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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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사랑과 상실의 문제이다. 김승옥 소설의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대상을 이미 상실했거나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며, 혹은 곧 상실할 예정이다"(460).

"한국 작가들의 스승이자 한국 문단의 거목"이라고 평가되는 김승옥 소설 속에서 왜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은 사랑하는 대상을 이미 상실했거나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며, 혹은 곧 상실할 예정"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이 책에 수록된 12편의 작품을 다시 음미해보니, 김승옥, 그는 시대를 슬퍼했던 작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김승옥의 모든 중단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소설 1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두 작품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1960년대에 쓰여졌으며,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등장인물들의 삶은 여전히 전쟁 때처럼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기 위해 자기 생명을 쓰지만 그렇게 생명을 쓰다 곧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모순처럼,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운명에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저항을 해보지만, 그 소중한 것을 내어준 덕에 결국 타락하고 마는 나약한 인간의 삶의 현주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간히 성실하게 사는 척하지?"(174)

살아남기 위한 대응전략이었을까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배신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그처럼 허깨비로 보였던 것은, 그가 생각했던 '고결함'을 팔아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6.25 사변으로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 나는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처박혀졌고 의용군의 징발도 그 후의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버리고 있었었다. 내가 졸업한 무진의 중학교의 상급반 학생들이 무명지에 붕대를 감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을 부르며 읍 광장에 서 있는 트럭들로 행진해가서 그 트럭들에 올라타고 일선으로 떠날 때도 나는 골방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행진이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 나는 무진의 골방 속에 숨어 있었다. 모두가 나의 홀어머님 때문이었다.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나는 내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14). 그는 무엇을 배신했던 것일까요? 자신의 양심? 조국? 참전용사?

<생명연습>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팝니다. '형'에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내를 하나 데리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생선 장수를 시작하기 전으로, 바느질로써 용돈을 벌었고 남아 있던 살림살이를 하나씩 팔아서 살고 있었을 때였다. … 그날 나와 누나는 공포에 차서 덜덜 떨며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말았다. 중학교에 다니던 형도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그대로 새우고 있는 눈치였다. 다음 날 형은 학교엘 가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망 후에 어머니가 맞아들인 최초의 사내였다"(65-66).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사내'는 급성 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월부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 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93)

시대(환경)에 훼손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삶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인지, 우리가 삶을 배신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훼손되는 인간의 타락이 이 단편집 속에는 사람들이 '비윤리적 행위'라고 부르는 다양한 성적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주로 폭력적인 형태로 말이지요. "더구나 짓궃은 장난인 듯이 가장하고 있는 사내들의 그 행위 속에는 대낮의 생활로부터, 이 도시로부터, 자기의 예정된 생활로부터, 자기가 싫증이 날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보고 싶은 욕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현주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110). <야행> 속 현주는 그것이 도망해보고 싶은 욕구라고 했지만, 절망감으로부터의 도피, 자기혐오의 몸부림이 또다른 약자를 강탈하고 훼손한다면, 2021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야비한 '개새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432).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밤낮 없이 일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에 꽤 낙심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여전히 찬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속 '영이'처럼 불안한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환멸이라는 것을 이 책이 다시 확인해줍니다. "그때 멋지게 차린 사내가 여자 앞으로 다가온다. 슬퍼 보이는군요 하고 사내가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정말 자기는 지금 슬프다고 느낀다. 따뜻한 곳으로 가시죠 하고 사내가 말한다. 울림이 있어서 신뢰하고 싶은 목소리. 여자는 조금은 불안해하며 사내를 따라 걷는다. 여자와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292)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vs. "나는 무엇을 신음하고 있을까?"

1960년대를 뜨거운 청춘으로, 또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살아낸 작가가 그의 작품을 통해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이 둘 중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 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 넣고 눈을 슬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을 자리만 찾아다닌다.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431). 여전히 우리 삶은 작가의 이 통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수치와 환멸과 야비함과 적의와 배신과 도피로 가득 차 있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한국 문단의 한 거목은 사랑의 부재를 독자들이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데도, 어째서 그가 사랑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짐승 같은 삶을 보라, 사랑은 없다고 조롱하는 작가의 절망이 사실은 사랑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말이지요.

대한민국은 지금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전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삶을 즐기라고 손짓합니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필요 이상의 음식과 필요 이상의 교미? 우리가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 그 운명의 굴레 속에서 여전히 훼손 당하고 있고, 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 삶의 현주소인 이 시대를 여전히 슬퍼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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