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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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가룟 유다야"(63).

<유다>는 유다의 이야기이자 유대인의 이야기이며, 배신자의 이야기이자 희생자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자 민족의 이야기이며, 집의 이야기이자 땅의 이야기이며, 구원의 이야기이자 전쟁의 이야기이며, 동거의 이야기이자 독립의 이야기이며, 현재의 이야기이자 과거의 이야기이요 과거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절망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제목인 <유다>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가룟'인 유다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유대 민족 전체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다'라고 쓰고 '배신자'라고 읽지요.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와 동의어이면서, 유대인이라는 말과도 동의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기독교인 대중의 상상 속에서, 유대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각인된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가룟 유다였다"(284). 모든 나라와 모든 세대를 아울러 교활하고, 역겨운, 혐오스러운 인물로 여겨지는 배신자 <유다>는 전체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세대의 배신자로 낙인 찍힌 유다여, 그대는 누구를 배신자라 부르는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103).

유대 땅은 '사이 땅', '트라이앵글 지역'이라고도 불립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 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유대 땅을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국가를 원했고, 독립을 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땅은 학살과 추방과 증오와 혐오와 보복과 죽음이 가득한 땅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피를 강처럼 흐르게 했어요. 한 세대를 전부 희생시켰어요. 아랍인들 수십만 명을 자기들 집에서 내쫓았어요. 히틀러를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온 배를 항구에서 곧장 전쟁터로 보냈어요. 이 모든 일이 여기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지 보세요"(274).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둘 중에 하나만 살아남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두 민족이 피 흘리는 전쟁으로 빠르게 전력 질주하기 전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이 있었답니다. 이 책에서는 그를 '아브라바넬'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는 보편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지요. 그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상대방을 오해하던 것만 풀면 사랑할 수 있다는 꿈을 꾼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두 공동체가 살아갈 충분한 공간이 있으며, 그렇게 나란히 또는 하나 안에 다른 국가라는 틀 없이 공존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혼합된 공동체. 아니면 다른 하나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는 두 공동체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거예요"(278).

그러나 유대인도 사랑하고 아랍인도 사랑한다는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인 친구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신자였으니까요.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했지만, 예수와 같은 꿈을 꾸지 않는 그의 제자들이 배신자 <유다>(가룟 유다와 유대 민족 전체)를 증오했듯이, 유대인의 원수를 사랑한 '아브라바넬'은 수치스럽게 추방당하고 미움 받고 비방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이 책의 저자 '아모스 오즈'도 "줄곧 '두 국가 해결책'을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애썼"으나,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주장했기에 이스라엘 안팎에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하니, '아브라바넬'은 작가 자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 유대인들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 하나와 아랍인들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 하나가 생겼을 뿐이에요. 이제부터 아랍인들은 날마다 패배자가 당하는 재앙을 살아야 하고 유대인들은 밤마다 보복을 당할까 봐 떨며 살아야 해요"(278).

<유다>는 고장 난 기계식 인형처럼 쉴 새 없이 연설하고 연설하는 노인(발드), 모든 남성을 혐오하며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여인(아탈리야),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슈무엘), 이 세 사람의 기이한 동거를 통해, 시온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의와 복수의 전쟁을 선택한 그 땅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자신을 잃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그곳에는 과부와 장애인만 남았습니다. 남성을 혐오하는 과부와 아들을 잃고 비탄에 젖은 노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아랍인'도' 사랑한 죄로 '아브라바넬'을 추방한 자들은 그 대가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은총(아브라바넬)이 죽었고, 자비(발드의 아들이며, 이탈리야의 남편이었던 미카)가 살해되었으니, 이제 집(세상)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무덤처럼 절망과 슬픔,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 '배신자 아브라바넬'의 유령이 떠돌고 있을 뿐이죠. <유다> 전체에 '아브라바넬'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 안에 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인정할 수 없고 변화가 생기는 것을 죽을 만큼 무서워하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사람들 눈에 언제나 배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요"(374).

기독교인에게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에게 유다는 누구일까요? <유다>는 유대인들조차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부끄러워하고, 부인했던 유다의 유령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지난 여든 세대 동안 증오심과 혐오감을 강물처럼 흐르게 했던 그 유다에 관한 기억을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진짜 배신자인지 다시 묻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이렇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진짜 배신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나 권력을 탐내고, 종교 권력으로 피 흘리는 자가 되었던 그의 다른 제자들인가, 예수가 죽었을 때 함께 죽었던 유일한 제자 유다인가? 가룟 유다에 관한 저자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유다>는 가룟 유다를 이렇게 재해석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독교인, 한 순간도 예수를 떠나지 않고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기독교인, 끝까지 예수가 온 예루살렘 앞에서 그리고 온 세계 앞에서 틀림없이 일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리라 믿었던 기독교인,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가 떠난 이후에 더 살려고 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죽었을 때 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유일한 사람,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이 다섯 대륙에 사는 수억 명의 사람들의 눈에는 수천 년에 걸쳐 가장 전형적인 유대인이라고 간주되었다. 가장 혐오하고 가장 경멸하는 사람, 배신의 화신이며 유대교의 화신이고 유대교와 배반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보여 주는 화신이었다"(284-285).

어떤 영화에서였는지, 한 유대인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여, 다음 번엔 다른 민족을 택하소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에 지쳤다고 호소합니다. <유다>에서는 이런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천 년에 한 번은 우리의 죽음이 의미가 있을지도"(268). 그러나 <유다>의 저자 아모스 오즈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과 아랍인이 상대방을 오해했던 것만 풀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형제니까요! 그러나 <유다>는 조용한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회복의 이름으로, 피를 물처럼 흘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는 듯 합니다. 서정시를 쓰는 것은 여전히 야만이라고요. 복수에 목마른 채로 새로운 시 한 편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일은, 헛일이라고 말입니다.

<유다>는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과제처럼 보이는 많은 질문을 남겨놓지요. 유대인과 아랍인이 우정을 쌓을 수 있을까요? 아무도 쫓아내지 않고 부당한 일은 전혀 저지르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요? 왜 종교는 우리를 구하러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쏟게 만들까요? 사랑하기 위해 죄로 물든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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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통과한 용기 - 길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
러셀 무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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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에게서 우리는 승리를 통한 용기가 아닌 십자가를 통한 용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33).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를 읽으며 '믿음의 다른 이름이 용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왜 우리에게 익숙한 믿음이라는 개념 대신 용기라는 개념을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에 대해, 그리고 용기가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그 두려움에 맞서 결국 승리를 쟁취해 내는 것을 용기 혹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두려움의 한복판에서 다시 일어서 길을 찾는 것인데, 그 용기는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지고 무너지는 십자가를 통과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러셀 무어 목사님은 우리가 알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여 이것을 탁월하게 설명해줍니다. 이 책의 표현대로 하면, 그 용기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담대함하고 당당한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야에서 헤매던' 낙심과 비관과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더 잘 설명되어집니다. "엘리야의 용기는 불의 힘으로 아합을 제합하는 상황보다 오히려 아합에게 쫓길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36).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가장 갈망하는 사역자의 모습은 아마도 갈멜산에 선 엘리야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세상 한복판에서 거짓된 우상의 세력에 맞서며, 확실한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강함을 원했습니다. 그런 '선지자적'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증명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엘리야를 광야로 보내셔서 엘리야의 마음속에 있는 바알을 제거하실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자기 이야기의 중심에서 끌어내고 계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과 나를 위해서도 해주시는 일이다"(281). 승리에 대한 우리의 바람 속에는 '하나님의 선지자적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었구나' 하는 것이 벼락처럼 깨달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극도로 열심' 싸우는 것보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더 큰 용기, 더 큰 믿음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용기를 드러내야 할 순간은, 절대 다수인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기 위해 갈멜산에 서야 할 때가 아니라, 외로움과 낙심과 피로가 극에 달해 몰락 직전까지 약해져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던 광야에서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선다'는 것은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거나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로 적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더 큰 힘과 지혜로 세상의 지혜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이끌려갈 때 찾아온다(요 21:18).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설 용기를 어떻게 얻게 되는지 분명히 알려 준다. 일어설 용기는 곧 십자가에 달릴 용기에서 시작된다"(37).

"우리는 성경이 밝혀 주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것은 따분해하고, 영원의 관점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열을 올린다. 왜일까? 세상이 인정해주는 종류의 힘에 열광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82).

우리는 보통 고난의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의 영광도 있다고 설교해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한 후' 맛볼 빛나는 영광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러셀 무어 목사님은 십자가야말로 빛나는 영광 자체라고 선포합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를 통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회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함께'하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에 사역자로서 저는 사역을 할 때마다 '팀'이 조직되기를 원했고, 한 성령 안에서 한 뜻을 품은 팀을 갈망해왔습니다. 그런데 러셀 무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 칠천 명'의 무리 속에 엘리야를 두지 않으신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무리에 맞선 '외톨이'로 두신 것처럼, 저에게도 그것을 명하신다면 기꺼이 외로워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깨달아졌을 때,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던 갈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용기라고 착각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용기를 갈망하는 것은,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보호본능의 작동 가운데, 삶의 중심이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에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모든 두려움과 의심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나의 이야기에서 빠져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끝을 알지 못해도 기꺼이 광야 속으로 들어갈 용기, 일어설 용기, 무너질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용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세상 가운데로 흩어질 때매대, "한주간도 승리합시다"라는 인사를 많이 했었는데,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우리가 많은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승리에 대해 오해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 깊은 통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읽고 치워두는 책이 아니라, 꼭 곱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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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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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기습이 있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딸을 잃은 '딸'이 아버지를 잃었던 '아버지'에게 '가는' 이야기입니다. 딸을 잃고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살았던 '딸'이 다시 고향집을 찾은 것은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을 듣고 딸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잃었던 것이 열네 살 때라는 것을 기억해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며 부모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았던 딸은 으깨진 마음으로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격변의 시대에 겨우 목숨만 살아남았던 '아버지'를 살펴보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제게는 딸을 잃고 누구도 옆에 오지 못하게 했던 이 딸이, 표절로 작가의 생명을 잃은 '신경숙'으로 읽힙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으깨진 마음으로 다시 고향 집을 찾은 이 딸이, 자신을 작가로 키워준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아간 작가 '신경숙'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막막한 시간들을 밀어낼 힘을 얻었던 것일까요. 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일까요. 6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었던 작가가 다시 내놓은 이 책을 읽는 일은, 제겐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그녀의 흔적 찾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작가로서는 죽은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살아야 했던, 그래서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모진 시간들의 흔적말입니다.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322).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자식들의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 허름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식에는 더는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를 우리는 쉽게 잊고 살기 때문이지요. 마치 "버리지도 없애지도 누구에게 준 적도 부숴버린 적이 없어도 어느 시간 속에서 놓치고 나면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희미해지는"(20) 어떤 물건처럼말입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했던 '엄마' 이야기와는 달리, 이번엔 아예 잃어버리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찾아나섰다고나 할까요.

아버지 곁으로 간 딸은, 지금의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던 아버지,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싶은 젊은 아버지의 아련한 삶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라고 하는 늙은 아버지의 무심한 삶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고 찬란한 것인가를 되새깁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허름한 아버지, 모든 익명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통속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냈을 뿐이야"라고 하는 무심한 말들이, 무너지려는 나의 시간들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작가 신경숙의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을 때, 내가 울었던가. 기억이 희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으며, 나는 울었습니다. 간첩으로 오해 받은 둘째 아들을 데리온 아버지가 아들을 변호하는 대목에서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내가 둘째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말 없는 아버지가 자식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다 들여다 보면서도 해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또 얼마나 애가 닳고 속이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제 속도 아팠습니다.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딸은 잃은 이 딸은 왜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아버지, 나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 품에 한 번도 안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 품 안으로 파고들만도 한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고통 가운데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요. 피투성이라도 살아내는 힘, 부서지는 고통을 견뎌내는 힘은, 살아 있는 고통 속에서만,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걸, 다시 되새겨봅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제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신경숙 작가에게 내가 당신의 아버지는 될 수 없어도, 당신의 동생처럼, 조카처럼,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독자는 되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책 덕분에 나도 한 시절을 잘 지내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을 지키고자 서로를 찌르는 무기가 아니라,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자녀의 죄 짐을 대신 지고자 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 서로를 들여다 봐주고, 품어주는 그런 이야기라고. 당신이 말한 대로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312). 그러니 당신도 계속해서 살아가라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삶이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숨을 받은 자의 임무이기도 하다는 것. 그 곁에 읽는 것과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있기도 하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423).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아버지에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아버지. 그러나 인류의 모든 아버지는 사랑할 수 있어도, 나의 아버지는 사랑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라고 했던가요. 그저 아버지 옆에 앉아 TV라도 같이 보고, 함께 볕도 쬐고, 밥도 먹고, 내 얘기도 하고, 아버지 얘기도 좀 들어주는, 그런 사랑이면 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현실에서는 그것 하나가 잘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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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챙김 - 1년 52주 하루 15분, 한 줄 성경의 힘
킴벌리 D. 무어 지음, 나수아 옮김 / 아이템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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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1)

"우리는 신명기 28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 즉 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선택권을 주십니다"(73). 하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성경>을 주시며 두 가지 선택권을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읽고 따르는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따라, <성경>은 우리에게 복과 저주의 갈림길이 될 것입니다.

<말씀챙김>은 1년 52주를 단위로, 매일 하루 15씩 말씀을 챙겨 읽도록 인도합니다. 이 책의 인도를 따라가면, 1년에 성경을 1독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신이 누구의 꾀를 따르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의 꾀나, 세상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지식을 따라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고 싶은 이들은 오늘도 성경을 펼쳐 읽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챙김>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책입니다. 매일 자진하여 복을 받을 자리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지요. <말씀챙김>은 그것이 매일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캐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항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민 6:24-26)

<말씀챙김>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생긴 습관은 말씀에서 복된 구절을 발견할 때마다, 그 구절에 약속된 하나님의 복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하도록 멈춰서서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챙김>은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약속의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선포해 보라고 조언합니다. "자녀가 등교하러 집을 나설 때, 이 축복의 말씀을 선언해 보세요. 배우자가 출근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이 말씀으로 축복하고 보내 주시고요"(54). <말씀챙김>의 저자 킴벌리 D. 무어 목사님은 "이런 축복 기도는 제 삶을 너무나 아름답고 의미 있게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삶에 선포된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54)라고 감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이 참 즐겁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여성'이 아니라, 길을 닦는 여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변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합니다.

당신은 무력하지도, 역량이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굳세고 강한 승리자이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64).

<말씀챙김>은 슬로브핫의 딸들을 묵상하며 이런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특별히 "개스턴 카운티 침례 교단에 속한 첫 번째 여상 목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킴벌리 D. 무어 목사님은 <말씀챙김>을 통해 여성 목회자들을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은 처한 위치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개척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입니다.

<말씀챙김>은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선물하고 싶은 책 헌정 1위, 신약성경 성경 공부 1위, 기독교 성경 공부 가이드 1위)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책이라고 할까요.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으면서도, 삶 속에서 말씀을 따르게 하는 강함이 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읽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누가 가장 소중한 사람인지 분별하기를 원한다면 <말씀챙김>과 함께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특별히 스스로 축복보다 저주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챙김>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챙김>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은혜, 잊고 있는 은혜를 다시 기억나게 해주며, 희미했던 것들이, 오해해왔던 것들이, 혼란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되는 은혜를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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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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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사랑과 상실의 문제이다. 김승옥 소설의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대상을 이미 상실했거나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며, 혹은 곧 상실할 예정이다"(460).

"한국 작가들의 스승이자 한국 문단의 거목"이라고 평가되는 김승옥 소설 속에서 왜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은 사랑하는 대상을 이미 상실했거나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며, 혹은 곧 상실할 예정"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이 책에 수록된 12편의 작품을 다시 음미해보니, 김승옥, 그는 시대를 슬퍼했던 작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김승옥의 모든 중단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소설 1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두 작품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1960년대에 쓰여졌으며,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등장인물들의 삶은 여전히 전쟁 때처럼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기 위해 자기 생명을 쓰지만 그렇게 생명을 쓰다 곧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모순처럼,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운명에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저항을 해보지만, 그 소중한 것을 내어준 덕에 결국 타락하고 마는 나약한 인간의 삶의 현주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간히 성실하게 사는 척하지?"(174)

살아남기 위한 대응전략이었을까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배신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그처럼 허깨비로 보였던 것은, 그가 생각했던 '고결함'을 팔아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6.25 사변으로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 나는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처박혀졌고 의용군의 징발도 그 후의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버리고 있었었다. 내가 졸업한 무진의 중학교의 상급반 학생들이 무명지에 붕대를 감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을 부르며 읍 광장에 서 있는 트럭들로 행진해가서 그 트럭들에 올라타고 일선으로 떠날 때도 나는 골방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행진이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 나는 무진의 골방 속에 숨어 있었다. 모두가 나의 홀어머님 때문이었다.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나는 내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14). 그는 무엇을 배신했던 것일까요? 자신의 양심? 조국? 참전용사?

<생명연습>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팝니다. '형'에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내를 하나 데리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생선 장수를 시작하기 전으로, 바느질로써 용돈을 벌었고 남아 있던 살림살이를 하나씩 팔아서 살고 있었을 때였다. … 그날 나와 누나는 공포에 차서 덜덜 떨며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말았다. 중학교에 다니던 형도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그대로 새우고 있는 눈치였다. 다음 날 형은 학교엘 가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망 후에 어머니가 맞아들인 최초의 사내였다"(65-66).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사내'는 급성 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월부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 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93)

시대(환경)에 훼손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삶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인지, 우리가 삶을 배신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훼손되는 인간의 타락이 이 단편집 속에는 사람들이 '비윤리적 행위'라고 부르는 다양한 성적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주로 폭력적인 형태로 말이지요. "더구나 짓궃은 장난인 듯이 가장하고 있는 사내들의 그 행위 속에는 대낮의 생활로부터, 이 도시로부터, 자기의 예정된 생활로부터, 자기가 싫증이 날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보고 싶은 욕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현주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110). <야행> 속 현주는 그것이 도망해보고 싶은 욕구라고 했지만, 절망감으로부터의 도피, 자기혐오의 몸부림이 또다른 약자를 강탈하고 훼손한다면, 2021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야비한 '개새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432).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밤낮 없이 일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에 꽤 낙심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여전히 찬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속 '영이'처럼 불안한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환멸이라는 것을 이 책이 다시 확인해줍니다. "그때 멋지게 차린 사내가 여자 앞으로 다가온다. 슬퍼 보이는군요 하고 사내가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정말 자기는 지금 슬프다고 느낀다. 따뜻한 곳으로 가시죠 하고 사내가 말한다. 울림이 있어서 신뢰하고 싶은 목소리. 여자는 조금은 불안해하며 사내를 따라 걷는다. 여자와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292)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vs. "나는 무엇을 신음하고 있을까?"

1960년대를 뜨거운 청춘으로, 또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살아낸 작가가 그의 작품을 통해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이 둘 중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 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 넣고 눈을 슬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을 자리만 찾아다닌다.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431). 여전히 우리 삶은 작가의 이 통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수치와 환멸과 야비함과 적의와 배신과 도피로 가득 차 있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한국 문단의 한 거목은 사랑의 부재를 독자들이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데도, 어째서 그가 사랑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짐승 같은 삶을 보라, 사랑은 없다고 조롱하는 작가의 절망이 사실은 사랑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말이지요.

대한민국은 지금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전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삶을 즐기라고 손짓합니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필요 이상의 음식과 필요 이상의 교미? 우리가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 그 운명의 굴레 속에서 여전히 훼손 당하고 있고, 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 삶의 현주소인 이 시대를 여전히 슬퍼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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