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는 기습이 있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딸을 잃은 '딸'이 아버지를 잃었던 '아버지'에게 '가는' 이야기입니다. 딸을 잃고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살았던 '딸'이 다시 고향집을 찾은 것은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을 듣고 딸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잃었던 것이 열네 살 때라는 것을 기억해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며 부모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았던 딸은 으깨진 마음으로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격변의 시대에 겨우 목숨만 살아남았던 '아버지'를 살펴보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제게는 딸을 잃고 누구도 옆에 오지 못하게 했던 이 딸이, 표절로 작가의 생명을 잃은 '신경숙'으로 읽힙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으깨진 마음으로 다시 고향 집을 찾은 이 딸이, 자신을 작가로 키워준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아간 작가 '신경숙'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막막한 시간들을 밀어낼 힘을 얻었던 것일까요. 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일까요. 6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었던 작가가 다시 내놓은 이 책을 읽는 일은, 제겐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그녀의 흔적 찾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작가로서는 죽은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살아야 했던, 그래서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모진 시간들의 흔적말입니다.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322).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자식들의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 허름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식에는 더는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를 우리는 쉽게 잊고 살기 때문이지요. 마치 "버리지도 없애지도 누구에게 준 적도 부숴버린 적이 없어도 어느 시간 속에서 놓치고 나면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희미해지는"(20) 어떤 물건처럼말입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했던 '엄마' 이야기와는 달리, 이번엔 아예 잃어버리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찾아나섰다고나 할까요.

아버지 곁으로 간 딸은, 지금의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던 아버지,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싶은 젊은 아버지의 아련한 삶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라고 하는 늙은 아버지의 무심한 삶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고 찬란한 것인가를 되새깁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허름한 아버지, 모든 익명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통속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냈을 뿐이야"라고 하는 무심한 말들이, 무너지려는 나의 시간들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작가 신경숙의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을 때, 내가 울었던가. 기억이 희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으며, 나는 울었습니다. 간첩으로 오해 받은 둘째 아들을 데리온 아버지가 아들을 변호하는 대목에서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내가 둘째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말 없는 아버지가 자식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다 들여다 보면서도 해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또 얼마나 애가 닳고 속이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제 속도 아팠습니다.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딸은 잃은 이 딸은 왜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아버지, 나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 품에 한 번도 안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 품 안으로 파고들만도 한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고통 가운데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요. 피투성이라도 살아내는 힘, 부서지는 고통을 견뎌내는 힘은, 살아 있는 고통 속에서만,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걸, 다시 되새겨봅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제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신경숙 작가에게 내가 당신의 아버지는 될 수 없어도, 당신의 동생처럼, 조카처럼,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독자는 되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책 덕분에 나도 한 시절을 잘 지내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을 지키고자 서로를 찌르는 무기가 아니라,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자녀의 죄 짐을 대신 지고자 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 서로를 들여다 봐주고, 품어주는 그런 이야기라고. 당신이 말한 대로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312). 그러니 당신도 계속해서 살아가라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삶이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숨을 받은 자의 임무이기도 하다는 것. 그 곁에 읽는 것과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있기도 하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423).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아버지에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아버지. 그러나 인류의 모든 아버지는 사랑할 수 있어도, 나의 아버지는 사랑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라고 했던가요. 그저 아버지 옆에 앉아 TV라도 같이 보고, 함께 볕도 쬐고, 밥도 먹고, 내 얘기도 하고, 아버지 얘기도 좀 들어주는, 그런 사랑이면 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현실에서는 그것 하나가 잘 안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