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 김영아의 독서치유 에세이
김영아 / 삼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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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독서로 치유하는 내 안의 그림자’라는 독서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저자의 독서치유 에세이다.
독서치유 프로그램은 집단 상담 형태로 진행되는데,
참가자가 모임 전에 정해진 책을 미리 읽고, 
정기적으로 모여서 책을 읽으며 느낀점을 서로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는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참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분들의 이야기, 그 고백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아무도 몰래 간직해온, 아니 치유되지 않고 남아 나를 짓눌러온
내 안의 아픔이 어루만져지고 씻겨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인생 없고, 모두가 제 짐 한 짐씩 지고 있다지만,
모두 어쩌면 이리도 아리고 시린 기억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홀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사연들이 책을 만나 아프게, 아프게, 그렇게 풀어질 때마다, 
나도 함께 울었다.
안타깝고, 기막히고, 서럽고, 아파서도 울었지만,
억울해서 더 많이 울었다.
오래전 기억인데도 왜 그 상처는 질기고 질기도록 달라붙어 마음을 짓누르며,
오늘의 행복을 가로막고, 
내일의 삶을 향해 가는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가.

저자는 어린시절의 상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시작된 과거 어느 때로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용기를 내어 이 쉽지 않은 여행을 떠나보기로 작정할 때,
'책'은 우리를 목적지로 은밀하게 데려다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고, 관찰자가 되어보기도 하면서,
나는 통째로 삼켜버린 상처에 매몰되어 그 실체를 제대로 가늠해보지 못했던
상처의 정체를 객관화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지독하고 아픈 상처일수록 가까운 사람에게보다, 
익명성이 보장 되는 곳에서 꺼내보이기가 더 쉽다.
그런 점에서 책은 아픈 영혼이 가장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대화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어준다.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는 누군가에게 '내보여야만' 한다.
몸이 아프면 신체의 어는 곳이든 의사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은가.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상처를 내보이는 일은 몸의 은밀한 곳을 보여주는 일보다,
더 지독하게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치유가 가능한데도 덮어두고 감춰두고 평생을 그 상처로 노예로 사는 일은 
너무도 억울하다.

같은 상처도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걸림돌'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신경숙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외딴방>이 바로 '디딤돌'이 된 경우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그 외딴방에서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렇게 치유를 경험한다. 
나의 상처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는 그렇게 마음문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내보임으로 
짓눌려 있던 과거로부터 자유를 얻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는 독서와 함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포인트를 짚어주며,
마음문을 여는 데 열쇠가 되어줄 16권의 책도 함께 소개해준다.
건강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상처에 귀 기울이며
공감해볼 수 있는 뜨거운 독서, 살아있는 독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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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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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종교인은 신비주의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즉답이 나오지 않는데, 
100년 전에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을 쓴
저자 에두아르 쉬레는 적어도 그렇게 보았던 것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요, 역사학자요, 작가요, 비평가라는 에두아르 쉬레는 
'신비주의'를 초월적 존재와 영혼의 만남으로 규정하며,
종교의 기원을 거기에 두고 있다.
종교는 '영혼의 고양을 통한 신과의 만남'이라는 공통분모를 같는다고.
다른 말로 하면, 위대한 종교들의 핵심에 신비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는 시간과 공간에 발을 딛고 살았던 역사적 실존 인물 중에서
자신 안의 있는 영혼을 개화시킴으로써, 
다른 말로 인간 영혼이 가장 드높은 상태로까지 고양되어
신(神)이라고 하는 하나의 중심점에 도달한 사람들, 
즉 초월을 경험한 사람들의 대표로 8인을 선정하고 있다.
라마, 크리슈나, 헤르메스, 모세,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예수, 
이들은 신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종교를 세운 선지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정신적 모형이며,
우리의 영혼을 놀라울 만큼 일깨운 사람들이며,
우리들의 사회를 훌륭하게 조직해 낸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신비주의와 종교의 기원에 대한 저자의 이론은 많은 반론과 비판이 예상된다.
실제로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이 드높은 상태로 고양 될 때, 
신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듯 신이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으면,
인간 편에서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의 저자보다
기독교적인 설명이 더욱 '신비주의'에 가깝게 느껴진다.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신비주의를 경험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철학적인 시각으로 통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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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글로벌 시대, 치열했던 한중일 관계사 400년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 강진아 옮김 / 소와당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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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김영철 씨가 광복절 특집으로 기획된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을 방문하여, 한국에 대한 왜국된 정보를 수록한 영국 교과서 수정을 약속받고 돌아왔다는 뉴스 기사를 읽었다. 우리나라가 1인단 10달러 이하의 원조를 받는 나라며, 경제적으로 발전이 덜 된 나라로 분류되어 있었고,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설명도 있었다고 한다. 김영철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심지어 한국이 중국에 포함된 나라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외국의 교과서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와 자료가 부족해서 UN 자료를 받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영철 씨는, “일본의 경우 매주 자기 나라의 변동사항을 (영국의) 저자에게 알려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타까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8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4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61년째가 되는 날이다. 그런데 8월에는 광복절과 건국기념일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이 또 있다. 8월 29일 '국치일'이다. 모든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치욕의 날이다. 우리는 이날의 치욕을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지 않는가. 내년이면 '경술국치'(庚戌國恥) 100주년이 된다고 한다. 웰스라는 역사가는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역사의 교훈을 새기지 못하면, 부끄러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이라는 책은 8월의 역사적인 감흥을 새롭게 일깨워준 책이다. 책 제목이 기분 나쁘지만, 더 기분 나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더 기분 나쁜 것은 세계 열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우리나라의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며, 그것보다 더 기분이 나쁜 것은 일본인 학자가 쓴 책을 읽으며 이러한 자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 나 자신이다. 지극히 유치한 감상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솔직한 심정이니까. 그런데 돌이켜 보니, 우리는 줄곧 이렇게 반응해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기분 나빠하기' 말이다.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 전에, 이제라도 진지하게 반성하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역사의 창을 통해 과거는 물론 '오늘'에 대한 성찰과 '내일'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은 조선 반도를 둘러싼 역학 관계, 즉 국제정세와 조선의 외교 관계를 살핀 책이다. 뻔한 말이지만 다시 깨닫는 것은 나라에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시대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씁쓸하다. 책을 읽을수록 조선의 독립이 '미완'이라는 명제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광복(光復), 우리가 속히 회복해야 할 빛이 아직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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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랜드 -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의 임상 기록
폴 브록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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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곧 스토리이다.


저자를 '학자'라고 불러야 할지, '작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일런트 랜드>(into the silent Land)는 폴 브록스라는 신경심리학자의 임상 기록이다. 그런데 내용이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다. 임상 기록이라는 선입견이 첫 장의 내용부터 아리송하게 만들었고, 곧 설명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가는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별히 어려운 의학 용어나 내용이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 책은 임상 기록이라는 느낌이 없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어떤 내용들은 동화처럼 아름답다.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임상 기록이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라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추천사'를 보니, "뇌의 기능에 손상이 왔을 때 현실적으로 얼마나 심한 손실인지를 평가하는 전산화된 기능검사가 임상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이 평가와 진단을 전담하는 학문이 바로 신경심리학"이라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일을 하는 신경심리학자가 신경장애에 걸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쉬운 말로, 뇌를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이 임상 기록처럼 읽히지 않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저자의 독특한 문체와 서술 방식 때문이다. 저자는 환자, 즉 뇌를 다친 사람들을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이 아니라, 독특하게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즉, 나(I)의 입장에서, 환자 자신이 이상 행동을 할 때의 느낌과 심정을 이야기하고, 그런 시각에서 이상행동 증세를 묘사한다. <사일런트 랜드>는 신경증 환자의 사례들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저자의 경험이 형이상학적 우화와 자전적 명상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뇌를 다친 환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며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고 하여, 영국 언론은 이것을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이라고 했다고 한다. 

책에는 뇌의 손상을 입은 기이하고 파격적인 사례들이 등장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사람, 자신의 머릿속에 물고기가 헤엄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온몸의 피가 밤사이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똥을 자꾸 먹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마디로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과 해석이 새롭다. 나는 몇 번을 읽으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려 애썼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읽을 때는 이해될 듯 하면서도 다시 생각하면 어렵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온전한 자아라는 것은 없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분할되어 있는 불연속적 존재이다. 우리의 자아의식을 뒷받침하는 심리과정 - 느낌, 생각, 기억 등 - 은 두뇌의 여러 영역에 흩어져 분포되어 있다. (...) 그런 것들은 허구의 작품에서나 통합된다. 그래서 인간은 스토리를 말하는 기계이다. 자아는 곧 스토리이다"(73). 뇌를 다친 사람들, 즉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 부조리한 이야기도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마디로 이렇게 주장한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우리를 말해준다는 거다"(74)라고. 저자의 설명이 이해가 되는가?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뇌 손상을 입은 환자이든 정상인이든 똑같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신체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보통 심장의 위치에 손을 댄다. 다시 물어보면, 뇌의 위치에 손을 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곧 알쏭달쏭해진다. 자아와 의식과 마음을 '나'라고 느끼면서도 그런 의식 활동을 하는 '나'에 대한 성찰과 이해, 곧 철학적 질문을 별로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사일런트 랜드>는 물질적인 뇌와 눈에 보이는 이상행동만이 아니라, 뇌의 활동과 자아(I)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함께 탐색한다는 점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만, 동화처럼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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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원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김진주 옮김 / 퍼플레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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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사랑을 믿으세요?

’찾아가는 운명,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매우 낭만적인 글귀와
카드가 그려져 있는 책의 표지를 보니,
지치도록 보고 또 보았던,
’욘사마’ 열풍이 풀게 했던 ’겨울연가’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배용준이 열연했던 ’민형’(준상)이라는 인물이 타로 카드 한장을 뽑아 들었는데,
그때 그 카드의 이름이 ’운명의 수레바퀴’였다.
’유진’의 선배는 그 카드를 ’민형’(준상)에게 선물하며,
마치 예언을 하듯 운명의 상대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준다.
똑같은 카드를 가진 사람이 바로 운명의 상대라는 말과 함께.

’운명적인 사랑’ 따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메마른 정서를 씻어주기라도 하듯
감성을 한껏 자극하는 <럭키 원>은 그 이야기가 ’겨울연가’ 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만약, 오래 전에 찍은 나의 사진을 들고 한 낯선 남자가 국토의 절반을 걸어 찾아온다면?
아직도 이런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우연히’ 주운 한 장의 사진이 ’마법’ 같은 행운을 불러오고,
’무작정’ 사진 속의 여자를 찾아 미대륙을 절반을 걸어서 여행하고,
사진 속 여자의 전 남편과 ’필연성을 동반한 우연’으로 얽히고,
그럴 작정은 아니였는데, 어느새 서로에게 끌리며 사진 속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소울메이트’처럼 완벽하게 어울리는 ’커플’이 된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이러한 ’운명적 설정’이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법’한 사랑임을 증명하듯,
개연성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도 잊지 않고 있다.
우선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우연히’ 하게 주운 사진이지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어떠한 미신이라도 믿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사진의 배경을 단서로 미지의 여인을 찾아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주인공 남자는 사진 속 여자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해낸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는 ’운명’과 ’스토킹’ 사이에서 갈등도 일어난다.

내가 아는 가장 운명적인 사랑이야기인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를 보면,
선생님 이병헌이 학생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명대사가 나온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가루만큼 고운 가루 같은 밀씨 하나를 떨어뜨려서,
그 밀씨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바로 저 바늘 위에 꽂힐 확률!
그런 엄청난 확률로 우린 만난 것이고, 그것을 ’인연’이라고 부른다"고.
(정확하지는 않지는 대충 이런 대사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하게 되는 사랑은 모두 ’운명적인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꿈꾸기 시작하고부터 줄곧 나도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너무 ’요란한’ 운명을 기대하느라 모든 ’운명적 인연’을 놓쳐버린 듯하다.
지금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럭키 원>과 같은 환상을 품기에는
그간에 사랑에 대해 직접, 간접적으로 겪은 실망이 너무 크다.

<럭키 원>이 말해주는 것은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오는 수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게 다가온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고 가꿔가는 적극적인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사랑은 기적이 된다고 말이다.

문학이니까, 소설이니까 이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다시 어떤 기대감이 살짝 자리한다.
내게도 사랑이 올까?
’바로 이 사람이다’ 하고 알아볼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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