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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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가룟 유다야"(63).

<유다>는 유다의 이야기이자 유대인의 이야기이며, 배신자의 이야기이자 희생자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자 민족의 이야기이며, 집의 이야기이자 땅의 이야기이며, 구원의 이야기이자 전쟁의 이야기이며, 동거의 이야기이자 독립의 이야기이며, 현재의 이야기이자 과거의 이야기이요 과거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절망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제목인 <유다>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가룟'인 유다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유대 민족 전체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다'라고 쓰고 '배신자'라고 읽지요.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와 동의어이면서, 유대인이라는 말과도 동의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기독교인 대중의 상상 속에서, 유대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각인된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가룟 유다였다"(284). 모든 나라와 모든 세대를 아울러 교활하고, 역겨운, 혐오스러운 인물로 여겨지는 배신자 <유다>는 전체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세대의 배신자로 낙인 찍힌 유다여, 그대는 누구를 배신자라 부르는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103).

유대 땅은 '사이 땅', '트라이앵글 지역'이라고도 불립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 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유대 땅을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국가를 원했고, 독립을 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땅은 학살과 추방과 증오와 혐오와 보복과 죽음이 가득한 땅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피를 강처럼 흐르게 했어요. 한 세대를 전부 희생시켰어요. 아랍인들 수십만 명을 자기들 집에서 내쫓았어요. 히틀러를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온 배를 항구에서 곧장 전쟁터로 보냈어요. 이 모든 일이 여기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지 보세요"(274).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둘 중에 하나만 살아남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두 민족이 피 흘리는 전쟁으로 빠르게 전력 질주하기 전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이 있었답니다. 이 책에서는 그를 '아브라바넬'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는 보편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지요. 그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상대방을 오해하던 것만 풀면 사랑할 수 있다는 꿈을 꾼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두 공동체가 살아갈 충분한 공간이 있으며, 그렇게 나란히 또는 하나 안에 다른 국가라는 틀 없이 공존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혼합된 공동체. 아니면 다른 하나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는 두 공동체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거예요"(278).

그러나 유대인도 사랑하고 아랍인도 사랑한다는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인 친구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신자였으니까요.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했지만, 예수와 같은 꿈을 꾸지 않는 그의 제자들이 배신자 <유다>(가룟 유다와 유대 민족 전체)를 증오했듯이, 유대인의 원수를 사랑한 '아브라바넬'은 수치스럽게 추방당하고 미움 받고 비방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이 책의 저자 '아모스 오즈'도 "줄곧 '두 국가 해결책'을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애썼"으나,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주장했기에 이스라엘 안팎에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하니, '아브라바넬'은 작가 자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 유대인들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 하나와 아랍인들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 하나가 생겼을 뿐이에요. 이제부터 아랍인들은 날마다 패배자가 당하는 재앙을 살아야 하고 유대인들은 밤마다 보복을 당할까 봐 떨며 살아야 해요"(278).

<유다>는 고장 난 기계식 인형처럼 쉴 새 없이 연설하고 연설하는 노인(발드), 모든 남성을 혐오하며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여인(아탈리야),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슈무엘), 이 세 사람의 기이한 동거를 통해, 시온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의와 복수의 전쟁을 선택한 그 땅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자신을 잃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그곳에는 과부와 장애인만 남았습니다. 남성을 혐오하는 과부와 아들을 잃고 비탄에 젖은 노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아랍인'도' 사랑한 죄로 '아브라바넬'을 추방한 자들은 그 대가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은총(아브라바넬)이 죽었고, 자비(발드의 아들이며, 이탈리야의 남편이었던 미카)가 살해되었으니, 이제 집(세상)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무덤처럼 절망과 슬픔,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 '배신자 아브라바넬'의 유령이 떠돌고 있을 뿐이죠. <유다> 전체에 '아브라바넬'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 안에 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인정할 수 없고 변화가 생기는 것을 죽을 만큼 무서워하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사람들 눈에 언제나 배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요"(374).

기독교인에게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에게 유다는 누구일까요? <유다>는 유대인들조차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부끄러워하고, 부인했던 유다의 유령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지난 여든 세대 동안 증오심과 혐오감을 강물처럼 흐르게 했던 그 유다에 관한 기억을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진짜 배신자인지 다시 묻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이렇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진짜 배신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나 권력을 탐내고, 종교 권력으로 피 흘리는 자가 되었던 그의 다른 제자들인가, 예수가 죽었을 때 함께 죽었던 유일한 제자 유다인가? 가룟 유다에 관한 저자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유다>는 가룟 유다를 이렇게 재해석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독교인, 한 순간도 예수를 떠나지 않고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기독교인, 끝까지 예수가 온 예루살렘 앞에서 그리고 온 세계 앞에서 틀림없이 일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리라 믿었던 기독교인,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가 떠난 이후에 더 살려고 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죽었을 때 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유일한 사람,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이 다섯 대륙에 사는 수억 명의 사람들의 눈에는 수천 년에 걸쳐 가장 전형적인 유대인이라고 간주되었다. 가장 혐오하고 가장 경멸하는 사람, 배신의 화신이며 유대교의 화신이고 유대교와 배반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보여 주는 화신이었다"(284-285).

어떤 영화에서였는지, 한 유대인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여, 다음 번엔 다른 민족을 택하소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에 지쳤다고 호소합니다. <유다>에서는 이런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천 년에 한 번은 우리의 죽음이 의미가 있을지도"(268). 그러나 <유다>의 저자 아모스 오즈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과 아랍인이 상대방을 오해했던 것만 풀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형제니까요! 그러나 <유다>는 조용한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회복의 이름으로, 피를 물처럼 흘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는 듯 합니다. 서정시를 쓰는 것은 여전히 야만이라고요. 복수에 목마른 채로 새로운 시 한 편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일은, 헛일이라고 말입니다.

<유다>는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과제처럼 보이는 많은 질문을 남겨놓지요. 유대인과 아랍인이 우정을 쌓을 수 있을까요? 아무도 쫓아내지 않고 부당한 일은 전혀 저지르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요? 왜 종교는 우리를 구하러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쏟게 만들까요? 사랑하기 위해 죄로 물든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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