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 현대지성 클래식 4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우섭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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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죽은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야'(11).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하여, 해제를 맡은 윤우섭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끔찍할 정도로 명확하게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 중 하나다"(195). 지난 월요일, 나의 지인 중 한 명은 암이 온 몸에 얼마나 전이되었나를 알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올랐고, 또 다른 지인은 그날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그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실 삶과 죽음이 한 몸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다시 기억해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생(生)만큼이나, 죽음은 우리 도처에 있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이 보이지 않았을 때는, 매일 목격하게 되는 그 누군가의 죽음이 절대로 나의 오늘을 즐겁게 보내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몸이 늙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어지고, '늙는다'는 것은 곧 '병든다'는 것이며, 하룻밤 잘 자고 나면 개운해지는 그런 날은 더이상 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 누구의 죽음도 전처럼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에 나의 몸과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의식 속에서 멀리 치워 버리고 은폐해버린 죽음에 관한 진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눈앞으로 충돌해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죽음을 보여준다. 몸의 불편함을 느끼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질병과 건강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고, 그래서 아픈 사람, 죽은 사람, 완쾌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 때조차, 죽음은 그에게 온전한 현실이 되지 못했다. "죽음이 꽃 뒤편에서 분명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는데도"(60), 탁자를 옮기는 일로 가족과 말다툼을 벌이며 화가 날 때는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고, 죽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 방을 위해, 그 응접실 장식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기 병이 그때 떨어지면서 입은 타박상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60).

 

병에 걸린 지 석 달 만에 고통이 그를 덮쳐오고, 아편과 모르핀이 주사되기 시작했을 때에야 이반 일리치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비로소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를 덮쳐온 또다른 고통은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기 삶을 되집어본다. 그리고 그가 맞딱뜨리게 된 삶의 진실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향해 성실하게 올라가고 중이라고 믿었건만, 그의 시간은 내리막길을 달려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학창시절, 첫 직장, 사랑의 기억, "결혼…. 그것은 아주 우연히 찾아왔고 이어진 실망 그리고 아내의 입냄새, 그리고 관능, 가식. 그리고 이 쓸모없는 직무, 돈에 대한 집착, 그렇게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그리고 똑같은 삶, 그리고 다음은 죽음. 산 위로 올라간다고 상상했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일정한 속도로 내리막길을 간 거였다. 그랬다. 다들 내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고, 죽음의 시간이다!"(80)>

 

 

"그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쳤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부터 죽음의 공포가 이반 일리치를 가득 채운다. 올바르게 살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서, 그것이 주된 고통이 된다. 자신은 "살아온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음을 깨닫는다"(198).

 

거짓과 위선이 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톨스토이는 자기 삶을 고칠 방법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다. 나 역시 기독교 신앙에 눈 뜨고 나서야,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는 한계가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가 삶을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를 다시 질문해본다. 이 땅에서의 나의 끝 날, 지금 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 자신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그 옳음의 절대 기준을 찾고 싶다면, 톨스토이를 인도했던 <성경>을 일독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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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인생 그림 - 아트메신저 이소영이 전하는 명화의 세계
이소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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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하루가 다소 비극처럼 느껴지더라도 멀리서 내 인생 그래프를 내려다보면 희극의 한 요소라는 생각을 해야 다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19).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를 생각할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들이 '선악과'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에덴동산에 넘쳐나는 다른 과일 나무에 시선을 돌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시선을 빼앗기니, 마음을 빼앗겼고, 결국 문제 하나에 마음을 빼앗긴 탓에 그 많은 과일 나무를 거져 얻고서도 그들의 마음은 감사가 아니라 불평으로 가득 차버렸습니다. 기쁨의 동산이라는 에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문제 하나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길 때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봅니다. 하루 종일 지독히 싫은 그 한 사람을 쫓아다니느라 나의 눈은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보지 못하고, 불만스러운 문제 하나에 집중하느라 나의 마음은 더 많은 감사거리를 보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시선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가까운 곳에 있는 그림을 바라봅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옹색한 생각이 나를 자주 가로막는 것 같으면 의도적으로 나의 시선을 그림에게 주어, 새롭게 눈의 '길'을 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을 보았을 때, 이 책이 바로 우리의 눈에 새로운 길을 내주는 책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은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아트 컬렉터로 출연하신 이소영 작가님의 책입니다.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은 미술계에서 활동하며 특별히 작가님의 눈길이 자주 갔던 '인생 그림'을 모아, 언어의 옷을 입힌 책입니다.

일단 작가님이 이야기를 참 잘하는 분이라 언어의 옷을 입은 그림이 참 재미있게 읽힙니다. 예를 들면, 클로드 모네의 <생 라자르 기차역>이라는 그림을 앞에 두고, 작가님은 여행과 사랑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둘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본다. 시작은 호기심이고, 출발은 설렘이고, 과정은 에너지 낭비와 에너지 충전이며, 끝은 이별과 성숙이다. 내가 사랑을 왜 또 시작했을까 하면서도 또 사랑을 하고, 그냥 집에 누워 있을 걸 그랬나 하면서 또 나는 여행을 했다"(201). 이 책은 그림의 이야기이자, 화가의 이야기이고, 화가의 이야기이자 작가님의 이야기이고, 작가님의 이야기이자 인생 이야기인 것입니다.

"화가가 답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그림은 우리를 두고 먼저 떠난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갈 것 같지 않냐며 질문한다"(577).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이라는 책 제목처럼, '아트메신저' 이소영님의 안내에 따라 하루 한 점씩 그림을 감상할 때마다, 화가들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열어젖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야에 한계가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네의 그림을 보면 겨울 한 철에도 수천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211)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해봅니다. "모네는 어떻게 그 수천 개의 시간을 볼 수 있었을까?" 화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화가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다 보면 우리 안에도 새로운 질문이 생겨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젖어들듯이 어느 새 우리는 다양한 각도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한 장, 인생 그림> 덕분에 명화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꼭 여러 번 봐달라고 말하는데,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그림이 마음 안에 아주 깊고 진한 잔상을 남깁니다. 책에서 눈이 떠나도 그 그림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지요. 이 책을 정말로 여러 번 자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어가며 생기는 새로운 버릇이 하나 있다면, "내 주변의 일상에서 화가들의 명화 한 장면과 비슷한 풍경을 찾아 보는 것"(209)입니다.

그림에 관한 책을 누구에게 추천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게 될 것 같습니다. 특별히 친한 친구들과 '함께' 읽고 이 책에 나오는 그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강한 열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림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면을 치유할 기회를 더 많이 얻는 것과 같다"(10)는 작가님의 말이 실제로 경험되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을 보는 좀 더 아름다운 시선, 좀 더 넓은 시선, 좀 더 지혜로운 시선을 얻기 위한다면, 이 책을 가까이 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기대보다 훨씬 재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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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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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의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농담을 허용하면서도 학문에서는 농담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것, 게다가 실없게 들려도 사실은 진지한 성찰로 이끄는 농담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부당합니다"(14).

학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진지함'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학문에 정진하며 실없는 농담은 질색하는 타입이라면, 에라스무스의 우려대로 <우신예찬>은 "글이 가볍고 장난스럽다며 못마땅해 할 사람들"도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농담'이 거슬린다면, 그것은 우신의 자화자찬이 장난스러워서가 아니라, 그 농담이 "뼈를 때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에라스무스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들을 꾸짖기 위해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어리석음의 신'을 불러냅니다. 종교 권력이 정점이던 시절, (철학자, 법률가, 학자, 변증가, 성직자, 군주 등) 사뭇 진지하고 경건한 얼굴로 '현자' 행세를 하는 자들의 잘난 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우신'을 통해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 자신을 알리는 나팔수가 되어 큰 소리로 '자화자찬하는' 것은 우신인 내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일이겠습니까? 누가 나보다 더 나 자신에 대해 잘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자는 없습니다"(23).

먼저, '우신'은 자신이 왜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하며, 자기소개부터 합니다. 우신은 부와 재물의 신(아버지)이 가장 매력적이고 쾌활한 요정인 '생기발랄'을 통해 낳은 딸로서, 씨를 뿌리지 않고 밭을 갈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저절로 자라나는 행복의 섬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우신에게는 두 양육자가 있는데, 아름답고 매력적인 두 요정, '만취'와 '무지'가 우신을 키웠답니다. 이밖에도 우신은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다니는데,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팔라우티아(자아도취), 콜라키아(아부), 레테(망각), 미소포니아(태만), 헤도네(쾌락), 아노이아(경솔), 트리페(방탕), 시종들 사이에 남신이 두 명, 코모스(광란), 네그레토스 휘프노스(깊은 잠) 등. 이들은 우신의 충직한 가솔들이며, 우신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온 세상을 지배하며, 위대한 통치자들도 우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이 시종들의 이름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죽을 죄'의 죄목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우신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를 아주 좋아하는 신'으로서, '자화자찬'이야말로 우신의 가장 큰 장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신이 자기를 찬양하는 내용이 바로 <우신예찬>입니다. 이것은 칭송받기를 즐기고, 내면은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자화자찬을 하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라 여기는 '가짜 현자들'의 속살을 폭로하는 방식인 셈입니다.

어찌 보면, 우신의 자화자찬은 광기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우신은 자신이야말로 생명 탄생의 주역이라고 주장하는데 얼마나 그럴 듯하게 우기는지, 박수가 터져나올 뻔했습니다. 우신은 주장하기를, 생명은 무릇 결혼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결혼은 우신의 시녀인 '경솔'을 통해 성사되며, 우신의 시녀인 '망각'이 곁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여자들이 출산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 콧대 높은 철학자들, 그들의 자리를 계승한 수도사들, 자주색 옷을 걸친 군주들, 경건한 사제들과 그들보다 세 배는 더 거룩한 교황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결국 우신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다면 인간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우신의 '자화자찬'이 참으로 대담하여 광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진실 자체는 버겁고 힘들지 몰라도 거기에 재미를 더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좀 더 쉽게 파고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252).

에라스무스는 우신의 자화자찬에 서려 있는 광기를 통해, 삶의 도처에 산재한 어리석은 견해들, 그 속에서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들, 특히 기독교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열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광기에 가까운지를 비춰볼 수 있게 해줍니다. 사회마다 우둔하고 어리석다며 쉽게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둑질하는 자, 술주정뱅이, 도박꾼, 간음하는 자 같은 부류겠지요. 이에 반해, 소위 성실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부류들은 이들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들을 손가락질할 마땅한 자격이라도 갖추고 있는 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신예찬>은 우리 안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우월감, 위선, 거짓, 허풍, 방종, 아부, 사치, 뻔뻔함 등을 마주하게 해줍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적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자들이 도덕주의자들, 성직자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신예찬>을 읽으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죄로 찌든 세상을 청소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땅이라는 성전을 청소하셨고, 세리와 창녀 같은 부류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과 대립하셨으며, 결국 불경하고 악한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법에 의해 불법적으로 처형당하신 아이러니가 생각났습니다. 스스로를 지혜롭고 선하고 경건하게 여기며 백성을 지도하는 이들에게,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어리석음을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것을 모른다고 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이 남들 눈에는 다 보이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우신예찬>은 바로 그와 같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책같습니다. 조롱을 위한 조롱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버겁고 힘든 진실이지만 조금이라도 유쾌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하려는 깊은 지혜같습니다. <우신예찬>, 해학과 풍자가 가득하나 절대로 가볍게 웃어넘길 수 없는 '농담'입니다. 지혜는 지혜를 더 날카롭게 한다지요. 그러니 (진짜) 지혜있는 자들이 읽는다면, 지혜가 더할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인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지혜)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신앙인들의 열정이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게 할 수 있는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종교적인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것은 어리석은 광기에 가까워지고, 그런 광기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희생도 하나님의 일에는 더 방해가 된다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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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중단편 수상작 모음집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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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타아(他我)에 맡겨버린 자아의 절망입니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병사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죠"(새하곡, 33).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문학을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를 처음으로 낯설게 인식하게 된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내 삶의 터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고, 기울어져 있고, 뒤틀려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때에야 세상에 가득한 타인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던 것같습니다. 세상의 불합리에 상처입으며 부패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울분과 저항감이 쌓였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세상은 집단의 힘으로 내게 굴종을 강조하는 듯했고, <새하곡>의 '이 중위'와 같이 이 시대에는 이미 순수한 개인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는 절망도 느꼈습니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215-215).

그런데 삶에 비틀거리며 피를 흘릴수록, 내 의식을 가득 채웠던 것은 낡고 부패한 세상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혁명의식이 아니라, 자발적인 회개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부서지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부서지고 거듭나야 할 대상이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은 또다른 울분과 절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시인과 도둑>에 등장하는 시인처럼, 불같은 젊은 날을 건너가는 요즘은 마치 "억눌리고 빼앗기고 괴로움 속에 던져진 시간을 때워야 하는 목숨"으로 전락하고 만 기분도 들지요.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무릇 혁명하려는 자는 실질 없는 혁명의 노래가 거리에서 너무 크게 불려지는 걸 경계하여라. 온 숲이 다 일어나야 날이 새는 것이지, 일찍 깬 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해서 날이 새는 것은 아니다"(시인과 도둑, 279-280).

이번에 <이문열 중단편 수상작 모음집>으로 '이문열'을 다시 읽으며, 내가 그를 통해 인식했던 세계와 자화상을 다시 보게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작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도 본 듯합니다. 그는 민초들이 믿고 의지할 꿈을 생산하고, 참고 기다릴 앞날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장차는 보다 나은 세상을 생산할 꿈도 꾸었지만, 그 꿈을 하염없이 노래하는 자신을, 노래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괴로워하고 부끄러했던가 봅니다.

나는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 안에서 늙어갈 만한 세계와, 그 믿음 속에서 죽어갈 수 있는 인식을 발견했다고 믿지만, 자발적인 회개를 통해 계속해서 부서지고 거듭나고 헤매고 흔들리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포자기적인 흉폭성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내달리지 않을 수 있었고, 흔들리면서도 계속 걸을 수 있었고, 헤매이면서도 계속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작가와 동시대를 산 덕분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작가 이문열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나의 부끄러움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병을 앓았던 뜨거운 여름 밤이 지나고, 스산하게 나이가 들고 보니, "오히려 일찍 깬 그들의 소란은 숲의 새벽잠을 더 길고 깊게 할 수도 있다. 선잠에서 깨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면 정작 날이 새도록 깨나지 못하는 법"(시인과 도둑, 280)이라 했던 그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제야 선명히 깨달아집니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다시 자발적인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려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얼마나 더 부서지고 거듭나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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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 CHRISTIAN FOUNDATION 3
피터 워커 지음, 박세혁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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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주가 지나서 예루살렘에 있을 때 예수는 바로 이 세 제자를 데리고 감람산 기슭의 또 다른 언덕 - 겟세마네 - 으로 가실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심히 고통스러워 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평생 이 두 강력한 그림을 묶어내는 삶, 겟세마네의 고통과 변화산의 영광을 결합하는 삶을 살 것이다(231).

성경은 지명과 인명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실제 역사를 반영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1차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장벽 외에도, 지리적인 장벽, 문화적인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바로 그 지리적인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장소'를 중심으로 예수의 발자취를 추적하는데, 피터 워커는 특별히 <누가복음>을 그 안내자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책으로 떠나는 성지순례라고 할 수 있겠는데, 특별히 그때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성경적으로 풀어줍니다. 즉, 예수님 생애에 있었던 일은 그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일도 절대 우연이 아니며, 특별히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성격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베들레헴'이라는 작고 오래된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피터 워커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해주는 예수님의 발자취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며, 신선했던 새로운 해석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해산한 장소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마굿간이 아니라, '동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처음에는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1세기에는 주택을 자연 발생한 동굴로부터 외부를 향해 짓는 경우가 많았고, 날씨가 추울 때는 귀중한 가축을 이곳에 두기도 했다. 이곳이 - 바람이 세차게 부는 들판에 있는 외양간이 아니라 - 바로 마리아가 자신의 첫아기를 해산한 안락한 공간이었을 것이다"(48).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고, 창조주가 창조된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공간"으로 작고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작고 보잘것없는 그 장소가 "영원한 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49).

이처럼 이 책의 안내를 따라 예수의 발자취를 재구성해보면, 예수는 사람들의 시야 밖에 있는 조용한 마을, 사람이 그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우습겨 여겼던, 숨겨진 장소,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새로운 출발의 공간으로 적합하다 할 수 있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사역을 벼리기 위해 유대 광야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성취하심으로, 이제 광야는 죽음과 실패의 공간이 아니라, 생명의 공간이자 소망의 모판이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갈릴리에서 공적 사역을 하심으로 '이방의 갈릴리'로부터 '세상을 위한 빛'이 나오게 하셨으며, 사마리아는 예수가 오셔서 사람들 사이의 오랜 장벽이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었고, 로마 황제가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고 그를 신의 아들로 칭송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제 곧장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는,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으로 진군하였듯이, 여리고를 통과하시며 삭개오를 만나십니다(이 만남은 모든 주민 중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았던 수 세기 전 라합과의 만남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공적 사역 위로 폭풍우 구룸이 모여들기 시작할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예수에게 꼭 필요했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던 '감람산'에서 마지막으로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을 보낸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감람산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마지막 날들을 보내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는 민족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더 큰 이'이심을 계시하시며, 성전의 유효 기간이 끝났음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는 마지막 일주일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며 의도적으로 덫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고, 반역자로 몰려 '해골이라 하는 곳', 곧 골고다에서 처형 당하셨고, 무덤에 들어가십니다.

그러나 예수의 여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으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부서진 소망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주제가 있다. 예수가 삶의 길에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걸으신다는 모티브가 있다"(468).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특별히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이 모든 장소에서 일어난 일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 이야기가 훨씬 더 긴 역사의 일부이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장소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충성을 선언함으로써 이 초라한 시작을 받아들였다"(81). 무엇보다도 가슴이 뜨끈해졌던 것은,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무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때 그 장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지금도 그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무리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책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중에, 최고의 성지순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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