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꿈을 그리다 - 반 고흐의 예술과 영성
라영환 지음 / 피톤치드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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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늘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성경과 세상, 성직자와 화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지만 반 고흐는 이 둘을 하나로 연결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다"(77).

예술은 비극 속에서 피어나는 꽃일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린 예술가는 '루벤스' 한 사람 정도입니다.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은 작품에 더욱 강렬한 지문을 남기기 마련이라, 작품만큼이나 우리는 예술가들의 생을 이야기하기 좋아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예술가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스스로 귀를 자른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천재, 비극적인 죽음과 같은 것"(17)이니까요. 그가 남긴 작품보다 "광기 어린 천재로서의 반 고흐의 신화"에 더 매혹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책은 우리가 간직한 바로 그 반 고흐의 신화에 반기를 드는 책입니다. 화가인 그가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과 우리가 보는 그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보고 싶은 반 고흐와 반 고흐 자신이 보여 주고 싶었던 반 고흐 사이의 괴리를 좁히려는 시도"(17)라고 밝힙니다.

반 고흐가 되어 반 고흐를 보기 원하는 이 책은, 먼저 '반 고흐 해석의 난점들'을 다시 탐색합니다.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반 고흐는 과연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흥분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알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고갱의 증언 때문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저자의 추론을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반 고흐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작품에 대해 얼마나 큰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모든 사람들이 빈센트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가 느꼈을 고독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어. 빈센트가 내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네게 알리고 싶어. … 그 겨울 이후 나는 혼자 있어도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빈센트가 말한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는 삶',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아"(95).

형 빈센트 반 고흐가 죽고, 6개월 뒤 그의 동생 테오도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그 속에서 태오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93-95). 그렇게 편지를 읽다가 진정한 반 고흐를 발견한 요한나 덕분에 반 고흐의 작품과 삶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고요. 요한나가 발견한 '진정한 반 고흐의 삶'은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반 고흐는 단지 안락한 삶보다 자신의 열정을 불사를 일, 삶의 의미를 찾기 원했고,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안락함보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을 택했던 반 고흐는 "탄광촌에서 대접받는 목회자로 살기보다는 광부들과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147)했으나, 그가 속한 복음교회는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성직자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맙니다.

성직자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광부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처럼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성직자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된 후, 고흐가 발견하게 된 새로운 소명은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가난한 자를 섬기고자 했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부러진 나무조차 아름다울 수 있음"(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여주었던 고흐에게, 그림은 소외된 자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복음이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의무를 일깨우는 일종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세상이 읽기 원했던 고흐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깊고 참된 사랑이 있어야 해.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며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힘이자 신비한 힘으로 감옥을 열게 되는 거지.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아. 그러나 사랑이 부활하는 곳에 인생도 부활하지"(182).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한 사람, 불쾌한 사람,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 그래 좋아.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것이 내 바람이야"(180).

<반 고흐, 꿈을 그리다>는 고흐 자신의 소명의 빛 아래서 그의 삶과 예술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성직자를 꿈꾸었을 때도,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했을 때도, 고흐가 꿈꾸었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는 것!

미치광이 천재 예술가가 아니라, 소명의 빛을 따라 울며 씨를 뿌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고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따라간 진정한 예수의 제자였다는 것이 제 삶에 작은 진동을 일으킵니다. 이제 제게 고흐는 "병들고 임신한 데다 배고픈 여자"가 한 겨울에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그 여인을 외면할 수 없어 기꺼이 자신의 가족(아내)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크리스천, 이름 없는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삶을 너무도 사랑하느 화가로 기억될 것입니다. 교회가 그의 순수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 덕분에 한 사람의 성직자를 잃었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화가를 얻었다는 것이, 제게는 더 큰 비극이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신비요, 인생의 아이러니로 다가옵니다. 

반 고흐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모습말고, 반 고흐가 보여주기를 원했던 모습으로 반 고흐를 다시 만나보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들이 고흐에게 등을 돌렸을 때보다,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지금을 고흐는 더 슬프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항상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이웃이 되어 그를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고흐를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이 순간, 비로소 그를 위로할 수 있었고, 다시 그에게 위로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 고흐, 꿈을 그리다>, 누구보다 먼저 교회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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