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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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어찰정치


'정치적'이라고 하면 어쩐지 권모와 술수의 냄새가 난다. 아마도 정치의식보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역사적인 암투를 먼저 배우고, 더 많이 들어오고,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는 존경할 만한 정치인 한 사람이 목마르다. 온 국민이 신뢰할 만한 투명한 정치인 ’한 사람’이 출연해준다면, 흙탕물 같은 정치권을 지켜보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뜨거운 속이 여름날의 얼음냉수를 마신 듯 시원해질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은밀히 여론을 조작하는 정치적인 ’비밀 문건’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어떨까? 아마도 그 정치적 정당성을 가늠해보기도 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말 것이다. '비밀'과 '조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현실 정치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칠 것이고, 정치권의 투명성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들끓으리라. 더구나 최고 통치자가 관련 되어 있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국정을 도탄에 빠뜨릴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올 것이라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실제로 역사가 발칵 뒤집힐 만한 '비밀 문건'이 발견되었다. 여러 모로 놀라운,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경악할 만한 '비밀 문건'이다. 국왕이 직접 작성한 '정치적인 비밀편지’라는 것이 놀랍고, 비밀편지를 쓴 사람이 '정조’라는 것이 놀랍고, 한 나라의 국왕이 4년 동안 한 사람에게만 350여 통의 편지를 썼다는 것이 놀랍고, 그 수신자가 '정조 독살설'에서 범인으로 지목되는 '심환지'(!)라는 것이 놀랍고,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담겨 있어 국왕이 없애라고 거듭 명령한 문건인데도 고스란히 보존되었다는 것이 놀랍고, 그것이 이제야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것이 놀랍니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의 비밀편지'를 정밀하게 분석한 한 편의 논문으로 읽힌다. 그만큼 학술적인 가치가 돋보이는 책이다. 정조의 어찰이 세상에 공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역대 국왕의 어찰문화, 정치가 정조의 막후정치의 실상, 편지에 드러나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어찰첩>의 체계적인 문서 비평에 이르기까지 면밀하게 분석했다.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은 물론, 신뢰할 만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구 가설까지 반박하는 탄탄한 고증과 학술적인 해석이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 이 책은 정조 역사는 물론, 문학과 서예, 궁정문화와 생활사 같은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필독서가 되리라 확신한다.  

무엇보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의 정치 스타일과 리더십, 그리고 문학적인 자질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보여주는 매우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정치 행위를 담은 소중한 역사 사료이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없애려' 했던 비밀편지의 존재를 통해 막후정치의 실상을 드러내고 여론 조작 혐의까지 증언해주는데도, 독자는 <정조의 비밀편지>를 읽으며 오히려 '정조'가 얼마나 훌륭한 정치가인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어찰정치’라는 정치문화이다. 선조의 비밀편지를 접한 정조가 1794년에 선조의 어찰에 쓴 발문을 보면 비밀편지 왕래의 정치적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군왕은 친밀하지 않으면 신하를 잃는다. 남들보다 현명한 신하를 사사로이 대한 까닭은 사사로이 대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인의 은미(隱微)한 뜻은 온 세상을 진작시키고 뭇 호걸을 일어서게 한다"(39). 군주의 동양적인 미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어찰정치는 권모나 술수가 아니라, 정치 철학이 담긴 통치기술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정조가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어찰을 모은 <어찰첩>은 그가 얼마나 노련한 현실 정치가였는지 잘 보여준다. 관료의 인사문제와 정치현안, 그리고 개인의 신상과 감정에 관한 문제가 주류를 이루는(73) <어찰첩>은 사적이고 은밀한 '편지'이나 본질적으로 정치문건이다. 

놀랍게도 정조의 '어찰정치'는 정보와 여론을 장악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정조는 치세 후반기에 가까운 신하에게 비밀편지를 많이 보냈는데, 공개적인 논의와는 별도로 비공식적으로 정국현안을 논의하는 사적인 통로로 대신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친밀감을 담은 사적인 편지로 신하의 충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공식적인 절차와 비공식적인 절차를 병행함으로써 국정을 장악하고 정보를 신속하게 얻는 방안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는 정조가 편지왕래를 통해 궁궐 밖 세상의 정보와 여론을 환히 꿰고 통제했던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를 정(正)'를 새겨넣고 싶을 만큼 '성군'의 이미지를 가진 정조가 어찰을 통해 여론을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시키고, 상소를 올리거나 중지하도록 '조정'하는(74) 막후정치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에는 국왕의 의도대로 상소가 작성되거나 중단되는 정조시대 정치의 특수한 정황이 흔하게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어찰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소통방법을 고안하여,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바짝 끌어들이고 통제하고 자기 사람으로 활용했다. 특히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심환지'를 적극적으로 포섭한 그의 정치적 포용력과 냉철한 리더십은 '탁월함'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이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정치가로서의 정조'의 무서운 면모를 보여준다. "정조는 특별히 노론 벽파의 심환지에게 정국 현안을 처리하면서 적당한 타협이나 부드러운 화합보다는 선명하게 모서리를 드러내어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했다. 노론 벽파의 당파적 성격을 그렇게 세워나감으로써 다른 당파를 견제하는 효과를 보려 한 듯하다. 시파와 벽파, 노론과 소론, 남인의 여러 당파가 각축하는 상황에서 노론 벽파의 존재 의의는 원칙에 충실하게 강경한 정치노선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본 듯하다. 그처럼 정조는 벽파 신료에게 의리를 강하게 펴고, 소신 있게 자기 당파의 주장을 펼치라고 지속적으로 주문했다"(81). 

셋째로 <정조의 비밀편지>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인간 정조의 매력이 유쾌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시대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편지를 직접 써서 신하와 왕래했다. 그런데 정치문건이나 비밀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는 독특한 감동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재밌었던 사실은 정조가 농담과 속담까지 자주 구사하면서 욕설까지 서슴지 않고, 특히 '껄껄'(呵呵)처럼 친근하고 가벼운 표현을 흔히 사용했다는 것이다(88). 요즘 세대들이 많이 사용하는 'ㅋㅋ'나 'ㅎㅎ', ㅋㄷㅋㄷ'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이 밖에도 "문학과 서예, 궁정문화와 생활사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도 조명할 가치가 충분하다"(113) '정조어찰' 만큼이나,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이 자그마한 책 안에 참으로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이 많이도 담겼다. 작지만 '배움'이 알뜰한 책이다. 아마도 '정조의 독살설'을 반박하는 증거가 제시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독자가 흥미를 가질 것이다. 나도 '정조의 독살설'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사'라면 공기관에서 가르쳐주는 지식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나와 같은 독자의 눈에도 '정조의 비밀편지'가 가진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느껴진다. 공식적인 사료에는 담기지 않은 정조의 사생활은 물론, '은밀하게' 진행된 막후정치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사적 실제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한 기분이다. 더구나 국왕이 직접 쓴 편지가 한 두 통도 아니고 세계도 놀랄 만한 수준의 양이 고스란히 보존되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정경성이 입증되는 셈이다.   

강제적인 근대화와 열강의 간섭 속에 겨우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민주정치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유산이 미약하다. 더구나 일제의 잔재 속에 '우리 역사'는 아직도 바른 뿌리를 곧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사가 간직한 매서울 정도로 노련한 정치가와 만나는 일은, 그것도 한심한 당쟁만 일삼았다며 우리를 부끄럽게 했던 그 역사의 한 가운데서 만나는 일은 그야말로 신선하고 유쾌한 충격이었다.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도 이 글을 쓰며 많이 감격했던 것이 느껴진다. 어떤 대목은 책의 전반에 걸쳐 반복하여 말하여지기도 한다. 

나는 왜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주제에 <정조의 비밀편지>가 포함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뽑아낸 한국문화 키워드는 '어찰정치'이다. 군왕과 신하가 가족과 같은 친밀감으로 팀워크를 이루면서도, 고도로 정밀한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정조의 어찰정치는 권모와 술수를 뛰어넘는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아마도 내가 우리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정치의식'을 배운 것은 '정조'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우리 역사가 강조해온 군왕의 덕(德)이 개인의 인품과 관련된 추상적인 개념이었다면, 정조가 보여주는 어찰정치는 구체적인 군왕의 덕(德)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살면서 인생의 '모델'을 갖는 일은 꿈을 키우고, 지향하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어찰정치'라는 독특한 우리 문화가 역사의 비밀에 부쳐지지 않고, 정치적 문화 유산으로 남아준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수준까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의 유산이라는 것이 가슴 벅차다. <정조의 비밀편지>를 시작으로, '정조의 비밀편지'가 각계에서, 여러 각도와 여러 모양으로 재조명되어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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