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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쥐 퍼민
샘 새비지 지음, 황보석 옮김 / 예담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쥐 ’퍼민’의 이야기는 슬프고 우습고, 우스워서 더 슬프다.
수준 있는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라면, 그 지적 허영심을 제대로 자극하는 ’소설’이 나왔다. 일단, 수많은 문학작품과 고전들이 마치 어떤 ’암호’처럼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데, 유명한 작품들도 많지만 장서가 상당한 도서관이나 고서점의 한 켠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을 것만 같은 ’잘 읽히지 않는 작품’들도 상당하다. 그것만으로도 내공이 상당한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공만큼이나 깊이가 있는 철학적인 통찰이 돋보이지만, 나의 독서 수준이 작가의 실력에 미치지 못하여 책의 분위기나 느낌을 서평에 담을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소설 쓰는 쥐 퍼민>의 주인공은 진짜 ’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처럼 마치 인간으로 착각하게 되는 ’쥐’이다. 그러나 <개미>처럼 개미의 세계를 탐구한 것은 아니고, 인간 같은 쥐가 인간의 세계를 탐구하며 인간을 풍자하고 은유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인간의 정신을 가졌지만, 쥐의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쥐’로 분류되는 그런 존재이다(솔직히 나는 ’퍼민’을 쥐의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보고 싶었다).
’퍼민’은 보스턴의 한 서점 지하실에서, 엄마 쥐가 <피네간의 경야>(제임스 조이스의 소설)라는 걸작(작가가 결작이라고 말해줘서 이 책이 걸작인줄 알았지만)을 갈가리 찢어 만든 임시 처소에서, 태생부터 불길한 열세 번째로 ’쥐’로 태어나, 열두 개의 젖꼭지를 놓고서 싸움을 벌였다. 불행히 발육이 나쁜 ’퍼민’은 더 힘쎈 배내새끼들 중 하나에 의해 우격다짐으로 밀려나 순전히 남은 찌꺼기에 의존해 살아남았다. 고독하고 배고픈 퍼민은 ’병적인 서적 탐식증’(38)을 보일 만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책을 뜯어먹기 시작하면서 책의 ’맛’을 알게 되었고, 책을 읽는 방법까지 터특하게 되었다. "어떤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서는 인쇄된 부분의 일부를 조금 갉아보기만 하면 되었다"(64).
그러니까 ’퍼민’이 병적인 서적 탐식증을 갖게 된 것은, 엄마의 젖꼭지가 열두 개뿐이라는 ’결핍’과 ’부조리’ 때문이다. 열두 개의 젖꼭지를 가진 열세 마리의 쥐가 ’나눠먹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고, 그 경쟁의 과정에서 소외되는 존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저마다의 ’생존 양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재 사이의 ’단절’이 보인다(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결핍’과 ’부조리’에서 존재의 ’단절’이 시작된다고 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책의 맛을 알게 된 ’퍼민’은 동족을 버리고, 온갖 종류의 책을 탐닉하며 역사와 시대, 공간을 뛰어넘고 국가와 언어를 넘나들며 ’세상’을 탐험한다. 특별히 ’소설’을 사랑하는 퍼민은 작품 속 주인공과 일체가 되어 사랑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고 배웠다. "나는 책들이 나의 꿈속으로 들어오도록 했고 때로는 나 자신이 책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68).
그러나 ’퍼민’은 "지성과 기지와 우아하고 세련된 감정과 증대하는 박학다식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무능한 피조물로 남아 있는"(70) 자신을 깨닫는다. ’퍼민’에게는 목소리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구절들을 낭송하며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내지만,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이것이 다였다. "찍찍 찍찍 찍찍"(71).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는 정말 슬펐다.
’퍼민’은 거울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줄 아는 영민한 쥐이지만,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보고 더 고통스러웠다. ’퍼민’의 자아성찰은 참으로 비참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션트나 피위(형제 쥐)의 유쾌하지 못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지만 그들과 흡사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그 고통의 강도가 나의 엄청난 허영심과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생각 때문에 속만 더 상할 뿐이었다. 그저 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허영심까지 강하다는 것, 그것은 웃음거리를 더해주는 것밖에 되지 못했다"(74).
’퍼민’은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온갖 미인들을 알게 되자 그 현저한 차이를 깨닫고, 무언가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무엇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얼핏 보게 될 때마다 ’괴물’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겁에 질렸기 때문에, 하찮은 정신적 속임수 하나를 개발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건 나야"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저건 그야" 하고 달아나는 식으로"(75-76).
그러나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퍼민’은 결국 책 ’속’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 ’밖’, 어떤 존재와도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한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서점 주인 ’노먼’을 향한 그의 사랑은 배신 당했다. ’노먼’에게 ’퍼민’은 쥐약을 놓아 잡아야 할 한마리의 끔찍한 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통’한다고 생각했던 자신과 닮은 고독한 ’제리’에게서조차 그는 지독한 외로움과 단절을 경험할 뿐이었다. "나는 제리를 사랑했지만 제리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아닌 척하고 싶어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하는 저녁 시간에 그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할 때 그는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205).
’퍼민’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점’과 ’극장’이 재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퍼민’이 탐닉했던 예술과 고전과 환상의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서점’과 ’극장’이 퍼민에게 보여주었던 세상은 ’허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소설 쓰는 쥐 퍼민>,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문학작품이 ’암호’로 읽혔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분명 웃어야 할 곳에서 웃지 못하고, 슬퍼해야 할 곳에서 슬퍼하지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독한 사춘기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존재를 슬퍼하고, 생의 허무함에 절망하고, 열에 들뜬 사랑이 배신을 당하고,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도 누구와도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해 외롭고 고독했던 그 시절. 그런데 중년의 나이에 경험하는 사춘기의 감정이 훨씬 더 끔찍했다! 책의 표지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보고 마치 속세를 떠난 ’도인’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노년기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면 ’눈물’ 없이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쥐 ’퍼민’에 이 도인 같은 작가를 대입하며 읽었다. 작가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며 말이다). 쥐 ’퍼민’처럼 나도 눈물 없이 모든 것에 고별과 작별을 고하고 싶다.
"메마르고 차가운 것이 세상이었고 아름다운 것이 글이었다"(257). 이 한마디가 이 책의 전부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