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랜드 -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의 임상 기록
폴 브록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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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곧 스토리이다.


저자를 '학자'라고 불러야 할지, '작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일런트 랜드>(into the silent Land)는 폴 브록스라는 신경심리학자의 임상 기록이다. 그런데 내용이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다. 임상 기록이라는 선입견이 첫 장의 내용부터 아리송하게 만들었고, 곧 설명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가는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별히 어려운 의학 용어나 내용이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 책은 임상 기록이라는 느낌이 없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어떤 내용들은 동화처럼 아름답다.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임상 기록이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라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추천사'를 보니, "뇌의 기능에 손상이 왔을 때 현실적으로 얼마나 심한 손실인지를 평가하는 전산화된 기능검사가 임상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이 평가와 진단을 전담하는 학문이 바로 신경심리학"이라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일을 하는 신경심리학자가 신경장애에 걸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쉬운 말로, 뇌를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이 임상 기록처럼 읽히지 않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저자의 독특한 문체와 서술 방식 때문이다. 저자는 환자, 즉 뇌를 다친 사람들을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이 아니라, 독특하게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즉, 나(I)의 입장에서, 환자 자신이 이상 행동을 할 때의 느낌과 심정을 이야기하고, 그런 시각에서 이상행동 증세를 묘사한다. <사일런트 랜드>는 신경증 환자의 사례들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저자의 경험이 형이상학적 우화와 자전적 명상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뇌를 다친 환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며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고 하여, 영국 언론은 이것을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이라고 했다고 한다. 

책에는 뇌의 손상을 입은 기이하고 파격적인 사례들이 등장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사람, 자신의 머릿속에 물고기가 헤엄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온몸의 피가 밤사이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똥을 자꾸 먹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마디로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과 해석이 새롭다. 나는 몇 번을 읽으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려 애썼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읽을 때는 이해될 듯 하면서도 다시 생각하면 어렵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온전한 자아라는 것은 없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분할되어 있는 불연속적 존재이다. 우리의 자아의식을 뒷받침하는 심리과정 - 느낌, 생각, 기억 등 - 은 두뇌의 여러 영역에 흩어져 분포되어 있다. (...) 그런 것들은 허구의 작품에서나 통합된다. 그래서 인간은 스토리를 말하는 기계이다. 자아는 곧 스토리이다"(73). 뇌를 다친 사람들, 즉 신경장애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 부조리한 이야기도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마디로 이렇게 주장한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우리를 말해준다는 거다"(74)라고. 저자의 설명이 이해가 되는가?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뇌 손상을 입은 환자이든 정상인이든 똑같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신체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보통 심장의 위치에 손을 댄다. 다시 물어보면, 뇌의 위치에 손을 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곧 알쏭달쏭해진다. 자아와 의식과 마음을 '나'라고 느끼면서도 그런 의식 활동을 하는 '나'에 대한 성찰과 이해, 곧 철학적 질문을 별로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사일런트 랜드>는 물질적인 뇌와 눈에 보이는 이상행동만이 아니라, 뇌의 활동과 자아(I)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함께 탐색한다는 점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만, 동화처럼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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