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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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어찰정치


'정치적'이라고 하면 어쩐지 권모와 술수의 냄새가 난다. 아마도 정치의식보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역사적인 암투를 먼저 배우고, 더 많이 들어오고,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는 존경할 만한 정치인 한 사람이 목마르다. 온 국민이 신뢰할 만한 투명한 정치인 ’한 사람’이 출연해준다면, 흙탕물 같은 정치권을 지켜보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뜨거운 속이 여름날의 얼음냉수를 마신 듯 시원해질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은밀히 여론을 조작하는 정치적인 ’비밀 문건’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어떨까? 아마도 그 정치적 정당성을 가늠해보기도 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말 것이다. '비밀'과 '조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현실 정치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칠 것이고, 정치권의 투명성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들끓으리라. 더구나 최고 통치자가 관련 되어 있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국정을 도탄에 빠뜨릴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올 것이라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실제로 역사가 발칵 뒤집힐 만한 '비밀 문건'이 발견되었다. 여러 모로 놀라운,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경악할 만한 '비밀 문건'이다. 국왕이 직접 작성한 '정치적인 비밀편지’라는 것이 놀랍고, 비밀편지를 쓴 사람이 '정조’라는 것이 놀랍고, 한 나라의 국왕이 4년 동안 한 사람에게만 350여 통의 편지를 썼다는 것이 놀랍고, 그 수신자가 '정조 독살설'에서 범인으로 지목되는 '심환지'(!)라는 것이 놀랍고,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담겨 있어 국왕이 없애라고 거듭 명령한 문건인데도 고스란히 보존되었다는 것이 놀랍고, 그것이 이제야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것이 놀랍니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의 비밀편지'를 정밀하게 분석한 한 편의 논문으로 읽힌다. 그만큼 학술적인 가치가 돋보이는 책이다. 정조의 어찰이 세상에 공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역대 국왕의 어찰문화, 정치가 정조의 막후정치의 실상, 편지에 드러나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어찰첩>의 체계적인 문서 비평에 이르기까지 면밀하게 분석했다.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은 물론, 신뢰할 만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구 가설까지 반박하는 탄탄한 고증과 학술적인 해석이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 이 책은 정조 역사는 물론, 문학과 서예, 궁정문화와 생활사 같은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필독서가 되리라 확신한다.  

무엇보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의 정치 스타일과 리더십, 그리고 문학적인 자질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보여주는 매우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정치 행위를 담은 소중한 역사 사료이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없애려' 했던 비밀편지의 존재를 통해 막후정치의 실상을 드러내고 여론 조작 혐의까지 증언해주는데도, 독자는 <정조의 비밀편지>를 읽으며 오히려 '정조'가 얼마나 훌륭한 정치가인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어찰정치’라는 정치문화이다. 선조의 비밀편지를 접한 정조가 1794년에 선조의 어찰에 쓴 발문을 보면 비밀편지 왕래의 정치적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군왕은 친밀하지 않으면 신하를 잃는다. 남들보다 현명한 신하를 사사로이 대한 까닭은 사사로이 대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인의 은미(隱微)한 뜻은 온 세상을 진작시키고 뭇 호걸을 일어서게 한다"(39). 군주의 동양적인 미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어찰정치는 권모나 술수가 아니라, 정치 철학이 담긴 통치기술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정조가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어찰을 모은 <어찰첩>은 그가 얼마나 노련한 현실 정치가였는지 잘 보여준다. 관료의 인사문제와 정치현안, 그리고 개인의 신상과 감정에 관한 문제가 주류를 이루는(73) <어찰첩>은 사적이고 은밀한 '편지'이나 본질적으로 정치문건이다. 

놀랍게도 정조의 '어찰정치'는 정보와 여론을 장악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정조는 치세 후반기에 가까운 신하에게 비밀편지를 많이 보냈는데, 공개적인 논의와는 별도로 비공식적으로 정국현안을 논의하는 사적인 통로로 대신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친밀감을 담은 사적인 편지로 신하의 충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공식적인 절차와 비공식적인 절차를 병행함으로써 국정을 장악하고 정보를 신속하게 얻는 방안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는 정조가 편지왕래를 통해 궁궐 밖 세상의 정보와 여론을 환히 꿰고 통제했던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를 정(正)'를 새겨넣고 싶을 만큼 '성군'의 이미지를 가진 정조가 어찰을 통해 여론을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시키고, 상소를 올리거나 중지하도록 '조정'하는(74) 막후정치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에는 국왕의 의도대로 상소가 작성되거나 중단되는 정조시대 정치의 특수한 정황이 흔하게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어찰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소통방법을 고안하여,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바짝 끌어들이고 통제하고 자기 사람으로 활용했다. 특히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심환지'를 적극적으로 포섭한 그의 정치적 포용력과 냉철한 리더십은 '탁월함'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이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정치가로서의 정조'의 무서운 면모를 보여준다. "정조는 특별히 노론 벽파의 심환지에게 정국 현안을 처리하면서 적당한 타협이나 부드러운 화합보다는 선명하게 모서리를 드러내어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했다. 노론 벽파의 당파적 성격을 그렇게 세워나감으로써 다른 당파를 견제하는 효과를 보려 한 듯하다. 시파와 벽파, 노론과 소론, 남인의 여러 당파가 각축하는 상황에서 노론 벽파의 존재 의의는 원칙에 충실하게 강경한 정치노선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본 듯하다. 그처럼 정조는 벽파 신료에게 의리를 강하게 펴고, 소신 있게 자기 당파의 주장을 펼치라고 지속적으로 주문했다"(81). 

셋째로 <정조의 비밀편지>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인간 정조의 매력이 유쾌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시대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편지를 직접 써서 신하와 왕래했다. 그런데 정치문건이나 비밀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는 독특한 감동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재밌었던 사실은 정조가 농담과 속담까지 자주 구사하면서 욕설까지 서슴지 않고, 특히 '껄껄'(呵呵)처럼 친근하고 가벼운 표현을 흔히 사용했다는 것이다(88). 요즘 세대들이 많이 사용하는 'ㅋㅋ'나 'ㅎㅎ', ㅋㄷㅋㄷ'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이 밖에도 "문학과 서예, 궁정문화와 생활사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도 조명할 가치가 충분하다"(113) '정조어찰' 만큼이나,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이 자그마한 책 안에 참으로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이 많이도 담겼다. 작지만 '배움'이 알뜰한 책이다. 아마도 '정조의 독살설'을 반박하는 증거가 제시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독자가 흥미를 가질 것이다. 나도 '정조의 독살설'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사'라면 공기관에서 가르쳐주는 지식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나와 같은 독자의 눈에도 '정조의 비밀편지'가 가진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느껴진다. 공식적인 사료에는 담기지 않은 정조의 사생활은 물론, '은밀하게' 진행된 막후정치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사적 실제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한 기분이다. 더구나 국왕이 직접 쓴 편지가 한 두 통도 아니고 세계도 놀랄 만한 수준의 양이 고스란히 보존되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정경성이 입증되는 셈이다.   

강제적인 근대화와 열강의 간섭 속에 겨우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민주정치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유산이 미약하다. 더구나 일제의 잔재 속에 '우리 역사'는 아직도 바른 뿌리를 곧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사가 간직한 매서울 정도로 노련한 정치가와 만나는 일은, 그것도 한심한 당쟁만 일삼았다며 우리를 부끄럽게 했던 그 역사의 한 가운데서 만나는 일은 그야말로 신선하고 유쾌한 충격이었다.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도 이 글을 쓰며 많이 감격했던 것이 느껴진다. 어떤 대목은 책의 전반에 걸쳐 반복하여 말하여지기도 한다. 

나는 왜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주제에 <정조의 비밀편지>가 포함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뽑아낸 한국문화 키워드는 '어찰정치'이다. 군왕과 신하가 가족과 같은 친밀감으로 팀워크를 이루면서도, 고도로 정밀한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정조의 어찰정치는 권모와 술수를 뛰어넘는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아마도 내가 우리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정치의식'을 배운 것은 '정조'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우리 역사가 강조해온 군왕의 덕(德)이 개인의 인품과 관련된 추상적인 개념이었다면, 정조가 보여주는 어찰정치는 구체적인 군왕의 덕(德)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살면서 인생의 '모델'을 갖는 일은 꿈을 키우고, 지향하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어찰정치'라는 독특한 우리 문화가 역사의 비밀에 부쳐지지 않고, 정치적 문화 유산으로 남아준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수준까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의 유산이라는 것이 가슴 벅차다. <정조의 비밀편지>를 시작으로, '정조의 비밀편지'가 각계에서, 여러 각도와 여러 모양으로 재조명되어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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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혼 - 시간을 말하다
크리스토퍼 듀드니 지음, 진우기 옮김 / 예원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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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말하다.


꽤나 집중력을 요하는 책이다. 언제가 읽었던 과학자의 책을 읽으며, 시간은 ’없는 것’이라는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했던 노력의 두 배쯤 더 노력을 기울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씩 끊어 읽을 때는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듯 하다가,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읽은 것들이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당황스러운 책이다. 긴 사색의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쩌면 통합적인 이해보다 사색의 고리를 하나씩 끊어서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듯하다. 

’찰나에서 영원까지, 시간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는 저자는 시간의 ’찰나’를 지루하도록 정밀하게 포착하며, ’영원’의 지평까지 탐색한다. 매우 사적인 일상에서 시작되는 작가의 ’시간’ 관찰은 겨울에서 ’봄’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뜨락에서 시작되어 한 해 동안의 계절을 돌아 다시 눈 내리는 ’겨울’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관찰된 사소한 에피소드를 ’문’으로 하여, 철학, 예술, 신화를 넘나들며 시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끝끝내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내 머릿속에 이 모든 설명들이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다. 


"이것, 이 현재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이해 속에 녹아 있고 우리가 접하기도 전에 달아나며, 존재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윌리엄 제임스, 39). 
잡으려는 그 순간 이미 달아나버리는 ’시간’처럼 ’시간’ 그 자체가 수수께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해박함이 부러우면서도, "시간의 역설에 빠져들수록 나는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알게 된다"(39)는 작가의 고백이 위안이 된다.


"하지만 좀 더 엄격한 문자적 의미에서 볼 때 ’현재’라는 시간은 없다. ’지금’은 우리가 작업해야 하는 전부이고 ’지금’은 내가 시간을 접촉하고 그것을 새로이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지점이다"(38-39).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념일 뿐이고, 우리는 오직 ’찰나’를 지나는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붙잡을 수 없지만 그 ’찰나’를 붙잡아야 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우리는 시간을 지도처럼 사용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디 있었는지 가리킬 수 있고, 또 어디로 갈 것인지 계획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지도 제작사이다"(201).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시간’의 관념은 현재의 삶에 방향을 잡아준다. 


"시간을 좀 더 확보하는 방법, 주변 세상의 속도를 감속시키는 분명한 방식은 우리가 가진 제한된 시간을 더 알차게 쓰는 것이다"(209).

언젠가 한 목사님이 시간을 활용하는 지혜를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침에는 ’분’과 ’초’를 계산하여 생활한다는 설명을 하신 적이 있다. 대부분 아침에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분’을 다투고 ’초’를 다투어 시간을 쪼개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침보다 여유로운 저녁 시간은 상대적으로 ’낭비’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잘 활용하고 싶으면 향략과 쾌락에 젖기 쉬운 ’밤 문화’가 아닌, ’아침 문화’를 활용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시간’에 관한 온갖 사색과 관념과 설명과 이론을 모두 이해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시간을 살고 있고, 그 시간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며, 그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 한다는 평범한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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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쥐 퍼민
샘 새비지 지음, 황보석 옮김 / 예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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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퍼민’의 이야기는 슬프고 우습고, 우스워서 더 슬프다.


수준 있는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라면, 그 지적 허영심을 제대로 자극하는 ’소설’이 나왔다. 일단, 수많은 문학작품과 고전들이 마치 어떤 ’암호’처럼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데, 유명한 작품들도 많지만 장서가 상당한 도서관이나 고서점의 한 켠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을 것만 같은 ’잘 읽히지 않는 작품’들도 상당하다. 그것만으로도 내공이 상당한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공만큼이나 깊이가 있는 철학적인 통찰이 돋보이지만, 나의 독서 수준이 작가의 실력에 미치지 못하여 책의 분위기나 느낌을 서평에 담을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소설 쓰는 쥐 퍼민>의 주인공은 진짜 ’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처럼 마치 인간으로 착각하게 되는 ’쥐’이다. 그러나 <개미>처럼 개미의 세계를 탐구한 것은 아니고, 인간 같은 쥐가 인간의 세계를 탐구하며 인간을 풍자하고 은유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인간의 정신을 가졌지만, 쥐의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쥐’로 분류되는 그런 존재이다(솔직히 나는 ’퍼민’을 쥐의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보고 싶었다).

’퍼민’은 보스턴의 한 서점 지하실에서, 엄마 쥐가 <피네간의 경야>(제임스 조이스의 소설)라는 걸작(작가가 결작이라고 말해줘서 이 책이 걸작인줄 알았지만)을 갈가리 찢어 만든 임시 처소에서, 태생부터 불길한 열세 번째로 ’쥐’로 태어나, 열두 개의 젖꼭지를 놓고서 싸움을 벌였다.  불행히 발육이 나쁜 ’퍼민’은 더 힘쎈 배내새끼들 중 하나에 의해 우격다짐으로 밀려나 순전히 남은 찌꺼기에 의존해 살아남았다. 고독하고 배고픈 퍼민은 ’병적인 서적 탐식증’(38)을 보일 만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책을 뜯어먹기 시작하면서 책의 ’맛’을 알게 되었고, 책을 읽는 방법까지 터특하게 되었다. "어떤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서는 인쇄된 부분의 일부를 조금 갉아보기만 하면 되었다"(64).

그러니까 ’퍼민’이 병적인 서적 탐식증을 갖게 된 것은, 엄마의 젖꼭지가 열두 개뿐이라는 ’결핍’과 ’부조리’ 때문이다. 열두 개의 젖꼭지를 가진 열세 마리의 쥐가 ’나눠먹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고, 그 경쟁의 과정에서 소외되는 존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저마다의 ’생존 양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재 사이의 ’단절’이 보인다(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결핍’과 ’부조리’에서 존재의 ’단절’이 시작된다고 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책의 맛을 알게 된 ’퍼민’은 동족을 버리고, 온갖 종류의 책을 탐닉하며 역사와 시대, 공간을 뛰어넘고 국가와 언어를 넘나들며 ’세상’을 탐험한다. 특별히 ’소설’을 사랑하는 퍼민은 작품 속 주인공과 일체가 되어 사랑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고 배웠다. "나는 책들이 나의 꿈속으로 들어오도록 했고 때로는 나 자신이 책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68).

그러나 ’퍼민’은 "지성과 기지와 우아하고 세련된 감정과 증대하는 박학다식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무능한 피조물로 남아 있는"(70) 자신을 깨닫는다. ’퍼민’에게는 목소리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구절들을 낭송하며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내지만,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이것이 다였다. "찍찍 찍찍 찍찍"(71).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는 정말 슬펐다. 

’퍼민’은 거울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줄 아는 영민한 쥐이지만,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보고 더 고통스러웠다. ’퍼민’의 자아성찰은 참으로 비참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션트나 피위(형제 쥐)의 유쾌하지 못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지만 그들과 흡사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그 고통의 강도가 나의 엄청난 허영심과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생각 때문에 속만 더 상할 뿐이었다. 그저 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허영심까지 강하다는 것, 그것은 웃음거리를 더해주는 것밖에 되지 못했다"(74).  

’퍼민’은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온갖 미인들을 알게 되자 그 현저한 차이를 깨닫고, 무언가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무엇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얼핏 보게 될 때마다 ’괴물’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겁에 질렸기 때문에, 하찮은 정신적 속임수 하나를 개발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건 나야"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저건 그야" 하고 달아나는 식으로"(75-76).

그러나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퍼민’은 결국 책 ’속’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 ’밖’, 어떤 존재와도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한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서점 주인 ’노먼’을 향한 그의 사랑은 배신 당했다. ’노먼’에게 ’퍼민’은 쥐약을 놓아 잡아야 할 한마리의 끔찍한 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통’한다고 생각했던 자신과 닮은 고독한 ’제리’에게서조차 그는 지독한 외로움과 단절을 경험할 뿐이었다. "나는 제리를 사랑했지만 제리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아닌 척하고 싶어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하는 저녁 시간에 그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할 때 그는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205).

’퍼민’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점’과 ’극장’이 재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퍼민’이 탐닉했던 예술과 고전과 환상의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서점’과 ’극장’이 퍼민에게 보여주었던 세상은 ’허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소설 쓰는 쥐 퍼민>,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문학작품이 ’암호’로 읽혔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분명 웃어야 할 곳에서 웃지 못하고, 슬퍼해야 할 곳에서 슬퍼하지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독한 사춘기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존재를 슬퍼하고, 생의 허무함에 절망하고, 열에 들뜬 사랑이 배신을 당하고,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도 누구와도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해 외롭고 고독했던 그 시절. 그런데 중년의 나이에 경험하는 사춘기의 감정이 훨씬 더 끔찍했다! 책의 표지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보고 마치 속세를 떠난 ’도인’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노년기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면 ’눈물’ 없이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쥐 ’퍼민’에 이 도인 같은 작가를 대입하며 읽었다. 작가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며 말이다). 쥐 ’퍼민’처럼 나도 눈물 없이 모든 것에 고별과 작별을 고하고 싶다.

"메마르고 차가운 것이 세상이었고 아름다운 것이 글이었다"(257). 이 한마디가 이 책의 전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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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스 가족의 특별한 비밀 - 2009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 생각하는 책이 좋아 6
인그리드 로 지음, 김옥수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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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휩쓸었다’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며, 신뢰할 만한 단체에서 선정하는 각종 ’최우수도서’에 이름을 올린 어마어마한 이력에 빛나는 성장소설이다. 각종 수상 이력과 ’성장소설’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착한 책’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책의 무엇이 그토록 ’어른’들을 열광시켰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특별한 비밀을 가진 밉스 가족을 소개합니다.
<밉스 가족의 특별한 비밀>은 정말 특별하다! 밉스네 가족은 ’열세 살 생일’이 되면 신비한 초능력을 갖게 된다. 특별한 밉스 가족을 잠깐 소개하자면, 엄마는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엄마는 실수도 ’완벽하게’ 한다. 맏이인 로켓 오빠는 온몸 가득 전기가 흘러 화가 나면 온 도시를 암흑에 빠뜨릴 수도 있다. 피시 오빠가 흥분하면 그저 그런 날씨가 갑자기 사나운 날씨로 돌변한다. 화가 나면 바람을 일키고 무서운 태풍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동생 샘슨은 아직 열세 살이 안 되었기 때문에 어떤 초능력을 갖게 될지 모르지만 숨는 일에 명수이다. 이제 막 이가 나기 시작하는 여동생 집시는 인형처럼 생겼다. 할아버지는 지진을 일으켜 땅덩어리를 넓힐 수 있다. 공중에 나도는 라디오 전파를 잡아서 유리병에 넣어 두고 두고두고 좋아하는 음악과 연설을 들을 수 있는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정말 특별한 분이신 아빠는 특별한 초능력도 없고 머리도 대머리이지만 착하고 다정한 분이다.


밉스 아빠가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어요.
어떤 놀라운 초능력이 나타날지 기다려지는 밉스의 열세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아빠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엄마와 로켓 오빠만 아빠가 계신 병원으로 떠나고,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아빠를 구할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은 밉스, 밉스에는 과연 아빠를 구할 수 있는 초능력이 생겼을까?

아빠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빠가 계신 병원으로 가려는 밉스는 ’핵심 성서 공급 주식회사’라고 쓰여 있는 분홍색 버스에 몰래 올라탄다. 그리고 밉스의 계획을 눈치 챈 피시 오빠와 로켓 오빠를 짝사랑하는 ’바비’ 언니, 밉스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친구 ’윌 주니어’, 버스를 운전하는 레스터 아저씨와 몰래 버스에 숨어 있는 샘슨까지, 모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함께 떠나게 된다. 밉스 아빠에게 기적이 일어날까?


<밉스 가족의 특별한 비밀>에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
밉스의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분홍색 버스는 아빠가 계신 병원과 정반대의 길로 달렸고, 열세 번째 생일날 자신에게 나타난 초능력은 밉스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초능력과 달랐다! "내 눈동자 색깔이나 발가락 길이가 그런 것처럼 내 초능력 또한 내가 바라던 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런 것처럼 이제 나도 아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하나도, 하나도 없었다"(251).

일은 자꾸 꼬이고 몹시 힘들었지만, 그러나 밉스는 아빠를 찾아가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이 풀리는 쪽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걸, 그게 아빠랑 만나는 걸 내일 아침까지 미뤄야 한다는 걸 뜻하더라도 나는 내 책임을 다해야 했다. 견길 수 없을 만큼 힘들어도 그렇게 해야 했다"(157).

꼬마 아가씨였던 밉스는 이 여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윌 주니어를 통해 ’비밀은 밉스 가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까칠하게 구는 바비 언니와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사실은 바비 언니가 외롭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밉스는 자신에게 생명을 깨어나게 하는 초능력이 생겼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시시한 초능력을 갖게 되어 실망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밉스에게 나타는 초능력은 그 사람 몸에 그려진 문신이나 그림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었다. 

아직 초능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는 밉스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레스터 아저씨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분홍색 버스를 타고 다니며 분홍색 성경책을 배달하는 레스터 아저씨는 항상 자신이 없고, 말을 더듬었다. 아저씨 팔에 새겨진 ’론다’(엄마)와 ’칼린’(사장이 이분의 조카이다)이라는 문신을 통해 레스타 아저씨의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밉스는 왜 레스터 아저씨가 그렇게 자신이 없고 말을 더듬는지 깨달았다. 그 두 여자의 목소리가 아저씨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아저씨를 깔보는 말만 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여자의 지겨운 잔소리가 아버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아저씨가 말을 더듬고 어깨를 움찔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릴 아줌마’ 아줌마를 만나고 아저씨 마음이 목소리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릴 아줌마가 레스터 아저씨를 격려하고 자부심을 갖도록 해줄수록, 시끄러운 두 여자의 잔소리는 사라지고 아저씨 자신의 목소리가 밉스에게 들렸던 것이다. 

밉스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머릿속에는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가 늘 뒤죽박죽 엉켜 있을 것이다. 내 머리속에서도 엄마 아빠 목소리가 툭하면 튀어나와 옮고 그름을 알려 주지 않던가! 애쉴리 빙과 엠마 플린트가 곁에 없는데도 걔들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오며 나를 괴롭히지 않던가, 그래서 내가 풀이 죽지 않던가! 나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나 자신의 큰 목소리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구분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189).

밉스는 아저씨 스스로 그런 소리가 일어나든 말든 내버려 두는 것이 역겨웠다. 밉스는 앞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쥐고 흔드는 걸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못된 사람의 못된 목소리가 그런 식으로 내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203). ’다른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드는 초능력을 갖게 된 밉스는 훈련을 통해, 뒤죽박죽 들려오는 많은 목소리 중에서 귀 기울어야 할 소리와 흘려 들어야 할 소리를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밉스 가족만 특별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밉스 가족은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초능력이 너무 ’특별’하기 때문에 그것이 초능력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초능력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하는 밉스의 엄마는 밉스에게 이런 말을 들려 준다. "모든 일을 늘 제대로 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몰라. 모든 걸 잘하는 게 늘 좋은 건 아니란다"(80).

밉스 가족은 자신의 초능력을 조절하는 법을 훈련하고 자제력을 키운다. 초능력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이웃에게 유익하게 사용될 때 진짜 값진 것이다. 열세 살 생일에 초능력을 갖게 되는 밉스네 가족처럼, 우리도 살면서 자신만의 장점을 발견하고 계발하게 된다. 밉스처럼 내가 가진 장점이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진 ’특별한’초능력을 서로 인정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밉스는 알려 준다.

밉스가 가르쳐주는 가장 큰 감동은 ’내면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법이다. 레스터 아저씨처럼,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못된 사람의 못된 목소리가 나를 깔보는 소리를 해대는 데도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내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밉스 가족의 특별한 비밀>은 ’어른’들에게 더욱 뭉클한 감동을 주는 성장소설이다. 청소년들에게 밉스는 신나는 모험을 함께 떠나는 '특별한 친구'가 되어주겠지만, 어른들에게 밉스는 '특별한 스승'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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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츠가 게이츠에게 -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빌 게이츠 시니어, 메리 앤 매킨 지음, 이수정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서는 삶’을 배우다.


다 속일 수 있어도 꼭 하나 속일 수 없는 대상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일지라도 가족 안에서는 다르게 평가받는 경우를 종종 본다. 가정생활보다 사회생활에 더 치중된 ’아버지’에게서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밖’에 나와서는 평화를 외치지만 가족에게는 폭군이 되기도 하고, ’밖’에 나와서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가족 내에서는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우는 아버지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가족 내에서의 평가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진짜 평가라고 본다. 그 누구에게보다 가족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면 진짜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기 아버지를 ’나의 역할 모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들이 있다. 더군다나 그 아들은 세계 최대 IT기업의 공동창업자이며 세계적인 거부로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물이다. 세계적인 부호를 아들로 두었으며, 그런 아들에게 존경을 받는 아버지 ’빌 게이츠 시니어’가 <게이츠가 게이츠에게>라는 책을 펴냈다. ’게이츠’를 키우며 체험적으로 터득한 자녀교육에 관한 교훈을 회고 형식으로 담아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특히 아버지라면 관심을 가지고 읽어볼 만한 책이다. 

2007년 빌 게이츠 회장이 각국 정부 및 비영리단체들과 협력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사회적으로 큰 관심과 반향을 일으켰었다. 정부, 기업, NGO들이 이른바 시장의 힘을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 데 적극 활용해 세계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앞장서며, 기업들이 이윤 추구와 더불어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거대자본가의 발언이었기 때문에 비판도 따랐지만, 세계를 상대로 적극적인 자선사업을 통해 ’나눔’과 ’기부’를 실천하려는 그의 의지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이츠가 게이츠에게>를 읽어 보면, 빌 게이츠가 주창한 ’창조적 자본주의’는 바로 아버지 게이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배운 소중한 교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부유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받은 풍족한 혜택에 상응하는 대가를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연방상속세 같은 세금제도야말로 정부 재정운영이 가장 공정한 방안이라고 믿는다"(156).

<게이츠가 게이츠에게> 전하여 주는 메시지는 ’잘 난 내 아이’를 만드는 값싼 성공 공식이 아니라, 부모가 삶으로 가르치는 ’삶의 가치와 원칙’이다. ’자녀교육’이라고 하면 학비를 대주는 것을 최고의 부모 역할로 생각하는 한국의 부모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아버지 게이츠가 가르쳐주는 삶의 가치와 원칙은 ’땀’, ’나눔(봉사)’, ’가족’로 집약된다. 땀의 가치를 보여주는 부지런한 아버지였으며, ’나서기’에 일종의 중독현상을 보일 만큼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 따뜻한 아버지였으며, 누구보다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는 너그럽고 인내심 많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가족의 삶을 묘사하는 풍경 중에 가장 인상적이고 부러웠던 교육의 한 장면을 옮겨 보면 이렇다.

"우리 집에서는 저녁식사 대화 도중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가족 중 누구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옆의 서재로 갔다. 그리고는 대형사전을 펼쳐 들고 단어를 찾아 큰 소리로 모두에게 뜻을 읽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트레이(빌 게이츠의 아기 때 이름)는 어떤 문제라도 그에 대한 답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96).

세계적인 부호가 된 아들 게이츠보다, 땀과 나눔(봉사), 가족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 아버지 게이츠의 풍성한 삶이 오히려 더욱 부러워진다. 빌 게이츠 시니어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나서는 삶’이었다고 정의한다. 나보다 남을 위해 나서는 삶, 그 삶이 세계적인 부호 ’게이츠’를 키웠다. 

’부모됨’이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인 듯 하다. 부모가 행복하지 않고는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수 없고, 부모가 옳은 길을 가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옳은 길을 가라 가르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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