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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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느냐, 굴복하느냐, 둘 중 하나였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야생의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비는 두려움으로 오해를 받게 되고 그런 오해는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 죽느냐 죽이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싸움의 법칙이었다. 그는 아늑히 먼 원시 시대에서 내려온 이 명령에 복종했다"(109).

<야성의 부름>은 남부의 따뜻한 햇볕을 쬐며 여유로운 귀족 생활을 해왔던 '벅'이라는 개가, 그 집 정원사의 조수이자 도박꾼이었던 '매뉴얼'에 의해 아무도 몰래 얼어붙은 북쪽 땅으로 팔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금광의 발견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북쪽 땅으로 몰려들면서, 사람들에게는 썰매를 끌 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던 문명의 중심지에서 갑자기 원시 세계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벅'에게는, 분노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할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면을 벗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평화도 없고, 휴식도 없고, 무엇으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원시 세계에는 오직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만이 존재했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벅은 자신 안에 숨은 교활한 본성을 깨우며 냉혹한 현실에 맞서야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투쟁이 아니라, 순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시의 노래가 벅의 몸속으로 파도처럼 흘러들며 불과 집이 있는 문명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시적 본성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그 야수의 모습을 진보라 불러야 할지, 퇴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작가는 '벅'이 문명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시의 세계로 들어선 증거로 도덕성의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폭력적인 힘과 도둑질과 같은 교활함이지, 죄책감과 같은 도덕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덕적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할수록 '벅'은 더 위험한 존재, 즉 야생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성의 부름>은 대-자연의 위엄 속에 그곳을 지배하는 한마리의 '유령 개'로 깨어나 포효하는 '벅'의 전설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문명'이라는 허울 속에 감추어진 인간 사회의 야만을 폭노하는 고발 소설로도 읽힙니다. '벅'은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원시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빠르게 터득하며 교활한 야만의 본성으로 자신을 채우면서도, '길잡이 개'의 지위(썰매 개의 우두머리)를 얻기 위한 본능에 굴복하여 싸우며, 지위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그럴수록 썰매를 끄는 노역에 충성을 다 합니다. 우울한 불안과 불만은 오로지 밤의 일입니다. 낮 동안은 '길잡이 개'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야수의 모습을 하고 노예로 살아가는 '벅'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삶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덫에 걸린 야생 동물, 이것이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말입니다.

"숲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불가사의하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매혹적인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닥불과 그 주위의 다져진 땅을 등지고 숲속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110).

자연에 자연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 세계에도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음을 봅니다. 문명과 도덕성으로 온갖 치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인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돈의 힘이든, 지위의 힘이든, 지식의 힘이든, 여전히 힘 쎈 놈에 의해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닙니까?

차갑게 얼어붙은 쓸쓸하고 고독한 땅, 잃어버린 금광이 비극으로 물들었을 때, '벅'은 썰매를 끄는 노역과 위대한 사랑에서도 벗어나 자신을 부르는 그 신비한 소리, 야성의 부름을 따라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저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원초적인 동경과 흥분이 가득한, 자기 됨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계로의 부름이었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나도 매일 밤, 삶에 대한 탄원과 생존의 고달픔 속에서, 나의 무능에 대한 좌절과 비애 속에서 나를 꺼내줄 어떤 부름, 그 야성의 부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나 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계로의 부름말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한 행위도 그 소리를 찾고자 하는 기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부름의 실체가 명확해지기까지 내가 할 일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야성의 부름>은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은 맹수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고 넌즈시 알려줍니다. 그 덕목이 의외였습니다. '인내심'이라니, 맹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인내심이야말로 가장 맹수다운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야생동물에게는 생명 그 자체처럼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인내심이 있었다. 바로 이런 인내심 덕분에 거미는 거미줄에서, 뱀은 똬리를 튼 채, 표범은 매복을 한 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 이 인내심은 특히 살아 있는 먹이를 사냥할 때 발휘된다"(142). 맹수의 인내심이야말로 공격 대상을 화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미쳐 날뛰게 할 수 있는 맹독과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이 무자비한 야수의 세계와 같이 느껴질 때일수록,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를!

이 무자비한 원시 세계를 그려낸 작가는 "인간의 진정한 소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이다"(155)라고 말했다는데, 사실 <야성의 부름>은 생존을 넘어서는 부름입니다. '벅'의 결말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내동댕이 쳐진 현실 속에서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야성의 부름을 따라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는 데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 무한한 자유가 사실 '벅'의 혈관 속에 흐르는 '야성의 본능'에 온전히 순응할 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벗어던질 때가 아니라, 부름을 따를 때, 다시 말해, 창조 질서를 온전히 따를 때 주어진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전율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나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 속에 만들어졌다는 저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주니까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영상으로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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