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에 대해서 이제 나는 크고 위대한 무엇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랑도 그냥 삶 속에 있는 때로는 단단하고, 때로는 흩어지기 쉬운 느낌일 뿐이다. 다만 생각하기 따라서 다른 형태로 규정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운명으로, 또 어떤 사람은 우연으로, 나 같은 사람은 생활 속의 작은 위안거리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 사랑은 내게 일종의 환각제 같은 것이다. 
 

#2. "내가 결혼한 이유는 잊어버렸고,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은 말이야, 사랑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결혼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지속하고 있는 그 사랑이 함께 나눈 이에게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어떤 제도 속으로 그와 나의 관계를 결박하고 법으로 그 사랑을 구속하고 싶어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어차피 얼마 못 가는 사랑을 최대한 지속시키고 구속시키는 방법이 결혼 아닐까?"
 "네 말은, 결국 사랑하지 않게 될 거니까. 지금 사랑을 보존하는 최소한의 방법으로 결혼한다 이거니?"
 "뭐 그런 거지. 하지만 다른 이유로 결혼하는 사람도 있어. 이를테면 돈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단지 외로워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또........아, 그래. 남들 다 하니까 하는 사람도 많겠다."
 이제는 사랑만 가지고 결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그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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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직서를 쓴 뒤 먹고 살겠다고 아홉 가지 잡곡을 넣어 뚝배기에 밥을 지었다.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 한 숟갈을 퍼서 갈치 한 점 올려 먹었다. 가시를 발라냈는데도 목에 걸리는 것은 무엇인가. 수명은 치받쳐 올라오는 눈물을 눌러 내리느라 두 공기의 밥을 비웠다. 목 끝까지 밥으로 채운 몸은 밥과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하품을 뱉었다. 침대에 누워 창가 저 멀리 걸린 보름달을 보았다. 얼마를 더 수고스럽게 살아내야 인생을 관조할 수 있게 될까...,수명은 하루빨리 살아서 청춘을 벗어나고 싶었다. 열병처럼 앓는 사랑이 청춘의 전유물이 아닐진대 이 청춘이 하루빨리 시들기를 바랐다. 
 

#2. "잘 지냈냐고 아직 묻지 못했어요. 내일은 뭐 할 거냐고도 묻지 못했고, 크리스마스이브엔 누굴 만날 거냐고도 묻지 못했어요. 내가 안보고 싶었냐고 물어야 돼요. 수명 씨의 가을은 어땠냐고도 물어야 되고, 서른두 살의 계획에 혹시 나라는 남자와 사는 게 들어 있는지도 물어야 돼요. 쉰 살에 나와 둘이 유럽 여행을 갈 생각이 있냐고도 물어야 되고, 당장 내일 아침을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도 물어야 돼요.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벌써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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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내일모레면 마흔이 되는 독신자의 퇴근길은 기원을 알 수 없는 멜랑콜리로 가득하다. 반대 차선의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내 눈을 깊이 찔러올 때나 정체 구간에서 한숨처럼 꺼졌다 이어졌다 하는 후미등을 바라볼 때, 나는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우울한 감상주의자가 된다. 내가 만났던, 나를 스쳐갔던 수많은 남자들의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일순 상기되면서 삶에 대해 가졌던 한때의 열망이 참으로 가소롭고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삶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 것일까. 어디서 어떻게 멈추는 것일까. 그런, 우울의 클리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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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정이 지난 여름밤이었고, 이 도시 후미진 어느 가파른 계단앞이었다는 것밖에는. 다가가서 손을 잡았던 이는 나였다. 근처에 과일가게가 있었는지 자두를 깨물었을 때나 맡아지는 냄새가 후덥한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나로서는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는 게 작별인사 대신이었다. 그가 그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든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진주알들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때였다. 그래서 잘가, 라거나 또 만나자, 고 할 수가 없었다. 뭔가를 꿰어놓은 줄이 끊어지면 그 줄에 달려 있던 것들이 한순간 후드득 바닥에 쏟아져버리듯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하게 되면 그 뒤로 시효가 지난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나와버릴 것 같았다. 나의 자리에 그가 들어와 살았던 지난 시간들, 우리가 서로를 확장시키며 깊어졌던 일들을 그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참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툭 터지면 제어할 길이 없을 거란 생각에 내면은 복잡했지만 얼굴엔 담담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는 팔 년 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이미 타인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신경숙-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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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상대는 정해졌고 마지막은 어차피 알 수 없다. 그 불안한 과정을 견디거나 즐기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인 것이다. 사실 나도 나의 판단에 확신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선과 가식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한심한 연애를 펼치고 있는 나였지만 한 가지는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의 위선은 알고 있었다. 행복한 연애와 편한 연애를 착각할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2. 확신컨대 아마 그 시간 나는 서울에서 제일 구차한 여자였을 것이다. 그저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매달리는 꼴이라니. 그래도 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도 그의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달 수 있었으니. 그 무렵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내가 그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사랑을 포기하고도 되돌려받을 수 있는 그 밖의 어떤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기억이나 감성, 후각이나 촉각, 뭐 그런 것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데자뷰처럼 기습적으로 나를 찾아올 신비로운 어떤 감각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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