가 알려주었다. 모두 다 아는 것을 나는 몰랐다. 기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고기가 자유롭게 바다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부레 덕분이다. 부레는 빈 공간에 불과하다. 그 비어 있음이 자유를 가능케 하고 세상을 품게 한다. 비어 있어야 남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을 마흔 훌쩍 넘어서 알았으니 죽기 전에 소설은 관두고 인간 노릇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낮에는 태양빛에 가려 존재조차 희미하고, 때로는 달빛에 가리고, 그러던 어느 달없는 밤, 외로운 누군가의 앞을 밝혀주는 산골 마을의 희미한 가로등이면 어떠랴. 그 순간 외로운 누군가에게는 태양보다 소중한 빛이 아닌가.
기댄 바 없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니 무수한 것에 기대어 살아왔다. 제대로 채우지도 비우지도 못한 지금으로서는, 더 높이 날든, 더 낮게 기든, 지금보다는 나아지기 위해 노력은 해보겠노라고, 감사의 말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말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