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신 좀 봐. 아가의 일 때문에…."
그는 여인을 멍하니 응시하더니 홀연 느껴지는 게 있어 바로 목청을 높였다.
"아가의 어머니군요!"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정말 총명하시군요. 말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알아차리셨네요."
위소보가 말했다.
"당연히 금방 알아차릴밖에요. 너무 닮았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가사저는 당신만큼은 아름답지 않아요." - P98

여인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천추의 한으로 남을 천 억울함을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위소보는 당황해서 얼른 답례를 하다가 눈이 둥그레졌다.
"아니… 아니… 그럼・・・ 어이구, 맞아요!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하지?
바로 진원원이군요! 진원원이 아니라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이런 미모를 가질 수 있겠어요?" - P99

진원원이 나직이 말했다.
"이자성이 날 빼앗아갔고, 나중에 평서왕이 다시 날 빼앗아갔죠. 난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어요. 누구든 힘이 세면 빼앗아 갈 수 있었으니까요." - P112

여기까지 듣고 나서 위소보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대충 윤곽이 잡혔다. 구난은 오삼계를 너무 증오해 단순히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한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그의 딸을 납치했다. 그리고 무공을 가르쳐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도록 만든 것이다. - P122

위소보가 소리쳤다.
"여기서 누가 대역무도한 죄인이란 말이오? 왜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하는 거요?"
오삼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 늙은 중이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넌 지금 그에게 속고 있는 거야. 대체 누구를 위해 아까운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지?"
노승이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난 한 번도 나 자신을 숨긴 적이 없다. 봉천왕 이자성이 바로나다!" - P132

구난이 냉소를 날렸다.
"이런 희한한 일이 있다니, 오늘 이 작은 선방에서 고금 천하제일의 역적과 고금 천하제일의 매국노가 한자리에 모였군!"
위소보가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고급 천하제일의 미인과 고금 천하제일의 무공 고수도 함께 있죠."
그 말에 구난의 차가운 얼굴에도 한가닥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어찌 천하제일의 고수라 할 수 있겠느냐? 너야말로 천하제일의 익살스러운 땅꼬마지!" - P136

구난은 턱을 치켜들고 하하 웃었다.
"그가 나와 아무 원한이 없다고? 소보야, 내가 누군지 말해줘라. 그래야만 매국노와 역적이 내 손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지!"
위소보가 말했다.
"나의 사부님은 바로 대명 숭정 황제의 친생 장평 공주요!"
오삼계와 이자성, 진원원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토했다.
"아!" - P137

아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자성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야! 그 여자도 나의 어머니가 아니고!"
이어 구난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 당신도 나의 사부님이 아녜요! 다들..… 다들 나쁜 사람이야!
왜 다들 날 괴롭히는 거야? 다… 다 미워!" - P162

유대홍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위 향주, 누가 먼저 오삼계를 쓰러뜨리느냐를 놓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해왔는데, 이젠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것 같소. 돌아가서 진총타주께 전하시오. 목왕부는 천지회에 승복했소. 위 향주가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아마 평생을 두고도 다 갚지 못할 거요. - P165

위소보는 상대방이 천지회 형제임을 거듭 확인하고 자신을 밝혔다.
"형제는 위소보라 하며 현재 청목당의 향주로 있습니다. 형장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며, 어느 당에서 무슨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비렁뱅이가 대답했다.
"형제는 오육기라 하오. 현재 홍순당의 홍기향주紅旗香主로 있소. 오늘 위 향주와 형제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 P224

호일지가 그의 말을 받았다.
"죽여도 상관없어요. 그것도 좋은 일이죠. 만약 그녀가 위 형제를 죽였다면 속으로 아무래도 조금은 죄책감을 느낄 거고, 밤에 꿈속에서 위 형제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낮에 하릴없이 심심할 때도 가끔 생각이 날 테고… 아예 존재 자체도 모르고 무관심한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요?"
오육기와 마초흥은 서로 마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여자한테 미쳐도 어떻게 이 정도로 미칠 수가 있나, 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었다. - P248

마초흥은 탄식했다.
"국성야 같은 영웅에게서 어쩌다 이런 못난 후손이 태어났지?"
성질 급한 오육기가 열을 냈다.
"그가 만약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총타주님을 난처하게 만들거야.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여기서 해결해버리지!"
정극상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아… 아녜요! 대만으로 돌아가면 아버님께 말씀드려 진영화, 진선생에게 아주 큰 벼슬을 내리게 할게요" - P261

위소보는 진근남에게 무릎을 꿇고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진근남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다. 역시 이 진근남의 제자답구나."
위소보가 가까이서 보니, 콧수염이 희끗하고 안색도 초췌해 보였다.
근자에 이모저모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느라 많은 풍상을 겪은 탓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는 사부에게도 뭔가 선물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사부님은 은자나 금은보화 따위는 드려도 받지 않을 거야. 그리고 무공이 고강하니 비수나 보도 사양하겠지.‘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부님, 한가지 긴요하게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오육기와 마초흥은 그들 사제지간에 따로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해 바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 P283

"사부님, 사부님께는 따로 드릴 것이 없으니 이 양피지 쇄편을 받아주십시오."
진근남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아니, 이게 뭔데 그러느냐?"
위소보는 그 쇄편에 얽힌 사연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진근남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갈수록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태후를 비롯해 황제, 오배, 청해의 대라마, 외팔 여승 구난, 신룡교의 교주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다들 노심초사 이 쇄편을 손에 넣으려 했고, 그 속에 만청의 용맥과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P284

오육기가 말했다.
"위 형제, 이젠 서로 허물이 없으니 말을 놓겠네."
위소보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네, 저도 그게 편합니다.
그러자 오육기가 진지하게 말했다.
"위 형제, 난 위 형제가 데리고 있는 쌍아와 결의를 맺어 의남매가 되었네."
그 말에 위소보와 마초흥은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쌍아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인 채 몹시 겸연쩍어 했다. - P291

도로 엉성했다. 구난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넌 비록 내 문하에 들어왔지만, 성격으로 봐서 도저히 무학을 익힐 재목이 아니야. 이렇게 하자. 우리 철검문에 신행백변이라는 무공이 있다. 지난날 나의 스승이신 목상도인께서 창안한 건데, 경공으로는 아마 천하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경공술은 우선 내공부터 깊이 닦아야 가능한데, 넌 틀린 것 같고.… 나중에 만약 위기에 닥쳤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모면할까를 생각해봤다. 결국 그냥 달아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위소보는 ‘얼씨구나‘ 좋아했다. - P294

강희는 깔깔 웃었다.
"널 일등자작으로 승진시키고, ‘파도로’라는 칭호를 내리겠다. 봉천에 주둔하고 있는 병마를 이끌고 신룡교의 반도들을 소탕하도록 해라!"
위소보는 무릎을 꿇고 성은에 감사한 다음 말했다.
"소인은 벼슬을 크게 할수록 복도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 P331

위소보는 어쩔 수 없이 강희의 명을 받들게 됐지만 심히 걱정스러웠다. 신룡교의 홍 교주는 무공이 탁월하고, 교내엔 고수들이 구름처럼 깔려 있다. 자기가 그저 궁수들과 창칼을 쓰는 병사들을 이끌고 신룡도로 쳐들어간다면 그 ‘충수무강‘의 주인공은 자기가 되기 십상일 것이었다. - P332

"네, 그렇군요. 그런데 왜 한사코 대만을 치려고 하죠?"
색액도가 다시 설명했다.
"시랑은 원래 정성공 휘하의 대장군이었는데, 나중에 정성공이 그가 모반을 꾀할 기미가 있다고 의심해 체포하려고 하자 달아나버렸네. 그러자 정성공은 홧김에 그의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여기까지 말하고는 오른손을 칼처럼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 P337

문무백관들은 흠차대신을 맞이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다들 아부를 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데 유독 무관인 한 텁석부리가 몹시 오만하게 굴었다.
절을 할 때도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등 위소보가 아예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그가 눈에 거슬리고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당장 가까이 불러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P358

이번에 붙잡힌 것도 따지고보면 방이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에 만약 여기서 벗어나게 된다면 다시는 상대 안 할 거야! 그 계집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다면 내 성을 갈겠다! 이미 두 번이나 속았는데, 또 속을 수는 없지‘
그러나 방이의 요염하고 달덩어리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달콤한 미소, 늘씬한 몸매를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답게 바로 생각을 달리했다.
‘그래, 성을 갈면 가는 거지 뭐! 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성이 뭐든 무슨 상관이야?‘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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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응웅의 몸이 선혈 낭자한 것은 다들 봐서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주에게 무례한 짓을 해서 당한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을 듣고 하반신을 자세히 보니,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급소 부위에 부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위사들이 상비약으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약을 얼른 꺼내 응급조치를 해주었다. - P33

하국상이 소리쳤다.
"냉큼 일어나라! 흠차 대인께서 네게 물어볼 말이 있다."
소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고,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 위소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아!"
소녀도 뜻밖인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손발에 묶여 있는 사슬이 바닥에 끌려 절그렁그렁 소리가 났다. 그녀의 입에서도 놀란 외침이 터졌다.
"아니... 왜 여기 있지?"
놀란 것은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위소보로선 정말 천만뜻밖이었다. 이 소녀는 아가가 아니라 목왕부의 소군주 목검병이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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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계집애는 왜 일편단심 저 새끼만 생각하는 거지? 내가 설령 녀석의 귀를 자르고 눈을 후벼파도 여전히 사랑타령을 할 것 같은데!‘
위소보가 제아무리 영악하고 잔꾀가 많아도, 이런 남녀지간의 미묘한 감정 문제에 대해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 P175

위소보는 아가 곁으로 바싹 다가가 손을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
"밖에 적이 쳐들어온 모양이야."
아가는 괴로워하며 흐느꼈다.
"난・・・ 난 사제랑 혼례를 올렸어…"
위소보는 다시 나직이 말했다.
"그건 내가 바라던 바야 한데 혼례가 너무 초라했던 것 같아"
아가는 화를 냈다.
"이건 무효야. 혹시 진짜로 생각하는 거야?" - P212

위소보는 지금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화제를 돌렸다.
"양 대형, 우린 서로 마음이 맞는 것 같은데… 나를 시답잖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의형제를 맺읍시다. 자꾸 공공이니 소인이니 하니까 듣기가 거북하네요."
양일지는 좋아했다. 평서왕은 위소보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황상과 가장 가까운 측근이니 앞으로 그에게 부탁할 일이 많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공공은 사람됨이 호방하고 의리가 있으니 친구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 P221

"이 고인은 대체 누구지?"
그러자 나이가 좀 많은 시종이 대답했다.
"공자의 사부이신 ‘일검무혈‘ 풍석범입니다. 그의 무공을 말하자면,
가히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죠. 지금 공자를 구하러 갔으니 틀림없이 구해올 겁니다."
위소보와 아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P237

‘빌어먹을! 내가 만약 네년을 마누라로 삼지 못한다면, 정가 녀석의 18대 개뼈다귀 손자가 돼도 상관없다! 후레자식이 아니라 후레자식의 후레자식이 될 거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면 극도의 좌절감을 느껴 눈물을 삼키며 포기할 것이다. 아니면 오기가 생겨 더 나은 다른 사람을 찾든가. 그러나 위소보는 달랐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망나니 근성이 있는 데다 낯가죽도 두껍고 오기도 남달랐다. - P240

강희는 하하,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위소보가 나서 일검을 대신 맞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 여승의 검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위소보 녀석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이렇듯 겸손하니, 그 충정이 무척 가상했다. - P251

"소계자, 운남에 갈 배짱이 있느냐?"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너무 뜻밖의 말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반문했다.
"오삼계의 본거지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라는 겁니까?"
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 그러나 넌 나이가 어리니 오삼계가 별로 경계를 하지 않을 거야. 더구나 양일지가 너의 친구니 필요하다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 - P256

"저 ・・・ 어마마마…."
여인은 촛불이 가까이 비치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누구..…"
위소보가 말했다.
"이분은 당금 황상이십니다. 친히 태후마마를 구하러 왔습니다."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희를 잠시 응시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정말 황상이란 말인가요?"
갑자기 ‘왁‘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두 팔로 강희를 꼭 끌어안았다. - P269

정극상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내가 알기로 천지회에는 오로지 진근남만 있을 뿐인데, 대만의 정왕부가 존재하기나 한단 말이오? 훗날 오랑캐를 몰아내고 대업을 이룬다면 이 천하는 진근남의 것이 되겠지. 우리 대만 정가의 소유가 되겠소?"
진근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공자의 그 말에는 찬동할 수가 없소. 오랑캐를 몰아내면 다 함께 대명 황실의 주씨 후예를 받들어야 할 것이오!" - P285

위소보는 처음 며칠 동안은 그래도 남의 눈치를 봐가며 몰래몰래 행동을 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공주의 방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니 낮에는 사혼사요, 밤에는 부마나 다름이 없었다.
궁녀와 내관들은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단은 공주가 두렵고,
또한 위소보가 계속해서 많은 은자를 뿌려대니 어느 누가 감히 입을 나불거릴 수 있겠는가! - P359

오응웅을 보낸 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미심쩍었다. 그들은 자기와 양일지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운남에 오면 당연히 양일지를 시켜 접대케 해야 이치에 맞는 일이거늘, 하필이면 왜 자기가 운남에 올 즈음 그를 멀리 심부름 보냈을까? 답례품을 보내는 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일부러 양일지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 P377

서천천이 담요를 가볍게 젖혔다. 순간, 위소보는 놀란 비명과 함께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충격에 몸이 휘청거리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전노본이 그를 부축했다. 양일지는 두 팔이 잘렸고, 두 다리도 무릎에서부터 잘려나갔다. - P388

"그야 당연하죠. 이 일이 만약 누설되는 날이면 다들 바로 멸문을 당할 겁니다. 평서왕야는 역시 세심하군요. 돌다리도 다시 두들겨보고건너는 게 맞죠. 그럼 소왕야가 다시 왕께 전해주십시오. 이번에 사자동맹이 이루어지면 바로 출병해서 천하를 사분하는 겁니다. 중원 강산은 약속한 대로 틀림없이 왕야가 독차지하고, 나머지자는 절대 중원을 넘보지 않을 겁니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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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흥 하고 코웃음을 날렸다.
"그런 헛소리를 들으려고 여기 오자고 한 게 아니야. 당장 내 곁에서 떠나 멀리 꺼질수록 좋아! 앞으로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만약 또 내 눈에 띄면 바로 눈알을 뽑아버릴 거야!"
위소보는 가슴이 철렁했다. - P23

위소보도 속으로 계속 씨부렁댔다.
‘빌어먹을! 아니꼽게 왜 자꾸 잘난 척을 하는 거야? 연평군왕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하지만 그도 연평군왕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부인 진근남이 바로 연평군왕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다. - P51

백의 여승은 위소보가 창칼을 막아낼 수 있는 보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에 아가가 그를 두 번이나 찔렀는데도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위소보가 무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를 걸고 상대방과 승부를 벌인 그 배짱과 용기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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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소보는 두 여인을 살펴보았다. 한 사람은 스무 살가량에 남색 옷을 입었는데 용모가 수려했다. 그리고 또 한 여인은 나이가 열예닐곱에 불과한 듯싶은데 엷은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 소녀를 보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철퇴에 가슴을 가격당한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입술이 바싹 타고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이 딱 벌어졌다. - P138

"사제, 그 정도면 충분하네."
주위의 승려들은 그제야 녹의 소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위소보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었다.
한편 위소보는 칼자국이 증명하듯이 그 당시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손을 뒤로 뻗어 마구 휘젓다가 상대의 몸 어느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다. 그건 결코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 P154

위소보는 놀랍고도 의아했다.
"아니... 방금 말한 그 많은 문파의 무공을 하나하나 다 내력까지 알고 있다는 건가요?"
그는 징관에 대해 잘 모르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징관은 여덟 살때 소림에 출가해 70년 넘게 산문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오로지 무학 연구에만 몰두해왔다. 모든 무학에 관한 서적을 거의 다 섭렵해 아는 것이 광박했다. - P156

징관 선사는 오로지 무학에만 전념해 세속의 일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인지 좀 융통성이 없어 보이지만, 각 문파의 무공에 대한 분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치 정통했다. 문인들이 공부에만 열중하다 보면 융통성이 없고 약간 어벙해 보이는 ‘책벌레‘가 되는 것처럼, 이 정관 선사는 평생 오직 무학만 파고들어 ‘무학벌레‘가 되고 말았다. - P157

그런데 여시주의 공격은 더욱 어지러워져 걷잡을 수 없었다.
‘옛날 고수들의 말에 의하면, 무공이 절정에 이르면 아무 흔적도 없다고 했어. 명나라 때에 독고구패 대협도 그랬고, 또 영호충 대협도 역시 무 초식으로 모든 초식을 꺾어 천하무적이 됐지. - P231

표창 아홉 개가 동시에 발출되었기 때문에 회총과 징관이 위소보를 도와주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들이 대경실색하는 가운데 암기 세개가 금속성을 내며 다 바닥에 떨어졌다. 위소보는 보의를 입고 있어 그 암기에 별로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다.
사수용대전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어린 화상이 소림 무공 중에서도 최고의 내공으로 알려진 금강호체신공金剛護體神功을 터득했을 줄이야,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쩐지... 이 어린 화상이 소림의 회자 항렬로, 방장이신 회총 선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가 다 있었군.’ - P249

"이런 고약한 것! 그날 그날 기루에서 그 나쁜 여자들하고 놀아나더니.… 나의 사매가 예쁘게 생겨 엉뚱한 마음을 품고 강제로.… 결국 사매를 죽이고 말았군! 기루에 가서 그런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이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
회총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빙긋이 웃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P255

위소보는 잠시 멍해 있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보니, 소황제는 아주 주도면밀했다. 애당초 자기를 소림으로 보낸 것도 오늘의 일을 예상한 안배였던 것이다. 일단 소림에 가 반년쯤 지내면서 승려들과 친숙해지도록 한 후, 마음에 맞는 승려들을 선발해 함께 청량사로 가라는 의도였다. - P264

사미승이 통보를 하자 옥림 등은 주지가 온 것을 알고 직접 문밖으로 나와 맞이했다. 위소보를 보자 옥림과 행치, 행전은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세 사람은 신임 방장이 소림사 회총선사의 사제인 회명 선사이며 나이가 젊은 고승이라는 것은 전해들었지만, 그게 바로 위소보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옥림과 행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는 황제가 부황을 보호하기 위해 안배한 일임이 분명했다. - P285

삐걱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행치가 강희의 손을 잡고 문밖으로 나왔다. 부자는 서로 잠시 마주 보았다. 강희는 부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행치가 말했다.
"넌 아주 훌륭해. 나보다 훨씬 낫다. 아무 걱정 안 할 테니, 너도 걱정하지 마라." - P311

이때 난데없이 꽝 하는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흙먼지가 흩날리며 대웅보전 지붕에 큰 구멍이 하나 뻥 뚫렸다. 그와 동시에 흰 그림자가 번뜩이며 커다란 물체 하나가 떨어져내렸는데, 바로 흰 옷을 입은 승려였다. 그는 장검을 쥐고 전광석화처럼 강희에게 덮쳐가며 소리쳤다.
대명 천자를 위해 복수하겠다!"
강희는 황급히 뒤로 피했다. - P335

‘네가 검으로 찌른 데가 아직도 아파. 그 복수로 엄마라고 몇 번 불렀으니 이젠 서로 밑진 것 없이 퉁친 거야!‘
그가 남을 ‘엄마‘라고 부르는 건, ‘기녀‘라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우쭐대며 여승을 힐끗 쳐다보는 순간, 그녀의 고귀한 모습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났다. ‘엄마‘라고 부른 게 약간 후회됐다. - P351

"난 가짜 태후예요! 난… 태후가 아니란 말예요!"
그 말에 백의 여승은 물론 의아해했지만, 침상 뒤에 숨어 있는 위소보는 더욱 깜짝 놀랐다. 여승이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 P382

"네, 그건・・・ 만주 오랑캐의 흥망성쇠를 결정할 수 있는 아주 중대한 비밀입니다. 그들이 요동에서 흥성해 우리 대명 천하를 차지한 것은 조상들의 풍수가 아주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요동 장백산에 황족의 선조인 애신각라씨의 용맥이 있습니다. 그 용맥만 파괴하면 우리 한인들의 강산을 수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랑캐들을 모조리 섬멸시킬 수 있습니다." - P390

"왜 그게 아니라는 것이냐? 네가 남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아? 물론 강호는 워낙 험악한 곳이라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전에 내가 말한 적이 있지만, 이 아이는 나랑 여러 날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잘 안다. 아주 솔직하고 가식이 없으니 믿어도 된다. 아직 나이가 어려 순진한데 어떻게 일반 강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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