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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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느냐, 굴복하느냐, 둘 중 하나였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야생의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비는 두려움으로 오해를 받게 되고 그런 오해는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 죽느냐 죽이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싸움의 법칙이었다. 그는 아늑히 먼 원시 시대에서 내려온 이 명령에 복종했다"(109).

<야성의 부름>은 남부의 따뜻한 햇볕을 쬐며 여유로운 귀족 생활을 해왔던 '벅'이라는 개가, 그 집 정원사의 조수이자 도박꾼이었던 '매뉴얼'에 의해 아무도 몰래 얼어붙은 북쪽 땅으로 팔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금광의 발견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북쪽 땅으로 몰려들면서, 사람들에게는 썰매를 끌 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던 문명의 중심지에서 갑자기 원시 세계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벅'에게는, 분노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할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면을 벗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평화도 없고, 휴식도 없고, 무엇으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원시 세계에는 오직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만이 존재했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벅은 자신 안에 숨은 교활한 본성을 깨우며 냉혹한 현실에 맞서야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투쟁이 아니라, 순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시의 노래가 벅의 몸속으로 파도처럼 흘러들며 불과 집이 있는 문명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시적 본성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그 야수의 모습을 진보라 불러야 할지, 퇴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작가는 '벅'이 문명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시의 세계로 들어선 증거로 도덕성의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폭력적인 힘과 도둑질과 같은 교활함이지, 죄책감과 같은 도덕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덕적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할수록 '벅'은 더 위험한 존재, 즉 야생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성의 부름>은 대-자연의 위엄 속에 그곳을 지배하는 한마리의 '유령 개'로 깨어나 포효하는 '벅'의 전설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문명'이라는 허울 속에 감추어진 인간 사회의 야만을 폭노하는 고발 소설로도 읽힙니다. '벅'은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원시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빠르게 터득하며 교활한 야만의 본성으로 자신을 채우면서도, '길잡이 개'의 지위(썰매 개의 우두머리)를 얻기 위한 본능에 굴복하여 싸우며, 지위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그럴수록 썰매를 끄는 노역에 충성을 다 합니다. 우울한 불안과 불만은 오로지 밤의 일입니다. 낮 동안은 '길잡이 개'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야수의 모습을 하고 노예로 살아가는 '벅'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삶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덫에 걸린 야생 동물, 이것이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말입니다.

"숲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불가사의하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매혹적인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닥불과 그 주위의 다져진 땅을 등지고 숲속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110).

자연에 자연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 세계에도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음을 봅니다. 문명과 도덕성으로 온갖 치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인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돈의 힘이든, 지위의 힘이든, 지식의 힘이든, 여전히 힘 쎈 놈에 의해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닙니까?

차갑게 얼어붙은 쓸쓸하고 고독한 땅, 잃어버린 금광이 비극으로 물들었을 때, '벅'은 썰매를 끄는 노역과 위대한 사랑에서도 벗어나 자신을 부르는 그 신비한 소리, 야성의 부름을 따라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저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원초적인 동경과 흥분이 가득한, 자기 됨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계로의 부름이었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나도 매일 밤, 삶에 대한 탄원과 생존의 고달픔 속에서, 나의 무능에 대한 좌절과 비애 속에서 나를 꺼내줄 어떤 부름, 그 야성의 부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나 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계로의 부름말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한 행위도 그 소리를 찾고자 하는 기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부름의 실체가 명확해지기까지 내가 할 일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야성의 부름>은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은 맹수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고 넌즈시 알려줍니다. 그 덕목이 의외였습니다. '인내심'이라니, 맹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인내심이야말로 가장 맹수다운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야생동물에게는 생명 그 자체처럼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인내심이 있었다. 바로 이런 인내심 덕분에 거미는 거미줄에서, 뱀은 똬리를 튼 채, 표범은 매복을 한 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 이 인내심은 특히 살아 있는 먹이를 사냥할 때 발휘된다"(142). 맹수의 인내심이야말로 공격 대상을 화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미쳐 날뛰게 할 수 있는 맹독과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이 무자비한 야수의 세계와 같이 느껴질 때일수록,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를!

이 무자비한 원시 세계를 그려낸 작가는 "인간의 진정한 소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이다"(155)라고 말했다는데, 사실 <야성의 부름>은 생존을 넘어서는 부름입니다. '벅'의 결말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내동댕이 쳐진 현실 속에서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야성의 부름을 따라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는 데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 무한한 자유가 사실 '벅'의 혈관 속에 흐르는 '야성의 본능'에 온전히 순응할 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벗어던질 때가 아니라, 부름을 따를 때, 다시 말해, 창조 질서를 온전히 따를 때 주어진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전율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나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 속에 만들어졌다는 저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주니까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영상으로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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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것이라 : 미디어와 음란물 편 디지털 세대를 위한 성경적 성교육 1
김지연 지음 / 두란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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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윤리와 도덕을 배제한 채

음란물 수준으로 전락한 성교육을 공교육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것은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혹은 성적 착취에 해당한다(27).

디지털 세대를 위한 성경적 성교육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인 다음 세대를 사탄이 어떻게 훔쳐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이기도 한 '동성애 이슈' 뒤에 숨은 사탄의 검은 속내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인권', '다양성의 인정', '존중과 배려', '자기 성적 결정권', '휴머니즘', '관용주의' 등 여러 프레임을 사용하여 그들이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과 악의 기준을 허무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할 때, 인간 사회가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를 우리는 매일 목격하고 있습니다. 달콤한 말들로 유혹하지만, 결국은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자(약사 김지연으로도 알려진)는 이 전쟁의 한복판에 '성혁명'의 쓰나미가 진격해 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글로벌 성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인간의 조기 '성애화"(36)라고 알려줍니다. 공교육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현재의 성교육이 오히려 "성에 중독되고 탐닉하게 만드는 조기 성애화"로 이끌고 있는 심각한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자녀의 성교육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세상은 우리 아이들을 데려가 '인권', '다양성', '자기 성적 결정권'의 이름으로 합의만 했다면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성관계를 해도 된다고 부추기며, 성별이 남자와 여자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며, 동성간 성행위를 당연시하고, 음란물을 보는 것은 사춘기 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믿게 만들 것입니다.

 

                             

자녀의 성교육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너는 내 것이라>는 이렇듯 공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교육의 실상과 모든 청소년들의 손안으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음란 문화가 우리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더구나 매순간 스파트폰으로도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러 내야 하는 많은 아이들이 "누군가가 이건 잘못된 것이니 회개하라"(155)고 일깨워 주길 호소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성혁명 앞에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성교육은 내 아이를 위해 누구보다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부모'가 가르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80억 인구 중, 내 자녀를 안아줄 한 사람은 바로 당신(부모)이라고 말입니다!

성혁명의 쓰나미 속에서 우리 아이를 어떻게 건져올릴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부모님의 진정한 사랑이 우리 아이를 지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매일 아이를 말 없이 10초만 안아주어도 아이들은 음란물과 싸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건강한 신체 접촉은 비정상적인 스킨십과 성관계가 난무하는 음란물과 싸울 힘을 준다"(182).

성경적 성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을 정죄하거나 정신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바른 분별과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이끄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가가고 싶도록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190).

"성교육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독으로 인해서 끊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혼과 육체에 음란물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거룩하고 건강한 활동들로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음란물 없이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게 해 주어야 한다. 삶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193).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교육의 목적이 음란물을 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음란물을 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청소만 하고 비워두면 언제든지 더 더러운 것들이 그 안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경고일 것입니다. 그러니 음란 충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말씀'을 먹여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독을 먹으면 독이 온 몸에 퍼지고, 물을 마시면 물이 온몸에 퍼지듯, 생명의 말씀을 먹을 때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세상의 많은 정보와 통계들이 성경적인 성가치관이 옳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57)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세상의 자료들도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성경적 성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부모의 무관심과 잘못된 우선순위, 그리고 게으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자녀를 지키기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모든 부모님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해드립니다. 자녀와 함께 이 책을 읽고 나누는 것도 성경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한 벙법일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모 세대부터 말씀 앞에 회개함으로 스마트폰, PC, 각종 미디어 앞에서 경건을 입증하는 거룩한 세대로 세워질 수 있다면 잃어버린 다음 세대를 되찾아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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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 - 엄마가 준 상처로부터 따뜻하게 나를 일으키는 감정 수업
이레지나(이남옥)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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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시작,

엄마를 찾아갑니다

심리학 도서를 왜 읽느냐고 물어보면, 항상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재단해버리기 쉬운데,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나를 '이해'하는 기쁨을 넘어, 내 안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경험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참 고맙고 놀라운 책입니다.

최근 위기청소년을 전문적으로 상담하는 곳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들 뒤에는 대부분 '불안'한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의 '불안'이 자녀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게 된 것이지요.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엄마의 중요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심리적 자원이 엄마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원인 모를 심리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나의 엄마'를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인 모를 분노와 두려움, 체념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더 이상 몰아세우지 않고, 온전하게 나 자신을 찾아서 내가 맺는 관계들이 평온하고 굳건해지는 방향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엄마'를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엄마와의 상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꺠닫고, 엄마와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와 깊이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13).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애착'의 관점에서 엄마와 나와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저는 불안정 애착 중, '양가적 저항 애착'에 가까워 보입니다. '양가적 저향 애착'은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이 아이가 필요할 때가 아니라, 엄마가 내킬 때 줄 때 발생합니다. 엄마의 마음이 내킬 때, 엄마의 상황이 될 때 사랑을 주면, 자녀의 마음에 결핍이 생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크게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2남 2녀 중 둘째로 자란 저에게는 차별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엄마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늘 오빠를 향해 있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마다 제가 장남의 역할을 할 때가 많지만, 그럴 때에도 저에 대한 고마운 마음보다는 늘 오빠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커서 칭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결혼 후에도 오빠는 여전히 퍼주어야 하는 자식이지만, 저에게는 무엇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십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무엇을 해줄 때 기뻐하시면서, 저에게는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는 모습을 볼 때, 한번씩 서러움이 폭발하곤 합니다.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부모님의 차별이 자녀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차별은 '모두에게'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미분화된 과한 사랑이 사랑을 덜 받은 것보다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146)라는 설명을 오래 곱씹어 보았습니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적인 오빠를 보며, 엄마의 차별적인 사랑이 어쩌면 오빠 인생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그것도 안타까워지더라고요.

엄마가 저를 미워하거나 방치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양가적 저항 애착'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2남 2녀를 키우며 살아온 엄마에게 저는 무엇을 졸라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우선순위에서 제가 꼴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뗴를 써도 소용 없다고 일찌감치 단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나를 새롭게 이해하는 엄마와의 대화" 편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을 바꾸어 보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 없었구나. 난 참 사랑을 못 받았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부모는 나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었구나"(130)라는 부정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억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부모와의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볼 것을 권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늘 서러운 기억만 곱씹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노트를 펴고 부모님과의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열심히 생각을 해보니, 엄마가 저에게 첫 성경책을 선물하시며 "사랑하는 큰딸에게"라고 써주셨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아빠가 퇴근하시면서 저에게만 예쁜 머리핀을 사다주셨던 기억도, 상장을 받아왔을 때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자랑을 하셨던 날도 기억났습니다.

나에게 주는

특별한 예언

그리고 이렇게 따뜻한 기억을 적어내려가다 알았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저는 부모님께 무엇을 잘 요구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늘 부모님이 알아서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제 욕구를 표현하는 일에 참 서툴다는 것도요. 엄마는 지금도 오빠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나르십니다. 저는 그런 엄마에게 한번씩 외식을 시켜드리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이제는 저도 한번씩 무엇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해봐야겠습니다.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부모가 싶어 놓은 말이 아닌, 나를 위한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150)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엄마, 아빠가 준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좋은 것들도 숨어 있다고 알려주며 그것을 발견해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내 안에 있는 책임감의 뿌리, 시를 좋아하는 마음, 식물을 키우는 습관, 예절, 까다롭지 않은 식성,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 그리고 평생 그리지 않아도 되는 짙은 눈썹, 숱이 많은 머리 등등 좋은 것을 많이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은 자녀를 사랑으로 지켜보면서 한 인간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게끔 지원해주는 엄마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연약하고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울음을 토해내던 사람들에게 부와 명예는 얼마나 무력하던지요"(59).

이 책을 읽으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나는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고 생각해 움츠려 있던 마음이 조금은 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 하듯 따뜻한 애정 표현은 안 하셨지만, 그보다는 늘 존중해주셨다는 것도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상담은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이라"(160)고 말합니다. 상담은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가해자도, 절대적인 피해자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며"(27), 내 안에 숨어 있는 은혜를 일깨워 스스로를 '은혜받은 자'로 인식하게 하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상처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덕분에 마음이 힘을 얻었고요. 우리 안에는 부정적인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공존합니다. 부정적인 기억이 더 많다고 해도 내가 행복한 기억에게 먹이를 더 많이 주면, 작은 행복이 더 크고 강한 상처를 이길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상처를 대면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분도 있겠지만, 따뜻하게 잘 읽히는 책입니다. 나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기 원하는 본들에게 추천합니다.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내 몸처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많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고, 그럴 만한 힘을 가진 강력한 존재입니다"(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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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 - 예수님이 왕이신 가정의 비밀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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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서야 제가 얼마나 준비 없이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저는 참 문제가 많은 남편과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고 인정하기 싫었습니다"(7).

'위기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소위 '문제아'들을 만날 때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믿는 분'들이라 교회가 싫고, 예수님이 싫고, 부모가 더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을 볼 때마다, '아, 그 가정은 내가 아버지이고 남편인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상관이 없구나. 내가 어머니이고 아내인 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별개인가 보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 복음 외에는 이 병든 가정, 상처난 관계를 치유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은 왜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가정을 회복시키고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과의 24시간 동행하는 영성일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유기성 목사님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이 가정이고 부부사이"(9)라고 단언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490번이나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수의 곱이므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숫자적으로만 계산해서 490번이라 할지라도 "490번씩이나 계속 용서할 인간관계"는 바로 "부부 관계"라는 것입니다(113-114). 이 말씀을 가만 곱씹어 보면, 나의 민낯, 신앙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정이야말로 '십자가' 없이는 제대로 세워질 수 없겠구나 하는 사실이 날카롭게 깨달아집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가정을 살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십자가와 만나면 고백하게 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우리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위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하는 고백이 왜 우리 가정을 살릴까요?

내 주관, 내 소원, 내 고집이,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고, 누구보다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의 교훈과 훈계"가 아니라, 자신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열심을 내기 때문에 오히여 자녀를 망치기 쉽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남편을 변화시키고 하기 때문에 남편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오히려 너무 노력해서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입니다. "왜 주님이 우리 가정에는 역사하시지 않는지 궁금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20-21).

그러니 우리 가정이 십자가에서 살아나려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 변화시켜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주님, 저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저를 통해서 역사하세요"라고 말입니다.

 

 

                             

"싸우기까지 할 정도로 무던히 노력했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비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31).

<십자가로 살아난 가정>의 두 번째 회복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고집대로 가정 문제가 풀리지 않을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충분히 머무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니까 주님이 우리 가정 안에 새로워지는 역사를 이루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주님의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렇게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질 때, 주님이 밀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말하기도 하고 행동하기도 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그때가서야 주님 앞에 울고불고 떼를 쓰며 왜 가정을 변화시켜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는 우리 모습이 그려져 뜨끔했습니다. "행복을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입니다"(37).

<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이 제개 준 가장 큰 충격은 우리가 "너무 노력을 해서" 가정이 불화하고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잘해보자고 열심을 낸 것 때문에 오히려 삶 전체가 뒤틀리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더 이상 인간적인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각오해야 합니다"(101)라고 권면합니다. 노력할수록 지치기만 하고, 원망만 더 생기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는 십자가 복음이 주는 평안과 자유함을 다시 한번 뜨겁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내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한 몸이니, 내 생각과 열심과 계획을 다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사는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가족을 변화시켜고 노력하지 말고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101).

믿음은 오히려 노력하지 않고,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완전히 맡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말씀을 살아내는 순종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십자가에서 살아난 가정>은 복음이 '나'를 구언해주신 그 은혜의 원리가 우리 가정 가운데도 그대로 작동될 수 있으며,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이 책의 에필로그를 쓰신 박리부가 사모님은 "이 책의 제목은 십자가를 만나고, 그 복음으로 가정이 살아난 가정들의 문패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행복이요, 복음의 위대함이요, 가정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멋진 고백이 모든 믿는 가정들에 고백되어지면 좋겠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이 다 지나기 전에, 모든 믿음의 가정이 이 책을 함께 읽고 기도할 수 있다면,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귀에게 통쾌한 한방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너진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든 교회에 뜨겁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해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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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과의 대화
이시형.박상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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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 한 송이에도 전 우주의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비를 맞고 뜨거운 자외선과 구름이 지나가고 바람에 흔들리며, 밤에는 차가운 이슬이 내리고……. 하찮은 꽃 한 송이도 이렇듯 전 우주가 참여한 위대한 존재입니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우주적 존재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34).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독자들에게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빠르게, 더 쉽게, 더 깊이 와닿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제가 사명을 찾아갔던 과정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의미치료'와 참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는 한마디로 '어느 때건' 모든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삶이 의미는 무엇인가>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일깨우는 바는 이것입니다. 모든 의미를 잃고 내 인생은 끝장났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지독한 역경, 그 힘겨운 시련 속에서 오히려는 내 삶의 의미가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속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창조주의 손길로 빚어진 나에게도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 내게 생명이 있는 한 살면서 나만이 실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답은 나의 고난, 내가 경험한 바로 그 시련 속에 내 삶의 의미, 나의 사명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삶의 의미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151)라고 말하는 의미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너는 꿈이 뭐니?", "무엇이 되고 싶니?"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꿈을 꾸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그 꿈이 좌절되는 순간을 고난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삶의 아이러니는 바로 나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바로 그 역설을 다시 깨닫고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의미치료'가 가진 믿음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발견되어 실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 물음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가도록 돕습니다.

1.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나?

2. 나의 일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디 있는가?

3. 그 누군가, 무언가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의미치료의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독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돕는 상담가가 되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울수록 역경에 처할수록 행복은 참으로 하찮은 일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풍요로워지면 당연 심리에 빠져 감사를 모르는 저절의 품성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아, 내가 고난 가운데 더 많은 감사를 배웠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귀뚜라미 소리에 잠을 잊은 채 밤을 지새는" 섬세한 감성이 오히려 시련을 견디는 강력한 힘이 되어준다(57)는 사실도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슴 뭉클했던 이야기는 '실험실에서 자란 보리' 이야기였습니다(260-261).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사방 30센티미터의 나무통에 보리를 한 톨 심었는데, 보리 몇 알이 겨우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통을 깨고 보리의 뿌리 길이를 재봤더니 서울과 부산을 열네 번이나 오갈 수 있을 만큼 길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리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 보리는 기어코 열매를 맺으려고 잔뿌리를 구석구석 내려서 수분과 영향분을 최대한 흡수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어진 여견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죠. 그런데 누가 그 보리를 보고 "야, 너는 왜 이렇게 형편없냐?"는 소리를 할 수 있겠어요?"(261).

이 이야기를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전도자라도 된 듯,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 실험실의 보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위대함이란 많은 열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 삶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알기를 원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향해서도 함부로 '비루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상미 선생님이 계속 강조하는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 말이 주는 깊은 울림이 내가 가진 강함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 16:6)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절망에서 건져올려주는 책입니다. 특별히 꿈이 부서져버려 고통스러운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때가 바로 진정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라는 사실에 눈 뜨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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