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보는 것은 늘 전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에 의해, 과거에 의지하여 과거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삶에 있어서 뒤가 없는 앞이란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과거가 없는 인간은 늘 실종 상태임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가끔 과거라는 보금자리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게는 단 한순간도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늘 시간의 줄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었다. 과거 없이 산다고 해서 뭐 큰 지장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다보면 때로 음주운전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심검문이라도 받게 되면 그때 내가 무면허라는 걸 문득 깨닫는 심정 이해하실는지. 과거란 그렇듯 자신에 관한 일종의 면허증과도 같은 것이리라.

 문제는 외면할 과거가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 속해 있으려면 나는 남들보다 두배의 속도를 내야 한다. 때로는 가속도가 필요하다. 무면허니까 캄캄한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도 미친 듯이 질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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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오래 목마를 수 있어 그늘진 심장을 가진 선인장으로 지내왔고, 매우 아름다워 일찍 시드는 장미조차도 경멸해왔지만, 기왕이면 장미보다는 선인장이 되길 원했다는 쓸쓸한 자랑으로, 사막에서도 우물 따위엔 기대고 싶지 않았다는 괴로운 혼잣말로 나를 유기(遺棄)한다.

이응준-그 침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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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외도 

육중한 분량의 몇 페이지만 찢어내고, 안심하고
해보자
세상 루머가 일시에 용서되는 순간을 낡은
이 팔다리로 어디 해보자
햇빛이 이맛살의 근육을 때리고 지나가도
정신차리지 말자
 
아침, 언덕에서 마악 내려오면
간밤의 빗줄기로, 상가의 셔터가
새것처럼 반짝거리나,
시효보다 빠르게 녹슬게 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음을
굳이
말로 하지 말자 등교하는 아이들의
도시락과 신주머니에 들어 있는 깨끗한 영혼도
쳐다보지 말자 끊임없는 식욕처럼 끊임없는
소화불량, 24시간 편의점에서 소화제를 사 들고
근처 카페의 아침 커피 한 잔 같은
짧고 개운한 후회도 하지 말자 그의 인생을,
그의 또 다른 인생인 나를
내 한 페이지의 인생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도, 자판기에서 백 원짜리 티슈를 꺼내 들 듯
쉽게 쓰고 쉽게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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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나에게 정도의 차이일 뿐 어차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대개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더 마음이 끌린다거나 나를 더 생각해 준다거나 도덕적으로 장애가 없다거나 순수하다거나 심지어는 사랑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다 무의미한 핑계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섹스에 명분은 필요 없다. 사랑하지 않는 섹스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2. 사람들은 남자/여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먹이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일한다. 먹이도 정체성도 부족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나약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3. 나는 코웃음치면서 일어섰다. 세트 메뉴의 마지막 코스인 커피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식사 코스를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나는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떠나갈 것이다. 애피타이저는 생략할 수도 있고 버터를 두껍게 바른 빵을 맨 마지막에 먹을 수도 있다.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시고 식사 전에 초콜릿을 먹고 야채 샐러드에는 간장 소스를 뿌린다.
겁낼 것이 무엇인가. 나는 연애라는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脫戀愛主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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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때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 사람이 상처 한번 받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겠어. 다행히 그것도 길들이기에 따라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 사람의 숨결 속에서 말이야. 과거의 자신을 애써 부인하려고 하지 마. 그때엔 그게 아마도 최선이고 진실이었을 거야. 저 봐, 지금도 시간은 마라톤 선수처럼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어. 느린 듯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굉장한 속도로 말이지. 이 순간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단 거야. 그러니 너무 과거에 대해 집착하지 마. 거꾸로 나이를 먹어 난쟁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말이지.

  -윤대녕 '가족사진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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