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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이어령 유고집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8월
평점 :
미래에 올 새로운 생명들, 새로운 세계들에 비록 나는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몇 가지 나의 글, 나의 언어들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씨앗이 되고, 불씨가 되고,
그리고 작은 터널 속 빛과 같은 것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떠날 때의 모든 절망 속에서 남기고 가는 희망으로
오늘 이별을 얘기합니다(52).
이어령 선생님의 유고집 <작별>은, 이어령 선생님께서 "내가 없는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쾌하고, 기발하고, 뜨거운 <작별>이라니요! 역시 이어령 선생님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없는 세상에 내가 남길 것은 무엇인가?"를 얼마나 뜨겁게 고심하셨을까요? 그런데 그 귀중한 시간을 하는 이별 얘기를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노래로 시작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집합 기억'이라는 말을 설명하시며, 선생님이 "평생 겪은 것을 담아낼 가장 중요한 DNA 같은 말"(11)을 찾아내셨습니다. 그것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로 시작하여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를 걸쳐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어린 시절의 노래였습니다. <작별>은 선생님의 80년 동안의 경험을 이 다섯 가지 키워드(원숭이,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로 정리하며, 그것이 어떻게 '백두산'과 이어지는 지를 들려줍니다. 재밌는 것은 '백두산'을 제외하고는 다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 낯선 외국인, 그게 "원숭이"입니다. 그런데 '원숭이 엉덩이'이 숨겨진 우리네 정서는 잘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업신여기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오기가 그 많은 외압과 외래 문화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온, 한국 사람들의 단점이기도 하면서, 오늘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핵심적인 원동력이라고 설명합니다.
외국 문화와 우리 문화가 접촉할 때,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먹거리'인데, "사과"는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복숭아'가 우리의 것이라면, '사과'는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데, 아담의 사과(선악과)로부터 시작하여, 파리스의 사과, 뉴턴의 사과, 윌리엄 텔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사과, 튜링의 사과까지, 서양 문화는 '사과' 하나로 다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과의 특징은 '접목'이라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나나"는 그 수많은 과일 중에서도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그 무엇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좁은 환경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던, 씨가 없는 바나나! 바나나는 겉은 노랗지만, 껍질을 벗기면 속은 하얗게 서양인이 되어가는 우리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먹거리는 문명으로 이어집니다. "기차"는 모든 문명을 상징하는데, 개화기의 기차는 우리에게 이별의 상징이었고, 빼앗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기차는 우리의 희망을 꺾은 역사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삶은 계란'의 정이 우리를 다시 살게 했노라고 일러줍니다.
원숭이와 먹거리와 문명,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문명 단계의 제일 마지막은 "비행기"입니다. 우리는 날개가 없지만 날고 싶어하는 꿈을 꾸지 못했고, 비행 실험을 하다 떨어져 죽은 모험가도 없지만,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그글 띄우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요즘 뜨는 사람이 많은데, 뜬다와 난다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난다는 것은 자기 날개를 달고 자지가 가고 싶은 데를 향해서,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인데, 자기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 떴어도 금세 고꾸라진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데를 향해서 가려면 자기만의 튼튼의 엔진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내가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키워드들이 만들어지려면
지나간 나의 이야기, 다섯 개의 키워드, 역전의 드라마로서,
우리가 이제는 세계를 향한 발신자로서 세계와 친구가 되고,
외국인이 더 이상 원숭이가 아니고, 더 이상 사과나 바나나나 기차나 비행기가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이 되어버린 이 근대화 100년 속의 그 슬기가 필요해요(66).
<작별>은 이렇게 우리 것이 아니었던 개화기의 다섯 가지 키워드가를 통해 이제 다음 세대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키워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백두산부터는 우리가 다섯 개의 키워드가 아닌 새로운 키워드를 만들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예요"(65).
그리고 선생님은 "내가 없는 세상의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 '백두산'에서 생겨난 "반도 삼천리"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지금은 대륙과 바다 사이에 끼어 반도성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앞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갈 다음 세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반도성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반도성의 회복'은, 지고 이기는 것밖에 없는 서양의 양자택일 방식이 아닌, 우리의 가위바위보의 지혜와, 남들은 못 쓴다고 내다 버리는 것들을 그냥 '버려둠'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5G, 누릉지, 묵은지, 우거지, 콩비지, 짠지) 우리의 '버려둬'의 철학과, 그리고 선생님이 계속 강조해왔던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하나되는 디지로그의 세계,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어울리는 눈물 한 방울의 세계, 바로 생명자본의 세계 속에서 꽃피게 될 것이라고 예언 같은 지혜를 남겨주십니다.
잘 있어라, 하는 '잘'은 디지로그의 생명자본, 눈물 한 방울입니다.
이걸 여러분에게 남겨놓고 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가, 하고 손을 흔들 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잘 있어, 틀림없이 너희들은 잘 있을 거야, 잘 있어, 하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142).
이 시대의 지성이라 불린 이어령 선생님은 <작별>을 통해 어쩌면 평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일깨우기 원하셨던 바로 그 지혜를 우리의 기억 속에 새겨주고 가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향은 오스트리아였는데, 이를 오스트레일리아로 잘 못 알고, '호주댁'이라고 부르며,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6.25 전쟁 때 제트 비행기를 '호주 비행기'라고 불렀던, 그렇게 '어리숙했던' 우리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어령 선생님의 노고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의 언어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이야기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셨던 것이지요.
<작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내리 읽었습니다. 잘 읽히고, 재밌습니다.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시며, 그 지혜는 끝을 모르겠습니다. 잘 가, 잘 있어요, 라는 우리의 인사말이 이렇게 뜨거운 인사였던가요. 이어령 선생님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슬퍼집니다. 이제 선생님이 남겨주신 '슬기'로 새롭게 열어가야 할 세상, 여기 그 새로운 세상을 주도할 강력한 키워드가 이 책 속에 들어있습니다. 특별히 미래를 예측해야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비밀스럽게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