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중단편 수상작 모음집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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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타아(他我)에 맡겨버린 자아의 절망입니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병사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철저한 무(無)죠"(새하곡, 33).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문학을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를 처음으로 낯설게 인식하게 된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내 삶의 터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고, 기울어져 있고, 뒤틀려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때에야 세상에 가득한 타인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던 것같습니다. 세상의 불합리에 상처입으며 부패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울분과 저항감이 쌓였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세상은 집단의 힘으로 내게 굴종을 강조하는 듯했고, <새하곡>의 '이 중위'와 같이 이 시대에는 이미 순수한 개인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는 절망도 느꼈습니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215-215).

그런데 삶에 비틀거리며 피를 흘릴수록, 내 의식을 가득 채웠던 것은 낡고 부패한 세상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혁명의식이 아니라, 자발적인 회개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부서지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부서지고 거듭나야 할 대상이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은 또다른 울분과 절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시인과 도둑>에 등장하는 시인처럼, 불같은 젊은 날을 건너가는 요즘은 마치 "억눌리고 빼앗기고 괴로움 속에 던져진 시간을 때워야 하는 목숨"으로 전락하고 만 기분도 들지요.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무릇 혁명하려는 자는 실질 없는 혁명의 노래가 거리에서 너무 크게 불려지는 걸 경계하여라. 온 숲이 다 일어나야 날이 새는 것이지, 일찍 깬 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해서 날이 새는 것은 아니다"(시인과 도둑, 279-280).

이번에 <이문열 중단편 수상작 모음집>으로 '이문열'을 다시 읽으며, 내가 그를 통해 인식했던 세계와 자화상을 다시 보게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작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도 본 듯합니다. 그는 민초들이 믿고 의지할 꿈을 생산하고, 참고 기다릴 앞날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장차는 보다 나은 세상을 생산할 꿈도 꾸었지만, 그 꿈을 하염없이 노래하는 자신을, 노래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괴로워하고 부끄러했던가 봅니다.

나는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 안에서 늙어갈 만한 세계와, 그 믿음 속에서 죽어갈 수 있는 인식을 발견했다고 믿지만, 자발적인 회개를 통해 계속해서 부서지고 거듭나고 헤매고 흔들리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포자기적인 흉폭성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내달리지 않을 수 있었고, 흔들리면서도 계속 걸을 수 있었고, 헤매이면서도 계속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작가와 동시대를 산 덕분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작가 이문열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나의 부끄러움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병을 앓았던 뜨거운 여름 밤이 지나고, 스산하게 나이가 들고 보니, "오히려 일찍 깬 그들의 소란은 숲의 새벽잠을 더 길고 깊게 할 수도 있다. 선잠에서 깨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면 정작 날이 새도록 깨나지 못하는 법"(시인과 도둑, 280)이라 했던 그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제야 선명히 깨달아집니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다시 자발적인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려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얼마나 더 부서지고 거듭나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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