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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평점 :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소매상, 유시민
유시민이란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한창 대학생일 때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국회의원, 장관 등 정치인의 행보를 하면서 욕도 먹었지만 그만큼 뚜렷한 족적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는 '썰전'이라는 정치·시사 예능에서 어려운 시사를 쉽고 명확하게 풀어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풍부한 지식, 논리적이고 쉬운 설명,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정치관 때문에 많은 팬들은 유시민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이미 절대로 정치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의견을 피력한 것을 보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화려한 사회·정치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시민은 '작가'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하여 방송 프로그램이나 미디어 매체에서는 '유시민 '작가'라고 소개를 받는다. 유시민은 청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도 바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렇게 지식을 쌓았는지 인문학적 소양이 굉장히 뛰어나다. 게다가 논리적인데다가 전달력도 정말 좋고, 이전에 보였던 거부감을 일으키는 날카로운 이미지까지 누그러져서 대중을 위한 강연에 최적화되었다. 일단 유시민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시사교양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시청률이 보장이 된다. 유시민 작가는 이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소매상 중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유시민(1959 ~ ) 대한민국의 작가, 전 16대, 17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이것은 '역사 서술의 역사'이다
처음 책의 제목인 <역사의 역사>를 봤을 때는 역사에 관한 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는데, 책의 컨셉이 정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책을 구매하기 전에 목차를 살펴 보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정체를 바로 파악할 수가 있다. <역사의 역사>는 멀리는 그리스 시대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헤로도토스로부터 가깝게는 <사피엔스>를 지은 유발 하라리까지, 역사가들이 기술해 놓은 역사책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목차만 읽는 것으로도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역사'는 무엇인가? '인간과 사회의 과거에 대해 문자 텍스트로 서술하는 내용과 방법이 변화해 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역사책과 저자들이 역사를 쓰는 관점과 방식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처음은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전통적인 역사기술 방식인 기전체를 고안해 낸 사마천의 <사기>, 그리고 이슬람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설>을 쓴 이븐 할둔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통 예상할 수 있는 헤로도토스와 사마천 이외에 이븐 할둔을 처음 세 개의 장에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시작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세 명의 사가를 설명한 후에는 작가는 순식간의 시간을 건너 뛰어 19세기로 넘어와 랑케로부터 토인비 등 명성만 익히 들어 본 사람들이 왜 유명하고 그들이 어째서 뛰어난 역사학자들인지 안내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은 <총·균·쇠>를 쓴 제레미 다이아몬드와 가장 최근에 <사피엔스>라는 책을 낸 유발 하라리까지를 다룬다.
시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역사의 역사>는 그 '방식'을 유기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시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역사의 역사>는 그 '방식'을 유기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쉽고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유시민은 <역사의 역사>에서 모두 열다섯 명의 역사서 저자와 그들의 책,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가 워낙 인문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각 역사서의 기본적인 배경, 역사 서술의 방향, 저자의 의도, 장점과 한계 등 해당 역사서에 대해 일반인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고도 넘칠만큼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열다섯 명의 책을 모두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반인이라면 <역사의 역사>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보통 수준은 넘어가는 역사서에 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
개별 역사서를 다루고 있지만 책을 읽는 중에 역사 서술의 흐름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더욱 뛰어난 점이다. 한 장에서 한 권의 역사서를 설명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과 뒤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통사로서의 역사 서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흔한 다이제스트 방식으로 나열된 책들에 비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신채호, 박은식, 백남운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로도 기억해 두는 것이 당연하다.
풍부한 지식을 쉽게 전달한다
<역사의 역사>는 정리하는 책이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대단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 서술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그 배경이 되는 지식까지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았다. 우선 열다섯 명이 쓴 (두껍고 어려운) 책을 저자 나름대로 이해할만큼 충분히 읽고 소화해낸 것만 해도 내가 보기엔 대단하다. 더해서, 글쓰기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집필했던 만큼, 내용이 어려울 수는 있어도 문장이 조잡해서 읽기 짜증나는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역사의 역사>를 읽으면서는 국어실력이 모자라 좋은 지식을 허접한 그릇에 담아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유시민은 최고의 지식소매상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세 권의 책.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역사의 역사>를 읽고 보니 이 책들에 대한 느낌이 새롭게 다가온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정독을 해야 할 것 같다.
정리의 힘, 읽을 책이 늘었다
이 책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흔히 말하는 역덕들을 위한 책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깊이 들어가는 면이 있다. 역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여러 면에서 좀 애매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데, 저자에 대한 믿음으로 이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걸 보니 놀랍다. 굉장히 정리를 잘해 놓은 수험생의 노트를 빌려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현미로 지어 놓아서 좀 거칠겠지만 꼭고 씹어 보면 고소한 맛이 올라오고 건강에도 좋은 쌀밥같은 책이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그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독서가 끝나는 책이 있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독서욕을 자극해서 다른 책을 구매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 <역사의 역사>는 전형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소개된 책 중에서 1/3 정도는 읽은 것 같은데.. 읽을 책이 늘었다.
★★★★☆
랑케 이후 헌팅턴까지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시기 역사학자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 본 점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것은 이 책에서 인용의 기준이 되는 책이 원서가 아니라 번역본이었다는 점이다. 역사에 관한 책을 보다 보면 반드시 원서를 읽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언어까지 공부하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서를 읽은 것과 다름없는 좋은 번역본이 발간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원서를 인용하는 현학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당연히 추천한다.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반적인 역사지식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극 추천한다. 하지만 역사 자체(동서양사라든지, 인류사나 문명사)를 알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역사>에서 소개한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한 번쯤 서점에서 살펴 보고 고민한 후 구매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 책읽는 습관이 없는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아니다.
부록 <역사의 역사>에서 소개되어 있는 책 목록
<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200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천병희 옮김, 숲, 2011
<사기>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1
<역사서설> 이븐 할둔 지음, 김호동 옮김, 까치, 2003
<무깟디마 1·2> 이븐 칼둔 지음, 소명출판, 김정아 옮김, 2012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 레오폴트 폰 랑게 지음, 이상신 옮김, 신서원, 2011
<강대 세력들 · 정치 대담 · 자서전> 레오폴트 폰 랑게 지음, 이상신 옮김, 신서원, 2014
<공산당 선언> 독일어 원전 번역 인용
<조선상고사 / 한국통사> 신채호 · 박은식 지음, 윤재영 역해, 동서문화사, 2012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상) · (하)> 박은식 지음, 남만성 옮김, 서문당, 1999
<조선사회경제사> 백남운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9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까치, 2015
<역사의 연구 Ⅰ · Ⅱ> 아놀드 J. 토인비 지음,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서구의 몰락 1 · 2 · 3> 오스발트 A. G. 슈팽글러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5
<문명의 충돌>, 새무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김영사, 2016
<총, 균, 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2005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