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은 잡아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황인찬-종로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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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중략)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 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그래서中'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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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견뎌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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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게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게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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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닮지 않은 각자가 단지 떠내려가는 순간이 겹쳤을 뿐

너와 나는 안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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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낭자하는 한복판에 아내가 서 있다면 장수는 아내의 목을 먼저 쳐야 한다. 장수의 아내는 적의 집중 표적이며 그녀를 호위하느라 아군의 전력만 손실된다. 비록 막사에서 병사들의 밥을 챙긴다 한들 도움이 되겠는가. 밥을 푸던 병사들이 주걱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위해야 한다. 어리석은 내조를 목도하고도 어화둥둥 내 사랑 손 놓고 있으면 그는 장수의 갑옷을 벗어야 한다. 제 목숨뿐 아니라 아군 전체가 몰살될 수도 있음이다.

 

'김려령-일주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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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랑? 어른의 연애? 나는 그런거 모르겠다. 전장 한복판에서 물러나야 그때의 참혹함을 알 수 있다. 시간과 상황이 지나야만 버텼던 나를 올곧게 볼 수 있다. 잘했고 못했고가 아니라 잘 싸웠다고 나 자신한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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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을 앞두고도 별다른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 사이. 둘이 있으면서도 설레는 순간을 찾기 힘든 사이. 옷을 벗고 함께 누워도 가슴 두근거리는 느낌이 없는 사이. 밥 먹고 술 마실때나 기분 좋아지는 사이. 그러면서 의무처럼 습관처럼 관성처럼 만나는 사이. 그러다가 툭하면 쓸데없는 말다툼이나 벌이고 마는 사이."

....."모르겠어.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뭔가 필요해.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어떤 계기가 필요해. 변화의 계기가."


"한차현-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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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되는 기행이 미친놈 발싸개로 끝나기를 바랬지. 후회로 첩첩이 쌓아올린 시간들을 잠못드는 밤이면 수없이 옷가지들을 싸고 또 싸는 상상을 아직도 하는 중이니까.

새벽잠 전혀 모른채 고스란히 도둑당한 표정으로 그 짐을 또 풀고 풀고_ 그래서 너만은 그런 선택을 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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