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하가 말했다.
"이 진롱은 선사께서 만드신 것이오. 선사께서는 과거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걸 만드시고 당대에 바둑의 도를 이해하는 인물이 깨주기를 기대하셨소. 재하가 30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연구를 했지만 아직까지 풀어내지 못했소." - P31

"모용 공자, 이제 모습을 드러내시오!"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소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돌아나왔다. 단예는 곧 눈앞이 캄캄해지고 입안이 씁쓸해지면서 온몸에 열이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그건 바로 그가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녀, 왕어언이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정이 가득한 얼굴로 옆에 있는 한 청년 공자를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단예가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보니 스물여덟아홉 정도 나이의 간편한 담황색 복장을 하고 허리에 장검을 찬 공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맑고 준수했으며 품위가 넘쳐 보였다. - P35

단예의 패배는 사랑이 과하다 보니 돌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 있었고, 모용복의 실패는 권세에 집착한 나머지 과감하게 돌을 포기해도 오히려 세를 잃지 않으려 한 데 있었다. 단연경의 경우 평생 한스럽게 생각하던 일이 바로 불구가된 이후 부득불 본문의 정종 무공을 포기하고 이단 문파의 사술을 습득하게 된 것이라 일단 정신을 집중했을 때 외마의 침입을 받자 뜻밖에도 심신이 일렁거려 자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P46

허죽은 자비심이 발동했다. 그는 단연경의 마장을 풀어내려면 기국에 손을 들여놔야 하지만 바둑 실력이 형편없었던 터라 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국 속의 난제를 푼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연경의 두 눈이 기국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을 보자 짧은 위기의 순간에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
‘저 기국을 풀지는 못해도 훼방을 놓는 건 간단하지 않은가? 저자의 심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를 구할 수 있다. 기국이 없다면 승부도 없을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마치자 대뜸 말했다.
"제가 기국을 풀어보겠습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 바둑알 상자 안에서 백돌 하나를 꺼내 눈을 감은 채 손이 가는 대로 바둑판에 두었다. - P50

단연경은 변화한 기국을 보고 조금 전 자신이 사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허죽의 도움 덕이란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정춘추가 이에 원한을 품고 당장 허죽에게 보복을하기 위해 손을 쓸 것이라 생각했다.
‘소림 고승인 현난이 여기 있으니 성수괴도 그의 제자를 힘들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저 늙은이가 아둔해서 저 소화상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내가 나서는 한이 있어도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다.‘ - P52

허죽이 조금 전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둔 한 점이 대마가 있는 공활인 백돌들을 스스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바둑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 자리에 착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검을 들어 스스로 베어 자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대량의 백돌을 상대에게 모두 내주고 난 뒤에 국면이 오히려 낙관적으로 변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 P54

조금 전 단연경은 기국에 깊이 빠져 있다 정춘추가 펼쳐낸 사술에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들어 자결을 할 뻔했지만 다행히 허죽의 훼방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소성하가 허죽에게 엄한 질책을 하며 위협을 가하자 곧바로 암암리에 목소리를 전해 그에게 훈수를 두었던 것이다. - P57

그 노인이 말했다.
"의협심은 나무랄 데가 없구나. 기예가 뛰어나지 않고 무공 실력이 부족하다 해도 상관없다. 네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인연이니라. 다만 네 용모가 너무 추한 게 문제로다."
이 말을 하며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겉모습이 아름답고 추한 것은 아주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업보가 쌓인 것이라, 이는 스스로 어쩔 도리가 없을뿐더러 부모조차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소승의 용모가 추해 선배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P67

노인이 허허하며 웃었다.
"아직까지도 날 사부라 칭하길 원치 않는 것이냐?"
허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승은 소림과 제자입니다. 조종을 배신하고 다른 문파에 새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네 몸에는 이제 소림무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슨 소림제자라 말할 수 있느냐? 또한 네 체내에는 소요파의 70여 년 된 신공이 축적되어 있는데 어찌 본 파의 제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단 말이냐?" - P76

‘육맥신검은 무슨, 깜짝 놀랐잖아? 이제 보니 저 녀석이 허풍을 떨며 속임수를 쓰는 거였구나. 예로부터 우리 단가에 육맥신검이란 기이한 무공이 전해내려온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걸 연성한 사람이 어디있다고? - P90

"소요파 불초 제자인 소성하가 본 파의 신임 장문인께 인사올립니다."
허죽은 순간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구나! 정말 미쳤어!"
그는 황급히 무릎 꿇고 절을 하며 답례했다.
"노선배님께서 이런 예를 행하다니 정말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성하가 정색을 했다.
"사제, 자네는 우리 사부님의 마지막 제자이자 본 파의 장문인이네.
그 때문에 내가 사형이긴 하지만 자네한테 절을 해야만 하는 것이야!"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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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노선께서 중원에 친히 행차하셨으니 개방의 제자들은 속히 무릎을 꿇고 맞이하라!"
말이 끝나자마자 둥둥둥둥 하고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북소리가 세차례에 걸쳐 울려퍼지고 지잉 하는 징소리가 들리자 북소리는 멈추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 P228

동안학발의 이 노인은 바로 중원 무림 인사들에게 있어 증오의 대상인 성수노괴 정춘추였다. 그는 성수파의 삼보 중 하나인 신목왕정을 여제자인 아자에게 도둑맞자 수차에 걸쳐 제자들을 보내 잡아오게 하고 심지어 대제자인 적성자까지 보냈었다. 그러나 번번이 비합전서를 통해 전해져오는 소식은 모두 실패했다는 내용들뿐이었다. - P230

원래 성수노괴는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자라 유탄지가 개방 제자들의 생사를 확인토록 만들어 그 김에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던 그를 제거하려 했다. 뜻밖에도 유탄지는 몇달 동안 수련을 계속해온 터라 빙잠의 기독이 이미 그의 체질에 융합되어 정춘추가 개방 제자들 몸에 묻혀놓은 독질조차 그를 해칠 수 없었다. - P236

유탄지는 머리에 쓴 철가면이 마치 불에 달궈진 듯 얼굴 전체가 뜨거워지자 속으로 무섭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아자에게 갖은 괴롭힘을 당한 이후 이미 어떤 고초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시비와 선악의 구별이나 강직한 기개 같은 관념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오로지 목숨만을 보전할 생각에 다급하게 답했다.
"사부님, 제자 유탄지가 사부님 문하에 들어가고자 하니 부디 사부님께서 거둬주십시오." - P240

바로 그때 맞은편 길에서 한 승려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정자 밖에 이르러 두 손으로 합장을 하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시주 여러분, 소승이 지나는 길에 목이 말라 정자에서 물 한잔하고 좀 쉬어가려 합니다."
흑의를 입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스님께서는 예가 지나치시오. 다들 지나는 과객이고 이 정자는 우리가 지은 것도 아니지 않소? 그냥 들어와 마시도록 하시오."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승려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
그 승려는 스물서넛 정도 되는 나이에 진한 눈썹과 큰 눈 그리고 커다란 코에 콧구멍이 하늘을 향해 있어 용모가 추하기 짝이 없었다. 승포 곳곳에는 기운 자리가 있었지만 오히려 아주 깔끔해 보였다. - P244

"소스님께서는 걸음걸이가 매우 씩씩하고 힘찬 것을 보니 무공을 할 줄 아는 것 같구려. 스님에 대한 호칭을 어찌해야 하며 어느 보찰에 출가하셨는지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승려는 물 사발을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고 살짝 몸을 굽히며 답했다.
"소승은 허죽이라고 하며 소림사에 출가했습니다." - P247

‘소림사 주지 현자가 합장으로 천하영웅들을 정중히 청합니다. 12월초여드레 납팔절 숭산 소림사에 왕림해주시어 좋은 인연을에 폭넓게 맺으시고 고소모용씨의 ‘상대가 쓴 방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고명한 풍모도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 P249

"재하는 정춘추라 합니다."
정춘추라는 세 글자가 입에서 떨어지자 현난과 현통,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등 여섯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깜짝 놀라며 서서히 안색이 바뀌었다. 성수노과 정춘추의 악명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던 터라 그가 이렇게 품위가 있고 근엄한 모습의 인물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더구나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P257

총변선생은 농아노인으로 선천적인 농아였지만 굳이 ‘총변선생’이라는 별호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그 문하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귀를 찢기고 혀를 잘렸다는 사실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라는 이들은 모두 다 멀쩡히 들을 수 있고 또한 달변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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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소 모는 평소 영웅을 존경하고 호한을 아껴왔소. 당신 무공이 비록 나보다 못하지만 대단한 영웅호한임에는 틀림없소. 하물며 다 같은 거란인이 아니오? 소 모는 당신을 벗으로 삼고자 하니 그만돌아가시오!"
홍포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 무엇이라고?"
소봉이 빙긋 웃었다.
"소 모가 당신을 벗으로 여기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이오." - P38

"그날 제가 갑자기 독침을 쐈을 때 왜 그랬는지 알아요?" .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출귀몰한 네 심사를 내가 어찌 알아내겠느냐?"
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내지 못했다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어찌 됐건 난 형부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 형부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목숨바쳐 구할 거예요. 아주 언니가 형부한테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이 아자가 언니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할 수는 없죠." - P49

야율기가 껄껄대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만일 내가 대요국 당금의 황제라는 사실을 소 현제가 미리 알았다.
면 나와 결의형제가 되려 하지 않았을 걸세. 소 현제, 내 진짜 이름은 야율홍기耶律洪基네. 내 목숨을 살려준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야."
소봉은 도량이 넓고 호탕한 성격이긴 했지만 평생 황제를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웅장한 장면을 직접 대하니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야율홍기를 향해 말했다. - P61

"형부, 짐작은 해봤어요? 그날 제가 왜 형부한테 독침을 쐈는지 말이에요. 형부를 죽이려고 쏜 게 아니라 그냥 꼼짝 못하게 할 생각이었어요. 제가 시중을 들려고 말이에요."
소봉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
아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부가 꼼짝 못하면 영원히 제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안 그럼 속으로 절 무시하는 형부가 언제든 절 버리고 모른 체할 것 아니겠어요?" - P87

소봉이 소리쳤다.
"황태숙의 명이다. 전군은 당장 무기를 버리고 성지를 받들어라. 황제 폐하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황태숙과 모든 반군 관병을 사면하셨으니 황제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반을 꾀한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 P95

"교봉 이 나쁜 놈! 네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백부님을 죽였다. 네… 네놈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못해 한이다!"
소봉은 그가 교봉이라는 자신의 옛 이름을 부르짖는 데다 그의 부모와 백부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과거 중원에서 맺은 원수일 것이라짐작할 수 있었다.
.
.
.
그 소년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이름은 유탄지다! 나도 백부님과 아버지께 배운 대로 할 수 있다!" - P123

"좋았어! 훌륭해! 진짜 사람 연을 띄웠어!"
유탄지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바라봤다.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줏빛 옷을 입은 미모의 소녀였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자 가슴이 격하게 떨려왔다. 몸은 공중에 두둥실 떠 있고 머릿속은 멍한 상태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 미모의 소녀는 바로 아자였다. - P137

유탄지는 눈물을 줄줄 흘려가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군주, 독장을 연성하고 나면 군주를 위해 죽은 소인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제 성은 유, 이름은 탄지입니다. 철추로 기억하지 마십시오."
아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 네 이름이 유탄지라는 걸 기억하면 되잖아? 넌 나한테 충성을 다했다. 아주 좋아. 넌 정말 충심이 가득한 노복이었어!"
유탄지는 그녀가 칭찬하는 말을 듣자 크게 위안을 받고 다시 두 번 더 절을 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군주!" - P199

유탄지가 무심히 무공 연마를 하다가 <<신족경>>에 그려진 그림에 따라 체내의 빙잠을 불러내고 이리저리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게 만든 것은 재미로 그런 것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력이 발전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던 것이다. - P207

‘소성하蘇星河가 바둑에 정통한 무림의 인재들을 청하니 6월 보름에여남汝南 뇌고산의 천농지아곡으로 왕림하시어 담소나 나누었으면 합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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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 형부! 어서 앉으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자가 만일 이봐요!‘ 혹은 ‘교 방주!’, ‘소 오라버니!‘ 등으로 불렀다면 소봉은 본체만체하고 그대로 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형부!‘ 하며 두 번이나 연달아 부르는 소리에 그는 아주 생각에 가슴이 시려와 대뜸 물었다.
"뭐?" - P369

아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주보의 시체를 바라보고 웃었다.
"저런 얼간이가 소나 말이랑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김승 한 마리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면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봉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악독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지닌 계집애로구나. 내가 왜 이런 계집을 상대해야 하지?‘ - P370

적성자가 아자에게 물었다.
"네 언니는 어쩌다 그런 자에게 시집을 간 게냐? 천하인들이 모두 죽기라도 했던 게냐? 아니면 그자에게 겁탈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처가 된 것이냐?"
아자가 실실 웃었다.
"어쩌다 시집을 갔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언니는 형부의 일장에 맞아 죽었어요." - P399

‘이제 보니 저들의 서열은 입문한 순서가 아닌 무공의 강약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저자는 나이가 젊은데도 대사형 대접을 받고 저자보다 연장자인 수많은 사람이 오히려 저자의 사제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상호 간에 늘 쟁투를 벌여 죽고 죽이는 일이 지속될 텐데 동문 간에 무슨 정과 형제의 의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P406

적성자는 지극히 지친 기색을 하며 몸을 휘청거리다 갑자기 무릎에 맥이 풀린 듯 바닥에 꿇어앉아버렸다. 아자가 말했다.
"대사형, 왜 그래요? 승복하는 건가요?"
적성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이… 이제… 대사형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대는 우리의 대사저입니다!"
모든 제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 P415

소봉은 비록 강호에서 참혹하고 흉악스러운 일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아자처럼 수려하고 활달하며 천진무구한 소녀가 저렇듯 악랄하게 일을 행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 P416

아자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형부, 그럼 가지 마세요. 나도 성수해로 돌아가지 않고 형부와 술이나 마시고 싸움이나 할래요."
"넌 성수파의 대사저야. 성수파 문하에 후계자인 대사저가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제가 대사저가 된 건 속임수였어요. 일단 마각이 드러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예요.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대단한 것도 없어요. 전 그냥 형부랑 술이나 마시고 싸움이나 하면서 놀고 싶어요." - P422

성수파의 암기는 무섭고 악랄하기로 소문나 있어 그의 독침에 적중됐다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희박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자가 자신의 일장에 10여 장 밖으로 날아간 걸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이 일장을 저 아이가 어찌 견디겠나? 이미 죽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양쪽 입가에서 두 줄기 선혈을 흘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 P426

‘오래된 산삼은 장백산長白山 일대의 혹한 지역에서 자생한다고 하던데 운이 좋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자를 속세에 하루라도 더 남겨둘 수만 있다면 저승에 있는 아주도 더욱 기뻐할 것이다. 내가 동생을 잘 돌보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말이야.‘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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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존께서는 안문관 밖 석벽 위에 글을 남기시면서 자칭 성은 소이고 이름은 ‘원산遠山‘이라고 하셨소. 그리고 유문에 시주를 ‘봉아兒‘라고 칭했기에 우리는 시주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남겨두었소. 다만 교가 부부에게 양육을 맡겨야 했기에 그들의 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오." - P63

"아주, 앞으로 나를 따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소와 양을 기른다고 한 말,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소?"
아주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협을 따라 살인방화를 하고 민가를 습격해 약탈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대협을 따르며 갖은 고초를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해도 기뻐할 거예요." - P78

"그 선봉장 대형은 대리국 황제의 친아우로 진남왕에 봉해진단정순이에요."
소봉은 마 부인이 단정순이라는 이름을 대자 자기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수개월 동안 천 리 길을 분주하게 달려와 어렵게 수소문한 이름을 마침내 얻게 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 P99

초승달이 신양의 옛길을 비추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10여 리를 걸어나간 후에야 소봉이 입을 열었다.
"아주, 마 부인을 속여 선봉장 대형이 대리의 단정순이란 걸 실토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고마움을 표할지 모르겠소."
아주가 담담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세경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지만 소봉은 그녀의 눈빛 속에 뭔가 근심과 초조의 빛이 감돌고 있음을 간파하고 물었다. - P104

소봉은 곧 술 열 근을 시켜 대당에 앉아 실컷 들이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며 복수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머리를 굴렸다. 대리단씨라고 생각하니 자연히 얼마 전 결의형제를 맺은 단예가 떠올라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넋을 잃은 채 술 사발을 들고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순간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 P106

소봉은 술을 마시다 언젠가 무석에서 단예와 술 내기를 할 때 그가 육맥신검의 상승기공으로 술을 손가락으로 쏟아내던 일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그 후에 달리기 대결을 펼칠 때도 그가 지닌 신공과 내력은 소봉이 절대 미치지 못할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단예가 무공은 모르지만 내공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대원수인 단정순은 대리단씨의 수뇌 중 한 명이니 무공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이 아닌가? - P107

별안간 꽃나무가 열리며 한 소녀가 뛰쳐나왔다. 온몸에 자줏빛 옷을 입은 아주보다 두 살 정도 어린 열대여섯 살 나이의 그녀는 새까맣고 또렷한 눈동자를 지닌 장난기로 가득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아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어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앞으로 훌쩍 뛰어와서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웃었다.
"정말 예쁘게 생긴 언니네요. 언니가 마음에 들어요." - P143

"주공, 오늘 일은 일시적인 호기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공께 뜻밖의 사고라도 생긴다면 저희가 무슨 면목으로 대리로 돌아가 황상을 뵙겠습니까? 모두 자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봉은 여기까지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소신은 뭐고 황상은 또 뭐지? 속히 대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럼 저자들이 대리 단가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의 그물은 매우 크고 넓다더니 단정순 그 악인을 오늘 공교롭게 마주치게 된 것인가?‘ - P165

"저 숙부는 너 때문에 죽은 게다. 알기나 하느냐?"
아자가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
"사람들이 다 아버지께 주공이라고 부르니까 난 그들한테 작은 주인이잖아요. 노복 한두 명쯤 죽인 게 뭐 대단하다 그래요?"
그 표정 속에는 경멸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 P180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공중에서 다시 우르릉 쿵쾅하며 벼락이 내려치기 시작해 그 번개가 장력의 기세를 도왔다. 소봉의 이 일장에 천지의 거대한 위력이 더해져 격출되자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단정순의 가슴을 강타했다. 순간 그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곧바로 뒤로 나자빠지면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청석교 난간 위로 부딪히며 맥없이 늘어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 P211

바로 그때 번갯불이 다시 한번 번쩍거렸다. 소봉이 손을 뻗어 단정순의 얼굴을 움켜쥐자 손에 잡히는 것은 부드러운 한 줌의 진흙이었다. 한번 비비자 간단히 떨어지면서 번쩍이는 번갯불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아주 똑똑히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주, 아주!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P212

"오라버니한테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누군가 실수로 남을 죽였을 때는 꼭 본심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에요. 물론 저를 해치고 싶진 않으셨겠지만 저한테 일장을 날리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오라버니 부모를 죽였다 해도 무심결에 저지른 잘못이에요." - P219

"설마 그 선봉장 대형이 단정순이 아니라는 말인가? 혹시 저 족자를 단정순이 쓴 게 아닌 건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단정순 외에 ‘대리단이‘라 칭할 사람이 누가 또 있으며 이런 풍류가 넘치는 시사를 써서 이곳에 걸어놓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 부인의 말이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마 부인과 단정순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데다 한 명은 북쪽, 한 명은 남쪽에 있어 무척이나 먼 거리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한 명은 초개 같은 미망인이고 한 명은 왕공 귀족인데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런 거짓말을 날조해낸다는 말인가?‘ - P233

소봉은 다시 마가로 돌아갔다. 집 밖에는 사람이라고는 없이 매우 조용했고 암탉 두 마리만 바닥에 떨어진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들어가자 방문이 열려 있고 방 안 구들장 옆에 온몸에 피범벅이 된 한여자가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마 부인이었다. 소봉은 깜짝 놀랐다. 마 부인은 자신이 밀짚 더미 안에 숨겨두었는데 어찌 여기까지 나왔단 말인가? 그는 황급히 방 안으로 달려갔다. - P322

마 부인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초조함, 흉악함, 악독함, 원한, 고통, 분노 같은 갖가지 추악한 표정이 미간과 입술, 코 사이에 모두 모여 있을 뿐 과거의 곱고 나긋나긋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미모의 가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감지를 못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미모를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죽음에 이르러 거울 속에서 자신의 이런 추악한 몰골을 보게 된 것이다. - P339

"원수를 갚으러 가야 하지만 원수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살아생전에는 그 원수를 절대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아, 알았다. 마 부인이 그 원수를 알고 있었는데 제가 화를 돋워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는 누군지 모르게 된 게로군요. 재미있네요. 교방주는 무공이 고강하고 위대한 명성이 널리 퍼져 있는 분인데 내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만 셈이네요?" - P342

얼마 가지 않아 북풍이 몰아치며 돌연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소봉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이제 그동안 쌓인 원한과 억울함을 설욕할 기회란 없고 원수를 찾아 복수할 수도 없다.
는 생각이 들자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터라 가슴 가득한 근심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해탈이라 여겼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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