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1 - 미래에서 온 살인자,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미래의 부산은 당연히 디스토피아이다..

가까운 미래에 부산에 엄청난 쓰나미가 밀려 들어 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자들은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져서 안전한 높은 곳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물이 빠져 나간 후 땅이 드러난 곳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다. 쓰나미는 또다시 해안가를 덮치고, 또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부자들은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 남을 수 없다. 이제 돈은 '상징적 의미'로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의미'로서 삶의 조건이 되어 버렸다. 배경이 장황하지만 소설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냥 미래에 부산의 풍경은 어둡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난 2063년, 고아로 자란 40대 중반의 이우환은 식당 보조로 일을 하고 있다. 식당의 사장은 80이 넘은 노인인데, 어릴 때 먹어 봤던 곰탕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우환에게 과거로 가서 곰탕 만드는 법과 곰탕 재료를 사서 오라고 한다. 40~50년 정도 지나면 타임머신이 있을 법도 하다. 어쨌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우환은 과거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타임머신을 탔다.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은 운이 좋다. 그리고 또다른 운이 좋은 사람은 이우환과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간 이제 갓 성인이 된 것같은 김화영이다. 13명의 정원 중에 깨어난 것은 이우환 뿐이었는데, 김화영은 운좋게도 이우환이 깨워서 살 수 있었다. 이우환이 곰탕을 배우러 온 것에 비하면 김화영은 그래도 좀 이유가 그럴 듯하다.

 


사람 죽이러 왔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 목숨걸고 과거로 올 가치가 있지. 김화영은 미래에서 어떤 노인의 부탁을 받고 '열 둘'을 죽인 사람을 죽이러 왔다.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른다.

 

작가 김영탁,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곰탕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고, 다른 곳에서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우환은 미래의 주방장이 준 약도에 의지해서 곰탕집을 찾고, 그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무뚝뚝한 주인, 고3이면서 말썽만 피우는 아들, 그리고 그 여자친구. 처음엔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느낌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과도 친해지고 주인 아들과 여자친구와는 더 친해진다. 아들의 이름은 이순희, 여자친구의 이름은 유강희. 자신을 버린 엄마와 아빠의 이름이다. 처음에는 설마설마했지만 자신을 고아로 자라게 한 부모가 맞다. (도대체 남자와 여자의 이름이 같은데, 부모가 아닐 확률이 얼마나 되지?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부모라고 확신을 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이순희도 그렇고, 유강희도 그렇고 모범생들은 아니다. 주요 교통수단이 오토바이 이고, 귀가 시간은 보통 새벽이다. 이순희는 더 심해서 학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다. 어쩌면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막장 부모인 셈이다. 하지만 할아버지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던 두 아이는 이우환에게는 마음을 열고 이우환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곰탕을 끓여 준다.


곰탕집은 이렇게 훈훈해 지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강력사건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다. 이순희의 학교에서는 둥근 구멍이 뚫리면서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시신의 머릿속에는 현대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칩이 꽂혀 있다. 용의자를 잡아 취조를 하던 경찰서에도 똑같은 둥근 구멍이 뚫리면 피의자가 사망을 한다. 한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해 간다. 치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는 옆방에 있는 얼굴 가죽이 없어진 다른 환자를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아들은 아파트에 잘 살고 있다.

 

주인공 이우환은 겨우 곰탕 끓이는 법을 배우러 목숨을 걸고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여행을 한다. 미래에서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는데, 현재로 와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타임머신은 등장하지만 SF판타지소설은 아니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내가 보이니>도 그랬는데, 이 책도 장르를 배반하는 소설이다. 타임머신이라는 가장 SF에 어울리는 소재를 이용해서 내용을 전개해 나가지만 시간여행이 주는 장르적인 쾌감에 주력하지는 않는다. 타임머신 외에도 소설 속에서는 (굉장히 그럴듯한 설정과 함께) 공간이동도 등장하고 미래에서 왔을 수밖에 없는 무기도 등장한다. 하지만 읽는 동안 이 책이 SF소설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빴다는 건 아니다. 단, 김화영이 죽이려고 했던 '열두명을 죽인 살인자'가 이우환임이 밝혀지는 부분은 충분히 예상가능하긴 했지만, 시간여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미를 잘 살린 설정이다.


미래에서 현재로 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이 소설은 이런 궁금증에 상상력을 더해서 개연성을 부여해 준다. 미래에서 왔든 과거에서 왔든 사람이 살려면, 살 곳이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하다. 미래에서 현재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면 살아가는데 딱히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도 없다. 오히려 불법체류자보다도 못한 신분으로 인해서 사는데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우환은 미래에서도 하층민이었고 현재로 왔다고 해서 팍팍했던 삶이 나아질 기미도 없다. 부모를 만났지만 밝힐 수도 없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건 곰탕을 끓여 주는 것밖에 없다.


최초의 시간여행자였던 박종대는 이후에 오는 시간여행자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와중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지만 그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미래에서 온 사람들에게 신분을 주기 위해서 박종대는 얼굴을 바꿔쳐 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미래에 대통령이 될 유력한 정치인과 얼굴을 바꾸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는 미래인들이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우주인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지구인인 척 하고 사는 영화도 있었으니 비슷한 상상력인 것 같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타임머신인 <백 투 더 퓨처>의 드로리안. 이 책은 시간여행을 다루기는 하지만 시간여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타임패러독스는 정교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여행 SF소설에서 볼 수 있는 지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힘들다.


몇가지 궁금한 점들..

책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곰탕>은 원래 카카오스토리에서 연재가 되었던 작품이다. 긴 기간 동안 연재를 하는 작품을 보면 설정에 구멍이 생기게 마련인데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몇가지 있다. 내가 읽으면서 지나쳤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미래의 주방장은 이우환이 찾아가는 곰탕집 주인이 이우환의 할아버지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건 우연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제일 궁금한 건 김화영을 보낸 사람은 누구이며, 왜 이우환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는지이다. 작가가 처음에 뭔가 설정을 해 놓았다가 나중에 잊은 것이 아닌가 싶다.


미래에서 오는 타임머신은 배의 형태로 바다에서 출발해서 바다에 도착한다. 제 때 깨어나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된다. 바다에 도착한 시간여행자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수영실력은 필수다. 묘한 곳에서 설정이 세세하다.

 


★★★☆

위에서도 썼지만 이 책은 SF적인 상상력으로 쓴 것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기대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은 아니다. 시간여행으로 발생할 수 있는 파라독스, 그로부터 발생하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쾌감같은 걸 기대하면 실망할 것 같다.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엮여서 치밀하게 생각을 해 가면서 읽어야 하는 지적인 즐거움에 치중한 소설도 아니다. <곰탕>은 주인공이 고아이고 현재로 와서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는 가족애를 그리는 소설이고, 미래에 사는 사람들이 현재로 숨어 들어서 (불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SF라기보다는 기름때가 다 벗겨지지 않은 솥에 한참 끓여내는 <곰탕>같은 소설이다. SF에 현실을 설득력있게 접붙이려면 어쩔 수 없는 결과인 것 같다.


본격 SF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으므로 추천할 만하다.
타임머신이라는 멋지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소재를 생각하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충분히 한 권으로 낼 수 있는 책을 폰트 키우고 판형 작게 해서 두 권으로 나눠서 낸 것은 좀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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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b 2018-08-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래의 주방장은 이우환이 찾아가는 곰탕집 주인이 이우환의 할아버지라는 건 알고 있었겠지요 ㅎㅎ 그러니 어떤 이유로 보냈던 것일 테고요. (2권에서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더 읽어보심 찾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화영을 보낸 사람, 왜 이우환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는지도 2권에 나와요. 그 이유와 관계가 밝혀지는 지점들이 이 책을 남다르게 하는 것이 아녔나 싶습니다. 저도 여러 번 읽으면서 숨겨둔 복선의 답을 찾았고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은 책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