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신 좀 봐. 아가의 일 때문에…."
그는 여인을 멍하니 응시하더니 홀연 느껴지는 게 있어 바로 목청을 높였다.
"아가의 어머니군요!"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정말 총명하시군요. 말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알아차리셨네요."
위소보가 말했다.
"당연히 금방 알아차릴밖에요. 너무 닮았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가사저는 당신만큼은 아름답지 않아요." - P98

여인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천추의 한으로 남을 천 억울함을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위소보는 당황해서 얼른 답례를 하다가 눈이 둥그레졌다.
"아니… 아니… 그럼・・・ 어이구, 맞아요!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하지?
바로 진원원이군요! 진원원이 아니라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이런 미모를 가질 수 있겠어요?" - P99

진원원이 나직이 말했다.
"이자성이 날 빼앗아갔고, 나중에 평서왕이 다시 날 빼앗아갔죠. 난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어요. 누구든 힘이 세면 빼앗아 갈 수 있었으니까요." - P112

여기까지 듣고 나서 위소보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대충 윤곽이 잡혔다. 구난은 오삼계를 너무 증오해 단순히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한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그의 딸을 납치했다. 그리고 무공을 가르쳐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도록 만든 것이다. - P122

위소보가 소리쳤다.
"여기서 누가 대역무도한 죄인이란 말이오? 왜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하는 거요?"
오삼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 늙은 중이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넌 지금 그에게 속고 있는 거야. 대체 누구를 위해 아까운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지?"
노승이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난 한 번도 나 자신을 숨긴 적이 없다. 봉천왕 이자성이 바로나다!" - P132

구난이 냉소를 날렸다.
"이런 희한한 일이 있다니, 오늘 이 작은 선방에서 고금 천하제일의 역적과 고금 천하제일의 매국노가 한자리에 모였군!"
위소보가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고급 천하제일의 미인과 고금 천하제일의 무공 고수도 함께 있죠."
그 말에 구난의 차가운 얼굴에도 한가닥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어찌 천하제일의 고수라 할 수 있겠느냐? 너야말로 천하제일의 익살스러운 땅꼬마지!" - P136

구난은 턱을 치켜들고 하하 웃었다.
"그가 나와 아무 원한이 없다고? 소보야, 내가 누군지 말해줘라. 그래야만 매국노와 역적이 내 손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지!"
위소보가 말했다.
"나의 사부님은 바로 대명 숭정 황제의 친생 장평 공주요!"
오삼계와 이자성, 진원원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토했다.
"아!" - P137

아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자성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야! 그 여자도 나의 어머니가 아니고!"
이어 구난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 당신도 나의 사부님이 아녜요! 다들..… 다들 나쁜 사람이야!
왜 다들 날 괴롭히는 거야? 다… 다 미워!" - P162

유대홍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위 향주, 누가 먼저 오삼계를 쓰러뜨리느냐를 놓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해왔는데, 이젠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것 같소. 돌아가서 진총타주께 전하시오. 목왕부는 천지회에 승복했소. 위 향주가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아마 평생을 두고도 다 갚지 못할 거요. - P165

위소보는 상대방이 천지회 형제임을 거듭 확인하고 자신을 밝혔다.
"형제는 위소보라 하며 현재 청목당의 향주로 있습니다. 형장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며, 어느 당에서 무슨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비렁뱅이가 대답했다.
"형제는 오육기라 하오. 현재 홍순당의 홍기향주紅旗香主로 있소. 오늘 위 향주와 형제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 P224

호일지가 그의 말을 받았다.
"죽여도 상관없어요. 그것도 좋은 일이죠. 만약 그녀가 위 형제를 죽였다면 속으로 아무래도 조금은 죄책감을 느낄 거고, 밤에 꿈속에서 위 형제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낮에 하릴없이 심심할 때도 가끔 생각이 날 테고… 아예 존재 자체도 모르고 무관심한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요?"
오육기와 마초흥은 서로 마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여자한테 미쳐도 어떻게 이 정도로 미칠 수가 있나, 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었다. - P248

마초흥은 탄식했다.
"국성야 같은 영웅에게서 어쩌다 이런 못난 후손이 태어났지?"
성질 급한 오육기가 열을 냈다.
"그가 만약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총타주님을 난처하게 만들거야.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여기서 해결해버리지!"
정극상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아… 아녜요! 대만으로 돌아가면 아버님께 말씀드려 진영화, 진선생에게 아주 큰 벼슬을 내리게 할게요" - P261

위소보는 진근남에게 무릎을 꿇고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진근남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다. 역시 이 진근남의 제자답구나."
위소보가 가까이서 보니, 콧수염이 희끗하고 안색도 초췌해 보였다.
근자에 이모저모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느라 많은 풍상을 겪은 탓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는 사부에게도 뭔가 선물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사부님은 은자나 금은보화 따위는 드려도 받지 않을 거야. 그리고 무공이 고강하니 비수나 보도 사양하겠지.‘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부님, 한가지 긴요하게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오육기와 마초흥은 그들 사제지간에 따로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해 바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 P283

"사부님, 사부님께는 따로 드릴 것이 없으니 이 양피지 쇄편을 받아주십시오."
진근남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아니, 이게 뭔데 그러느냐?"
위소보는 그 쇄편에 얽힌 사연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진근남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갈수록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태후를 비롯해 황제, 오배, 청해의 대라마, 외팔 여승 구난, 신룡교의 교주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다들 노심초사 이 쇄편을 손에 넣으려 했고, 그 속에 만청의 용맥과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P284

오육기가 말했다.
"위 형제, 이젠 서로 허물이 없으니 말을 놓겠네."
위소보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네, 저도 그게 편합니다.
그러자 오육기가 진지하게 말했다.
"위 형제, 난 위 형제가 데리고 있는 쌍아와 결의를 맺어 의남매가 되었네."
그 말에 위소보와 마초흥은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쌍아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인 채 몹시 겸연쩍어 했다. - P291

도로 엉성했다. 구난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넌 비록 내 문하에 들어왔지만, 성격으로 봐서 도저히 무학을 익힐 재목이 아니야. 이렇게 하자. 우리 철검문에 신행백변이라는 무공이 있다. 지난날 나의 스승이신 목상도인께서 창안한 건데, 경공으로는 아마 천하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경공술은 우선 내공부터 깊이 닦아야 가능한데, 넌 틀린 것 같고.… 나중에 만약 위기에 닥쳤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모면할까를 생각해봤다. 결국 그냥 달아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위소보는 ‘얼씨구나‘ 좋아했다. - P294

강희는 깔깔 웃었다.
"널 일등자작으로 승진시키고, ‘파도로’라는 칭호를 내리겠다. 봉천에 주둔하고 있는 병마를 이끌고 신룡교의 반도들을 소탕하도록 해라!"
위소보는 무릎을 꿇고 성은에 감사한 다음 말했다.
"소인은 벼슬을 크게 할수록 복도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 P331

위소보는 어쩔 수 없이 강희의 명을 받들게 됐지만 심히 걱정스러웠다. 신룡교의 홍 교주는 무공이 탁월하고, 교내엔 고수들이 구름처럼 깔려 있다. 자기가 그저 궁수들과 창칼을 쓰는 병사들을 이끌고 신룡도로 쳐들어간다면 그 ‘충수무강‘의 주인공은 자기가 되기 십상일 것이었다. - P332

"네, 그렇군요. 그런데 왜 한사코 대만을 치려고 하죠?"
색액도가 다시 설명했다.
"시랑은 원래 정성공 휘하의 대장군이었는데, 나중에 정성공이 그가 모반을 꾀할 기미가 있다고 의심해 체포하려고 하자 달아나버렸네. 그러자 정성공은 홧김에 그의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여기까지 말하고는 오른손을 칼처럼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 P337

문무백관들은 흠차대신을 맞이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다들 아부를 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데 유독 무관인 한 텁석부리가 몹시 오만하게 굴었다.
절을 할 때도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등 위소보가 아예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그가 눈에 거슬리고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당장 가까이 불러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P358

이번에 붙잡힌 것도 따지고보면 방이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에 만약 여기서 벗어나게 된다면 다시는 상대 안 할 거야! 그 계집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다면 내 성을 갈겠다! 이미 두 번이나 속았는데, 또 속을 수는 없지‘
그러나 방이의 요염하고 달덩어리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달콤한 미소, 늘씬한 몸매를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답게 바로 생각을 달리했다.
‘그래, 성을 갈면 가는 거지 뭐! 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성이 뭐든 무슨 상관이야?‘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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