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수학자 - 캔버스에 숨겨진 수학의 묘수를 풀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이광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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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數)를 가지고 남자와 여자를 그렸다!"

"아름다우면서도 해부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인체"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뒤러가 1:1.6의 황금비에 빛나는 8등신의 <아담>과 <이브>를 그린 뒤 한 말이라고 합니다(76). 수학을 못하면 대학만 못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르네상스시대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기하학을 모르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5)고 했답니다. 수학을 모르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없다는 사실뿐 아니라, <미술관에 간 수학자>는 그림을 꼭 직접 그리지 않더라도, 수학을 알면 그림이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미술관에 간 수학자>는 예술 작품 속에 투영된 수학의 세계를 아름답게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그림 속에 녹아 있는 수학의 세계를 흥미롭게 풀이해주는데, 수포자인 제게는 수학적 설명이 여전히 넘기 힘든 문턱(사실 문턱 정도가 아니라 장벽 수준입니다만)이었지만, 수학의 세계가 아주 정교하게 그림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즐거운 감상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 설명은 대표적인 원근 착시를 보여준다는 마그리트의 <유클리드의 산책>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는 "아무리 연장해도 절대 만날 수 없는 직선"을 평행선이라고 정의했는데, 마그리트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유클리드의 정의가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표현했다"(33)고 합니다.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2개의 원뿔 모양의 탑이 그려진 줄로만 알았는데, 이 책을 설명을 듣고 보니 2개의 원뿔 모양의 탑이고 생각했던 그림은 사실은 원뿔 모양의 탑과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도로였습니다. 화가는 "평행선으로 이뤄진 도로도 원뿔처럼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을 통해 자기 방식으로 수학자에게 말을 거는 화가 마그리트가 재치 있고 유쾌해 보입니다.

<미술관에 간 수학자>는 캔버스에 숨겨진 그림 감상에, 기발하고 즐거운 수학적 상상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알갱이 역학' 중에서 '멈춤각'이라는 것이 있는데, 고대인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이 각도를 알고 있었다면 바벨탑은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상상입니다. "멈춤각은 창조주가 설계한 자연의 성질이므로 아무리 창조주라고 하더라도 멈춤각을 지켜서 쌓은 탑을 무너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37). 또한 '성경 속 대홍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수학자의 상상력도 흥미롭습니다. 40일 동안 내린 강수량을 시간당으로 구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홍수가 나고, 다시 물이 빠지는 과정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지구 전체를 덮는 대홍수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230-233). 저자는 이러한 수학적 상상력을 '별난 수학자의 위트 정도'로 읽어달라고 하는데, 성경의 기록을 진리로 믿는 한 사람의 성도로서 여기에 숨은 신의 비밀이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미술관에 간 수학자>를 읽으며 수(또는 수학)는 신의 언어, 우주의 언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예술은 창조 세계의 성질과 질서와 조화와 균형이 수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꿰뚫어보는 그림의 언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깨닫고 새삼 더 놀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자는 화가들"이라는 이 책의 명제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수학과 친하고 수학을 잘 하는 친구들이라면 이 책이 더욱 흥미롭게 읽힐 것입니다. 더불어 수학과 친해지는 데 그림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학과 사이가 나쁜 친구라 할지라도 수학의 아름다움, 수학의 정교함, 수학의 매력, 수학의 위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 때문에 수학과 더 친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림과는 확실히 더 친해졌으며, 수학이 더욱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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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 - 현대 세속주의를 의심하다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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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는 삶에 말을 걸다!"


이 세상은 우연한 빅뱅의 산물이며, 과학적 지식이 최고의 지식이고, 인간은 물리적 존재일 뿐이며, 죽으면 존재가 소멸되고, 사랑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은 신경화학 사건에 불과하며, 생명(존재)은 무의미한 파편일 뿐 어떠한 형이상학적 목적도 있을 수 없으며, 합리적인 이성이 내리는 결정과 선택 외에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비이성적인 맹신으로 취급하곤 합니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라는 도전을 던지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과학이 종교에 반한다고 생각하지만, 종교에 대해,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적대감을 쏟아놓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과학 대 신앙(종교)의 싸움이 아니라, 신앙(무신론) 대 신앙(유신론)의 싸움입니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무신론과 유신론이 충돌하는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책입니다. 전장의 한복판이라고 해서 일방적이고, 무분별한 총질(비난과 논쟁)을 일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한복판에 진지한 성찰과 성숙한 토론이 가능한 열린 대화의 장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실제로 팀 켈러 목사님은 "신의 존재나 초자연 세계에 회의적인 사람을 위해 매주 토론장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 결실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복음은 시의성을 잃었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근대화될수록 종교는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속단이었음을 보여주며 여전히 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이유를 파고듭니다. "신을 믿는 믿음은 세계 인구 5명 중 4명에게 진지한 현실이며, 가까운 장래에도 계속 그럴 것이다"(23).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자신은 종교의 허상 따위에는 빠지지 않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믿음의 뿌리, 즉 자기 삶의 기초를 진중하게 다시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무신론적 믿음이 '명확한 증거'와 '이성'을 따른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러한가에 의문을 던집니다. "종교에서 세속주의로 옮겨 가는 일은 신앙을 버린다기보다 새로운 신념 체계와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 갈아타는 것이다"(50).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세속주의자나 신앙인들이나 모두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증언들, 철학, 연구 등을 통해 이성만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삶이 어떠한지는 말해 줄 수 있어도 어떠해야 하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는 것, 자유, 양심, 인권, 민주주의의 정의와 사랑이라는 현대의 이상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빚지고 있다는 것 등을 밝히며, 세속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 삶의 많은 경험들에 기독교가 어떻게 답이 될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논증해나갑니다.

"니체의 요지는 이것이다. 당신이 만일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만인의 권리를 믿고 모든 약자와 빈민을 돌봐야 한다고 믿는다면, 스스로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은 여전히 기독교 신념을 고수하는 것이다. 예컨대 삶의 한 부분이고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사랑과 폭력 중 하나는 선하다고 취하고, 하나는 악하다고 버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둘 다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런 선택의 기준은 어디서 왔는가? 신이나 초자연 세계가 없다면 그런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73).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진지하게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는 자들에게 기독교의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탁월한 기독교 변증서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손꼽히는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다루는 변증의 내용들과 상당 부분 맥이 통하고 있습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책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변증된 내용들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서로 보완적인 측면이 강하기 떄문에, 상당히 철학적이고 견고한 논리로 풀어가는 변증서를 읽어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님을 감안하면, 팀 켈러와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책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은 탐구(독서) 방법일 듯합니다. 

(특히)
내가 '지어낸' 삶의 의미는 왜 덜 영속적일 수밖에 없는지, 왜 제약을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 진짜 자유인지, 자아는 왜 인생 최대의 확고부동한 사실인 죽음을 통합하거나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없는지, 스스로 인정해서는 정체성을 얻을 수 없으며 정체성은 왜 상당 부분 타인에게서 와야 하는지, 하나님 앞에서의 내가 왜 진짜 자인지, 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해보기를 권합니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구도자와 회의론자들을 대화의 장으로 초대하는 기독교 변증서이지만,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벅찬 전율이 우리 영혼을 휘감을 것입니다. 확실히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신을 믿지 않을 때보다 믿을 때 인생이 더 이해된다"(46)는 이 책의 명제를 꼭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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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레오 버스카글리아 지음, 이은선 옮김 / 홍익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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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무의미한 사람이다.
- part 10.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들 中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사랑학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사랑학'이라는 과목이 있는 곳은 우리 학교뿐이며, 그런 과목을 담당할 정신 나간 교수라곤 지구상에 저 하나뿐입니다"(15)라는 고백에서 강의가 개설되었을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후, 그녀의 강의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그녀의 책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이 책의 가르침은 여전히 절실해 보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당신은 진정한 당신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입니까?" 저자는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가 <인간의 대지>라는 작품에 남긴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사랑이란 당신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돕는 과정일지도 모른다"(41).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고 나를 진실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삶과 사랑과 배움이 시작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본래의 내가 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빠르게 달리는 토끼에게 하늘을 나는 수업을 강요하는 '동물학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저자가 독자들을 일깨우고, 교육계를 일깨우고, 세상을 일깨우고 싶은 메시지가 이 짧은 우화 속에 모두 응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입니다(이미 여러 번 들은 내용인데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저는 이 책을 30년 전에 처음 읽었습니다. 늦게 찾아온 열병처럼 때늦은 사춘기로 인생에 대한 지독한 회의를 앓고 있던 시절, 절친의 선물로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본래의 나로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 타인을 자기 마음으로 하겠다고 고집하기 보다 타인 역시 그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아름다운 가르침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은 이 책에서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이 책의 책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세상은 이미 그런 곳이 아니라는 절망이, (절대 기준, 절대자, 진리가 없다면) 아무리 나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도 나는 허무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식이 더 무겁게 내리 눌렀던 것 같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이 제 인생에 끼친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어떻게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더 바른 삶인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되어주었다고 믿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이 책이 자기계발의 선두주자 같은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읽기를 잘했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길잡이의 선봉에 선 사람들, 즉 누구보다 먼저 교육자가 읽어야 할 책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칼 로저스의 말을 기억하며 말입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 내가 아는 사실은 단 하나뿐,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19).

무엇보다 이 책은 교학적 관점에서 진지한 성찰과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누구나 깊이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쉽지만 분명하게, 날카롭지만 따뜻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사는 법을 전합니다. 저자 자신의 생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서 더 매력적인 강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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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뚜껑이 없어 - 요시타케 신스케, 웃음과 감동의 단편 스케치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컴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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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감이 안 돼!

뭔가 풍자적이고, 귀여운 단편 스케치인데 또 이렇게 공감이 안 되기는 처음이라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언젠가 'B급 영화'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는 개그를 보았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닮았다고 할까요. 애초에 흐름이라는 것이 없는 단편 스케치이지만, 너무 '단편적'이라 그럴까요. 작가의 의도랄까, 생각의 흐름이랄까, 아무튼 작가의 표현을 잘 따라갈 수가 없어 전반적으로 무엇을 느낀다든지, 공감을 하다든지, 웃음이 난다든지, 감동이 있다든지 하는 '감상'이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또 '전부'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반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단편적이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게 생각을 부여잡고, 느낌을 부여잡는 스케치들도 있습니다. 아래의 페이지(밑 사진)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스케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뚜겅이 없어>는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가의 일러스트 북이고, 이 작품은 초판 이래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웃음과 감동의 단편 스케치라는 소개를 보고 기대가 컸던 작품입니다. 솔직히 기대보다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기발하고 귀여운 스케치로 가득하지만,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는 독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들을 포착한 단편들의 연속이 지루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 어떤 글들은 귀엽고 기발한 반전으로 사고의 전복을 일으키는 충격을 주기도 하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일은 오니까, 무엇을 해도 돌아오지 않는 어제 일을 생각해보자"와 같은 글이 그렇습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더욱) 이 단편 스케치들을 함부로 평가할 자격은 제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림) 에세이를 읽듯이 읽어가지 말고, 스케치 한 편 한 편에 오랫동안 머물며 충분히 감상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급 영화나 포스트모더니즘적 개그를 보았을 때처럼 다른 사람의 반응(감상)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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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손봉호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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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과학적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롱을 받고 있고,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 기독교 신학은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유주의 신학은 너무 빨리 과학적 사고에 아첨해 버렸고, 보수신학은 너무 강하게 과학적 사고와 담을 쌓았다. ... 결국 정치, 경제, 기술, 학문 등이 공공영역을 주도하고,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은 거기서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오직 영혼의 구원과 개인적 경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인간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고 사람들이 관심과 시간 대부분을 쏟아붓는 공공영역은 내팽개치고 말았다. ... 이런 이원론 때문에 기도와 전도에 열정을 쏟는 그리스도인조차 정치계나 기업계에 들어가면 불신자와 다름없이 행동한다"(92).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기독교 지성의 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글은 모두 <월드뷰> '대표주간 칼럼'에 기고한 것들을 모은 것"(6)이라고 하는데, 설교의 설교처럼, 어쩌면 (전형적인) 설교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따끔하게, 심각하게, 놀랍게 흔들어 깨우는 시대적인 통찰을 보여줍니다.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손봉호 교수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를 보면 항상 주위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때라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돈이 가장 매력적인 우상으로 부상하게 된 오늘날, 모든 욕망이 '돈'이라는 대상으로 집약되면서 그리스도인조차도 돈을 섬기고 있는 세태를 매섭게 지적합니다. 세상을 향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일깨워야 할 그리스도인이 돈을 사랑하다는 데 앞장서는 현실은 이 시대의 종교개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기독교가 공적인 영역으로 관심을 돌려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는 책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신학이 좀 더 심각하고 철저하게 문화의 변화와 씨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요즘 사회와 교회에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동성애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동성애 문제'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손봉호 교수님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열린 토론도 활발히 일어나야겠지만 "성경에는 동성애에 대한 경고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정의롭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도 한국과 미국의 보수 교회는 후자는 무시하고 전자에만 열정을 보인다"(92-93)는 지적도 많은 반성을 하게 해줍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읽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성경적인 시각과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인 사명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독교 지성이 있다는 것이 큰 복으로 느껴집니다. 이 책과 같은 좋은 유산을 많이 남겨주시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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