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꿈을 그리다 - 반 고흐의 예술과 영성
라영환 지음 / 피톤치드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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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늘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성경과 세상, 성직자와 화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지만 반 고흐는 이 둘을 하나로 연결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다"(77).

예술은 비극 속에서 피어나는 꽃일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린 예술가는 '루벤스' 한 사람 정도입니다.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은 작품에 더욱 강렬한 지문을 남기기 마련이라, 작품만큼이나 우리는 예술가들의 생을 이야기하기 좋아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예술가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스스로 귀를 자른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천재, 비극적인 죽음과 같은 것"(17)이니까요. 그가 남긴 작품보다 "광기 어린 천재로서의 반 고흐의 신화"에 더 매혹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책은 우리가 간직한 바로 그 반 고흐의 신화에 반기를 드는 책입니다. 화가인 그가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과 우리가 보는 그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보고 싶은 반 고흐와 반 고흐 자신이 보여 주고 싶었던 반 고흐 사이의 괴리를 좁히려는 시도"(17)라고 밝힙니다.

반 고흐가 되어 반 고흐를 보기 원하는 이 책은, 먼저 '반 고흐 해석의 난점들'을 다시 탐색합니다.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반 고흐는 과연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흥분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알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고갱의 증언 때문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저자의 추론을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반 고흐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작품에 대해 얼마나 큰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모든 사람들이 빈센트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가 느꼈을 고독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어. 빈센트가 내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네게 알리고 싶어. … 그 겨울 이후 나는 혼자 있어도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빈센트가 말한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는 삶',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아"(95).

형 빈센트 반 고흐가 죽고, 6개월 뒤 그의 동생 테오도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그 속에서 태오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93-95). 그렇게 편지를 읽다가 진정한 반 고흐를 발견한 요한나 덕분에 반 고흐의 작품과 삶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고요. 요한나가 발견한 '진정한 반 고흐의 삶'은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반 고흐는 단지 안락한 삶보다 자신의 열정을 불사를 일, 삶의 의미를 찾기 원했고,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안락함보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을 택했던 반 고흐는 "탄광촌에서 대접받는 목회자로 살기보다는 광부들과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147)했으나, 그가 속한 복음교회는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성직자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맙니다.

성직자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광부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처럼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성직자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된 후, 고흐가 발견하게 된 새로운 소명은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가난한 자를 섬기고자 했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부러진 나무조차 아름다울 수 있음"(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여주었던 고흐에게, 그림은 소외된 자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복음이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의무를 일깨우는 일종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세상이 읽기 원했던 고흐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깊고 참된 사랑이 있어야 해.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며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힘이자 신비한 힘으로 감옥을 열게 되는 거지.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아. 그러나 사랑이 부활하는 곳에 인생도 부활하지"(182).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한 사람, 불쾌한 사람,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 그래 좋아.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것이 내 바람이야"(180).

<반 고흐, 꿈을 그리다>는 고흐 자신의 소명의 빛 아래서 그의 삶과 예술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성직자를 꿈꾸었을 때도,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했을 때도, 고흐가 꿈꾸었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는 것!

미치광이 천재 예술가가 아니라, 소명의 빛을 따라 울며 씨를 뿌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고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따라간 진정한 예수의 제자였다는 것이 제 삶에 작은 진동을 일으킵니다. 이제 제게 고흐는 "병들고 임신한 데다 배고픈 여자"가 한 겨울에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그 여인을 외면할 수 없어 기꺼이 자신의 가족(아내)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크리스천, 이름 없는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삶을 너무도 사랑하느 화가로 기억될 것입니다. 교회가 그의 순수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 덕분에 한 사람의 성직자를 잃었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화가를 얻었다는 것이, 제게는 더 큰 비극이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신비요, 인생의 아이러니로 다가옵니다. 

반 고흐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모습말고, 반 고흐가 보여주기를 원했던 모습으로 반 고흐를 다시 만나보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들이 고흐에게 등을 돌렸을 때보다,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지금을 고흐는 더 슬프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항상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이웃이 되어 그를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고흐를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이 순간, 비로소 그를 위로할 수 있었고, 다시 그에게 위로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 고흐, 꿈을 그리다>, 누구보다 먼저 교회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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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백신 1 - 신천지의 실상을 알려주는 바른 계시록 신천지 백신 1
양형주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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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에 빠진 이들이 약 24만이라고 한다. 이단 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신천지에 빠졌다 나온 이들도 24만 정도 된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이단 단체를 나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다시 기성교회로 돌아갔다가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13-14).

신천지가 코로나 19 집단 감염 진원지가 되면서 전국에 '신천지'라는 이름이 알려지며 온 국민이 그들의 숨겨진 정체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동안 신천지의 은밀한 활동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많았는데, 정통 교회들이 적절한 대책을 세워오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단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회 안에 잠입한 신천지 교인을 찾아내거나, 교회 입구에"신천지 OUT"이라는 스티커를 붙여놓으며,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을 뿐, 사실은 속수무책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천지'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정통 교회가 아니라 '이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왜 그들을 경계해야 하고, 그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알려줄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교회는 많지 않다고 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단과 관련해서는 "위조 지폐를 가려내고 싶으면 위조 지폐를 공부하지 말고 진짜 지폐를 공부하라"는 주의였습니다. 진짜를 알면 가짜는 저절로 분별된다는 입장에서, 이단 교리를 공부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이번 신천지 사태를 지켜보며, 교회가 구체적인 준비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번 사태의 영향뿐 아니라, 그들이 "영상불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교주가 죽게 되면 이들의 이탈에 가속도가 붙을 것"(14)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 목회자로부터, 신천지에서 이탈한 교인이 찾아왔는데, 이또한 신분을 위장한 잠입인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어디서부터 대화를 시작하여 양육해야 할지 무척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그들을 색출하고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소극적인 대처에서 벗어나, 그들을 다시 복음으로 세워가는 적극적인 대처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두란노에서 <신천지 백신>을 내놓았습니다.

신천지에서 가장 자신있게 자신들의 단체를 내세우는 말은 "요한계시록의 실상이 자신들의 단체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성교회에는 없는 '실상'이 신천지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미혹되면 "요한계시록 해석만큼은 신천지가 진짜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요한계시록의 실상'이란 무엇일까요? <신천지 백신>은 "신천지 교주(이만희)가 주장하는 요한계시록 전 장의 해설의 핵심을 요약"하고, "이들의 해석과 실상계시가 과연 이치에 타당한가를 점검"한 후, "이에 대한 바른 해석과 대안을 제시"합니다(14).

<신천지 백신> 1권은 신천지가 요한계시록 1장부터 11장까지를 어떻게 해석하여 신천지의 교리가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는데, 솔직히 신천지의 핵심 교리가 무엇인지 알고나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해석에 자부심이 있다고 하는데, 지난 2천 년간 봉함되어 있던 요한계시록의 비밀을 자신들의 단체만 소유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이 자신들의 단체를 통해 성취되었는데, 그 성취의 핵심은 "자기 교주가 세운 단체가 기존의 배도하고 타락한 전임자의 단체를 대신해 새롭게 성취한 마지막 시대의 증거장막이자 새 하늘과 새 땅"(26)이며, 교주는 "성령을 받아 영과 육이 하나된 존재"로 "그렇게 되면 영생불사한다"(28)는 이런 주장들을 그토록 신봉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오류들, 예를 들어, 신천지에서 발간하는 요한계시록의 해설서들을 비교해오면 새롭게 발간될 때마다 자의적으로 수정되는 부분이 있다든지, 요한계시록을 빗대에 만든 그들의 조직, 즉 7교육장, 12지파, 24장로, 4그룹 등과 같은 조직이 얼마나 경박한 논리적인 비약인지 알 수 있는 오류들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신천지의 24장로들은 요한계시록에 하늘 보좌를 구성하는 24영이 이 땅의 24장로들의 육체에 강림해 일종의 신일합일을 이루어, 신천지가 14만 4천 명의 지파를 완성하기까지 변함없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151-152). 그런데 "1997년 구성되었던 24장로가 2년 후인 1999년 19장로로 줄어들었고, 남은 19명 중에서도 무려 5명이나 바뀌었"으며, "2000년에는 24장로 중 휴무자가 10명으로 늘"어났고, "2009년에는 거의 상당수가 교체되었"으며, "심지어 24장로 중 하나는 적그리스도가 되어 신천지 생명록에서 지워져 사망록에 오르기까지 했다"(152)고 합니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될 보리 3명 중 하나인 윤모 교육장은 2012년에 병들어 죽었"습니다. "지파가 완성될 때까지 절대 죽으면 안 될 사람들인데 그중 하나가 죽은 것"(111)입니다. 이쯤 되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헛점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인데, 맹신이란 이처럼 지독한가 봅니다.

 

 

 

                  

 

"신천지에 가입했다 갈등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생명책 교리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신천지에서 지워지면 하늘에서도 지워져 구원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한 번 지워지면 다시는 기록될 수 없다고 믿기에, 신천지 탈퇴는 곧 구원의 상실이자 지옥행으로 여겨진다"(113).

이렇게 헛점이 많은 주장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미혹될 수 있었을까요?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신천지 백신>을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신천지에서 나온 이들은 생명책에서 지워져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두려움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탐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의 오매불망 소원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천지는 제사장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영육합일을 하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온 세상에 있는 부자와 권세자들이 돈 보따리는 싸 들고 와 제사장이 갖고 있는 비밀한 말씀을 배우게 되고, 이때가 되면 자신이 신천지에 있다고 박해하던 가족들도 제사장이 된 자신을 보고 돌아와 회개하게 된다"(37)는 게 그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요한계시록만을 경전으로 삼지 않고,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이라면 그들의 이러한 두려움과 탐욕이 얼마나 <성경>에서 먼 것인가를 알 수 있을 텐데, 두려움과 탐욕에 미혹된 마음은 이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신천지 백신>은 "신천지의 해석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이들", "신천지에 빠진 가족이나 친구와 씨름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기성교회 성도들의 신앙 예방"을 위한 책입니다. <신천지 백신>은 신천지 교리의 오류를 밝히는데서 그치지 않고, 신천지가 왜곡하고 있는 주장들의 바른 해석은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어두움은 빛을 임할 때, 물러갑니다. 지금은 진리로 승부해야 하는 계절인 줄 믿습니다. 미혹된 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말씀(진리)을 맡은 자들이 게을렀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시고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온 우주는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이니, 믿음의 선한 싸움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인 줄 믿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 앞으로 나아가고, 진리로 서로를 세워가는 선한 싸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천지 백신>을 계기로 신천지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개인과 가정과 교회들이 다시 진리 안에서 회복되고, 말씀 안에서 든든하게 세워져가 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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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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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한정된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무런 방해나 한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옥중에 몇십 년을 갇혀 있어도 기어이 시와 산문을, 책을 쓰는 이들이 있듯이.

조지 오웰이 말했듯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셈이다(208).

하루 시간을 내어 경북 지역을 다녀오고 나서 스스로 2주간 자가격리를 하면서도 괜찮았습니다. 아니, 즐거웠습니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라는 다정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이 제게 위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본 영화는 웬만하면 두 번 보는 일이 없고, 한 번 읽은 책도 (시험이 아니면) 두 번 읽는 일이 별로 없는 저인데. 이 책은 어쩐지 몇 번이고 다시 읽을 것만 같은 행복한 예감이 듭니다.

단순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일상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아껴 읽고 싶었는데, 제 눈이, 제 마음이, 자꾸만 이 책을 탐하는 바람에, 명절에 음식을 먹어치우듯, 다 읽어버렸습니다. 중간 중간 책 속에 등장하는 밴드 메탈리카의 <No Leaf Clover>나 독일 밴드 풀스 가든의 <Emily>, <It's De-Lovely>, <Deep Purple> 등과 같은 음악을 찾아 듣느라 몇 번쯤 멈춘 것 말고는, 읽는 것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만 등나무 꽃말을 가장 좋아할 뿐이지. '어서 오세요, 아름다운 나그네여.'"(110)라는 문장은 외우고 싶어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사과나무 밑에 앉지 말아요"(112)라는 문장은 너무 애절해서, "오래전 앵두나무집 룸메이트 Y의 꽃말은 언제까지나 봄비이다"(139)라는 말은 애틋해서, "그 후로는 세상 살면서 다시 그렇게 도망친 적은 없었다"(148)라는 말은 가슴을 울려서 밑줄을 긋고, 긋고, 긋고, 그으며, 가만히 소리내어 여러 번 읽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굿나잇책방에만 있는 <사물의 꽃말 사전>을 흉내내어, 혼자 정이 들었던 물건들, 사람들, 기억들에 꽃말을 붙여주는 놀이를 해보기도 합니다.

미처 쓸쓸할 새도 없이 살아낸 비어 있는 날짜들을 기억해주기로 한다.

기록하지 않았던 이름표 없는 보통의 날들.

여리고 풋풋했던, 인생이 평탄하고 버드나무 말고는 아무도 눈물짓지 않았던,

베개 옆에 꿈이 있어 고마웠던 그날들을(23).

예전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세상엔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나도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도우 작가님과는 이 번이 세 번째 만남인데,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생각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이구나!' 작가의 기억을 타고 펼쳐지는 보통 날들의 보통 이야기들이 이처럼 어여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이 예뻐야 말도 예뻐지고, 삶도 예뻐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다정한 책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는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께도, 선배님께도, 친구들에게도, 후배들에게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영화에도, 음악에도 취향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 저에게 어떤 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이 책을 보여주며 그냥 이런 책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야기와 작가를 분리하지 못하여 작가님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자 종종 있는데, 이도우 작가님에게 매번 반하고 맙니다. 또 한번 반했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가격리 중인 분들에게 보내는 응원 박스 안에 음식 외에 이런 책도 한 권쯤 넣어 보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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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 - 오늘날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는 법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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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니엘'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사자 굴에서 살아난 다니엘의 이야기는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이야기만큼이나 유명하며, 자녀를 '다니엘'이라는 이름 한 부모님이 많으며, '다니엘 기도회'를 작정해보지 않은 교회가 드물 것입니다. 그만큼 시대를 초월하여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다니엘>을 제대로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진과 기근과 메뚜기 떼, 그리고 전염병으로 온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여기에 종교통합과 배교 문제까지 더해져 강도 높게 '종말'을 외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종말의 '때'에 나침반과 같은 성경책을 찾아 읽고자 한다면 <다니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다니엘>을 읽어온 사람들은 다니엘의 환상과 "종말의 시간표 사이의 연관성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해내는 것에 과도하게 집착"(392)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다니엘서 강해>를 내놓으며, 이렇게 다니엘서를 읽는 것은 결국 혼란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보다는 <다니엘>의 주요 주제, 핵심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당시 포로민의 신분으로 낯선 이방 땅에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질문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 마주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제 미래를 위한 소망이 과연 존재하는가?" 전 지구적인 대재앙이 우리의 일상을 덮치고, 역사는 누가 권력을 잡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가 가진 질문도 이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여전히 통제하고 계시는가?", "대재앙이 덮쳤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적이신가?"

하나님은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다니엘서 강해>에서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다니엘서 전체를 이루는 주제,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왕국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상의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면서 금으로 된 머리를 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바위, 즉 궁극적으로 모든 지상의 왕국을 대체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103).

"하나님이 정해두신 궁극적인 종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마지막 때들'이 존재"(311)할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짜 중요한 질문은 그 때가 언제인가가 아니라, 준비 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다니엘>서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권을 믿으라는 부르심이었다"(357).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 하나가 중요합니다. 이 하나의 진리 안에 다음과 같은 약속들이 들어 있으니까요.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은 멸망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박해와 고통은 종식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 위에 펼쳐질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다니엘서 강해>에서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주목하는 사실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훈련받은 일을 계속했다. 그들은 책상에 붙어 있었다"(103). 그들은 환상에 매달려 있지도 않고, 예언 사역을 하겠다고 분주하지도 않았으며, 천둥 같은 설교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신 세상 안에서 계속해서 성실하고 탁월하게 살아갔음을 밝히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제국 안에서 그 왕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실천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이 맡은 직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구하며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도 전념했음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시대의 사회적, 정체적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었으며, 그 영역에서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다니엘은 현재의 영적 차원과 미래의 보증된 결과에 대한 강력한 예언자적 통찰을 갖춘 사람이었다"(328).

우리는 어떤 이야기 안에 살아가고 있는가?

<다니엘서 강해>를 읽으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확고하게 붙들어야 할 진리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이며, 우리가 어떤 이야기 안에 살아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때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고 그 어느 때보다 '다니엘의 영성', '다니엘의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과 자신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통찰을 구하며 기도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세상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는 수단이었다. … 그의 창문이 예루살렘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은 그의 기도를 내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하기 위해서였다"(368).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는 목회자들이 설교 자료로 사용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지금 시대에 꼭 들려져야 할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직장생활과 신앙생활 사이의 괴리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생활과 특별히 직장생활과 어떻게 통합되어야 하는지를 다니엘을 통해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붙잡아야 할 말씀이 있고, 따라야 할 모범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니엘서>와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는 "이 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해두신 말씀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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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스캇 솔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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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뛰어넘어 일관되고도 아름답고도 참된 방식으로 믿음을 표현하고 싶은가?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믿음을 지키는 것과 문화에 참여하는 것 사이의 긴장을 잘 풀어내고 싶은가?

분열시키는 대화에서 떠나 예수님과 이웃을 향해 다가갈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은 크리스천이 가야 할 여행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여행이다.

이것은 선 밖으로 나가는 여행이다(27).

 

저자는 "편 나누기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껴" 이 책을 썼다고 밝힙니다(15). 이것은 비단 저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현대인들이 알게 모르게 '편 나누기'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편 나누기를 그만 두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이러니 하게도 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연합과 화해를 이루어야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훨씬 더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C. S. 루이스가 "기독교는 싸우는 종교"(269)라고 말했듯이, 크리스천의 싸움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가장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들, 갈등의 '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선을 만들고 앞장서서 선을 긋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이미 지배적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시대의 크리스천이 어떤 영역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크리스천들이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서로가 서로를 물어 뜯으며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기도 합니다. 교회 내 여성의 리더 역할이나, 가정 안의 여성의 리더 역할과 관련하여 평등주의와 상호보완주의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입니다.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에수>라는 이 책의 제목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듯이, 예수님은 끼리끼를 모여 서로를 증오하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시고, 서로를 거부하는 '선' 밖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오셨음을 깊이 (정말로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할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행진을 하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진짜 '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가 누구인지 자주 잊는다는 데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반대한 사람들은 독실한 '교인들'이었다"(168)는 한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요. 저자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아무리 사랑이 기반되어도 반대는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화합과 화해를 위해 내가 죽어지는 사랑을 나타내도 이 싸움에는 반대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묘사해줍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노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분노했던 사람들과 같은 부류여야 한다. 나병환자와 도둑, 주정뱅이, 식탐이 많은 자, 성적으로 문란한 자, 죄인,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반대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끌렸고, 그분을 통해 공동체에도 끌렸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그분께 있음을 보았다"(167).

 


 

 

 

그런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 속 크리스천들의 위선은

때로 내게 그 무엇보다도 큰 용기를 준다(213).

저자는 장로교 목사로 수년간 목회하고서도 갑자기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관해 '심각한'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는 프란시스 쉐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기독교 신앙에 관해 '심각한' 의심을 품은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현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현실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297-298). 서로를 차별하고, 무시하고,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분노가 들끓는 세상의 신음소리가 곳곳에 세워진 십자가 불빛을 무색하게 합니다.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는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진실한 위선자'라는 크리스천의 역설이 존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연합과 화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였습니다. 전에는 이런 책을 읽으면, 그렇지 맞는 말이지, 이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할까, 하는 (비판적) 수준에서 그쳤다면, 이제는 내가 문제였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나오니 그 절망에서 오히려 변화의 기운을 느낀다고 하면 이것 또한 새로운 교만일까요?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를 읽으며, 스칼 솔즈라는 목사님이 참 사려 깊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자를 닮아 참 사려 깊은 책입니다.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논쟁적이 아니라, (물론 예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환대함으로 연합과 화평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쓰소서"라는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를 많은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되고 있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가?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가져오고 있는가?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려고 내가 죽어지고 있는가?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는 예수의 사람인가?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삶을 구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어지럽고 혼란하며, 보수와 진보가 격돌하는 선거가 있고, 인권과 인권이 충돌하며, 이해득실이 갈리고, 공존이 아닌 생존을 위한 싸움이 만연한 현실에 직면하여, 선 밖으로 나가 서로를 포용하고 연합과 화평을 이루는 길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자체가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지요. 어떤 '선'들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여겨질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책은 그 '선'에 대해 다시 재고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다른 편과 충돌하는 내 편의 '정의로움'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가 요청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옮음이 아니라, 더 큰 진리 위에 서기 위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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