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으로 본 세계사 - 판사의 눈으로 가려 뽑은 울림 있는 판결
박형남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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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018 격동의 사법부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재판장인 이정미 판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했던(후무하기를 바란다) 대통령 탄핵 결정을 내렸다. 국정농단으로 우리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연인원 수천만 명이 촛불집회를 벌이던 참이었다. 이 판결은 거꾸로 흘러 가던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았고, 한때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는 이제 구치소에 구속되어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하게 헌법재판소는 사법부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이긴 하지만 판사가 판결을 한 것으로 생각하면, 박근혜의 탄핵판결은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파급력이 큰 판결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마저 구속되어 1심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두번째로 두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구속된 꼴을 지켜보고 있다.

역사를 바라볼 때, 중요한 사건을 짚어가면서 보는 것은 당연하다. 《재판으로 본 세계사》는 그 중에서도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재판을 살펴보는 보기 드문 책이다. 게다가 저자는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이다. 재판에 대해서만큼은 가장 전문가인 판사가 쓴 책이기 때문에 읽기 전부터 큰 기대가 되었다. 책에서는 개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재판들을 한 번에 모아서 역사순으로 보니 정리도 잘 된다. (이거 설마 혹평을 쓰면 고소당하거나 그런거 아냐?)

 

저자 박형남. 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60 ~ )


한 장에 재판 하나

《재판으로 본 세계사》은 모두 15장이다. 각 장은 역사적으로 의마있고 유명한 재판을 담았다. 각장의 구성도 비슷하다. 첫 페이지에서는 각 재판이 벌어진 시기, 재판 당사자, 쟁점, 결론과 역사적인 의미를 간단하게 소개해서 재판의 개요를 미리 머릿속에 넣어 놓고  읽을 수 있다. 각 장은 먼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재판 또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본격적으로 주제가 되는 재판의 발단, 경과, 결론이 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할 문제와 역사적, 법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약 400페이지의 책에 15개의 재판 에피소드가 담겨 있으니 각 에피소드는 약 30페이지 정도이다. 끊어서 읽기 편하다.


현직 판사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려고 하니 기대는 되었지만 처음엔 좀 딱딱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현직 판사가 쓴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재판으로 본 세계사》의 저자인 박형남 판사는 법률만 아는 편협한 판사가 아니다. 역사 지식이 해박하고 당시 사회상까지 자세히 살펴보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글을 풀어낸다. 쉽게 읽으면서도 각 재판의 배경과 쟁점을 법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어서 유익하다. 거기에 덧붙여서 각 장의 구성이 똑같고 설명이 깔끔해서 이해가 안돼서 앞장을 펼칠 일이 별로 없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에서는 마녀사냥으로 37명의 무고한 여자들이 생명을 잃었다.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다양한 판결들

《재판으로 본 세계사》에는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들을 가려서 실어 놓았다. '의미있는' 판결이지 꼭 '올바른' 판결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숨어서 내뱉었다는 갈릴레이의 판결도 중요한 판결로 등장한다. 미시사로 유명한 '마르탱 게르'의 귀환을 다룬 흥미진진한 재판 기록도 있고, 책의 뒤로 갈수록  근로시간 제한, 참정권, 인종차별, 악의 평범성, 미란다 원칙 등 유명하면서도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계적인 판결들이 많이 실려 있다. 때로는 지금의 상식에 비추어 봐도 올바르게 판결이 된 것이 있고, 어떤 판결들은 도대체 말이 안되는 판결도 있다. 하지만 옳든 그르든 하나같이 중요한 판결들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판결들이 이 책 하나로 굴비 꿰이듯이 엮여나가면서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온 방향을 조망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1859 ~ 1935)

 


재판, 판결, 사회의 마지막 보루

책을 읽으면서 가장 관심을 두고 읽은 부분은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재판이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이미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재판에 다시 한 번 꽂힌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사법부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판사이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 판사는 개개인이 독립적인 기관이면서 판사 본인의 양심에 맞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보면 판사가 법과 양심이 아닌 다른 것을 고려해서 판결을 내린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는 그 '다른 것'이 정치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사법부의 이익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고,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재판은 최종판결이 나면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저자가 쓴 다음 해설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드레퓌스가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왜 12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형사사건이 유죄로 확정되면 재심으로 바로잡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분열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판결을 번복하는 경우 엄청난 정치, 사회적 갈등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법적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p. 262


위의 해설이 저자의 의견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판사들의 생각을 해설해 놓았을 것이다. 판결에서의 모든 문제는 법적 논리만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법적 논리가 아닌 정치적 상황, 전관예우, 돈, 권력 등이 결부되는 순간 판사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사회는 마지막 보루를 잃어 버려 사회적 안정성이 치명적인 해를 입게 된다. 사회적 안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재판의 당사자인 피의자는 인생을 잃게 된다. 법이라는 객관적인 잣대에 기댄 판결만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이런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잘못된 판결로 인해 인생을 망친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에르네스토 미란다 Ernesto Miranda가 서명한 미란다 카드. 미란다는 출소 후 미란다 카드에 사인을 해서 1달라 50센트에 팔았다.


재판에 관한 책을 읽은 김에..

우연히도 이 책이 나온 시점으로부터 내가 읽은 시점에 우리나라는 판사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다. 쓰레기같은 양XX라는 전임 대법원장은 판결을 가지고 권력과 거래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파헤칠 것을 많은 국민들이 원하고 있는데 양XX의 뒤를 빨던 판사들은 정당한 영장을 발부하지 않음으로써 검찰의 수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사법부가 이런 상태라면 어떤 국민이 자신이 받는 판결에 대해서 승복을 할까? 유죄를 선고받은 피의자가 판사들이 무슨 권위와 권리로 나에게 유죄를 내리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판사의 권위는 공평하다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이미 많은 국민들은 판사들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의 사법부 적폐를 드러내지 않는 한, 아마도 언젠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흥미있게 읽을 수 있고 유익하기도 하다. 책이 어렵지도 않고 끊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꽤 두꺼운데도 불구하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대체적으로 모든 재판을 쉽게 읽을 수 있는데, 법적인 논리를 따지고 드는 재판을 설명한 장은 깊이 생각하면서 그 안의 논리를 읽어나가야 해서 좀 어려운 편이다. (나의 리갈 마인드가 많이 부족하다). 책의 저자인 박형남 판사가 누군지는 모른다. 그저 국민에게 신뢰를 받는 멋진 판사가 쓴 좋은 책을 읽었기를 바랄 뿐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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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 교양으로 읽는 마약 세계사
오후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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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다

나는 마약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마약을 본 적도 없고 기껏해야 영화나 TV, 소설같은 미디어에서 간접적으로 접해봤을 뿐이다. 물론 술, 담배, 카페인같은 것들을 넓은 의미의 마약으로 분류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마약을 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주변에서 마약을 했다는 사람을 본 적도 없다. 그만큼 마약은 우리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지간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불법적인 물건이다.


경험하기 힘들다고 해서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뽕'맞은 것처럼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마약 튀김', '마약 떡볶이'에 열광하기도 한다. 수많은 영화에서는 마약을 하고 눈빛이 변한 사람을 볼 수 있고, 화학교사가 마약을 만들어 판매하는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는 명작이라며 열심히 찾아 본다. 간혹 연예인들이 마약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 '뽕쟁이'라며 성토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말 마약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마약에 익숙하고 그만큼 죄악시한다. 이 책은 발칙하게도 그런 마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대마초. 마리화나라고도 한다. 가장 오래된 마약 중에 하나이다. 말려서 담배 모양으로 말아서 피우는 방식으로 흡입한다.


마약에 대한 자세하고 체계적인 설명서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우선 마약의 기원부터 설명한다. 모든 것들의 기원이 그렇듯이 마약도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마약이 인간의 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흥미로운 가설도 소개한다.


아니, 우리 조상이 약을 빨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특이점을 넘어설 수 있었겠어?
p.13

이후 역사적으로 마약이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지 설명을 한다. 고대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신관 혹은 무녀들이다. 이들은 일반사람들이 할 수 없는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야 했고, 이 때 많이 사용된 것이 천연마약이다. 마약에 취한 행동, 말투 등이 일반인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신의 사자로서 행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종교의 시대 이후 기독교가 서양의 주류 종교로 등장하고 마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는 과정을 설명한 후에 마약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한다.

 

일본의 나가이 나가요시가 발견한 화학물질. 감기약을 개발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가장 강력하고 중독성이 강한 마약 중에 하나이며, 주사기로 주사하는 방식으로 투약한다.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읽기 쉬운 마약 매뉴얼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정말 마약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닌 독자'가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마약의 기원과 종류, 자세하진 않지만 어떻게 유통이 되는지, 마약의 역사, 마약 카르텔의 형성과 대표적인 인물, 마지막에는 마약을 소재로 한 영화까지 소개한다. 저자 소개를 읽어보면 흔히 말하는 서브컬쳐 중에서도 마약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깊게 파고 들어간 덕후의 느낌이다. 어떤 팟캐스트 방송에서 연재한 내용같은데 찾아 보려고 했으나 찾지는 못했다.


정말 자세히, 그것도 마약의 긍정적인 면과 사회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논조로 썼기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도대체 어떤 약을 빨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리가.. 하지만 작가가 마약을 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극구 부인하는데다가 경험에 의한 서술은 하지 않고 있으니 믿어 주기로 하자.


어쨌든 이 책 한 권이면 교양 수준에서 마약에 대해서 알아야 할 상식은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어체로 씌어 있어서 가독성이 좋다. 마약에 대해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덕후가 썰을 풀듯이 써 놓았기 때문에 이해도 쉽게 된다.

 

LSD를 복용하면 강력한 환각작용을 일으키며, 모든 감각기관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작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흡수시켜 말린 뒤에 유통되고 이 종이를 혀에 올려 놓아 흡수하는 방식으로 복용한다.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마약에 대해서 굉장히 우호적이다. 읽기 전에는 호불호를 떠나서 가치중립적으로 마약에 대해서 다룰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그렇지 않다. 굉장히 우호적이고 마약을 정신에 대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느끼도록) 묘사한다. 마약의 무해하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기도 한다. 공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 좋은 마약을 금지시키는 것을 비난하는 (것 같은) 논조'를 계속 유지한다. 난 이런 태도에 대해서 찬성하지는 않지만 그런 주장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 보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책의 95%를 마약에 대해 긍정적으로 써 놓고서는 마지막 5%에서 '그렇다고 내가 마약을 권하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불만이다. 책의 내용을 마약이 좋은 것이라고 (느끼게) 써놓고 막판에 한 발 뺀다. 비겁해 보이는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끝까지 밀어 붙일 경우 법을 어기는 것이 두려웠다면 최소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태도를 취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이 책은 이 점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멋진 책에서 덕후가 마약에 대한 썰을 풀어 놓은 책에 머무르고 말았다. 많이 아쉽다.


더불어서 마치 마치 쿨병 걸린 것처럼 쓰는 글쓰기 방법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덕후들이 엄청난 지식을 뽐내듯이 글을 쓰고 있는데 이런 태도의 글은 서브컬쳐 계열의 커뮤니티에 가면 굉장히 많다. '나는 이만큼 진보하고 알고 있는 사람이니 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의 세계를 평가하지 말라'는 태도. 당연하다. 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에 마약에 대해서 저자만큼 관심가지고 깊이 파고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드니 빌뇌브 감독작. 시카리오. 마약조직을 퇴치하려는 요원들을 그리고 있다. 명작이라고 해서 보려던 참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관심이 간다.


★★★★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감이 들기는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마약 전반에 관한 상식을 알 수 있고 마약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글쓰기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쉬운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저자가 쓰는 방식의 글쓰기도 여러가지로 연습해 봤는데, 이런 글쓰기가 반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뜻밖의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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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신화여행 - 신화, 아주 오래된 이야기
김헌선 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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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나에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익숙한 신화는 그리스 신화이다. 로마신화는 그리스신화에 부속품처럼 딸려서 약간의 변용이 이루어 졌을 뿐, 단독으로 출판이 되는 경우도 드물다. 거의 독보적인 인지도를 가진 그리스 신화의 뒤를 잇는 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북구 유럽의 신화이다. 특히, 너무 흔해서 흥미가 떨어지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조금은 생경하면서도 서사구조가 탄탄한 유럽의 신화는 최근 많은 서브컬쳐 장르의 소재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와 북구 유럽의 신화가 1,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나라의 수보다 더 많은, 민족의 수만큼 많은 신화가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신화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단편적으로 흩어져서 통일된 서사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에 myth라고는 해도 mythology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그리스·로마신화를 가장 먼저 읽어 보고 이후 북구 유럽 신화, 한국의 신화도 꽤 읽어 봤다. 그외에도 중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신화 등으로 차츰 읽는 범위를 넓혀 갔는데, 신화 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신화는 수메르신화로부터 시작하는 고대 중동의 신화였다. 특히 어릴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처음 수메르 신화를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신화의 원형도 그 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었고, 이사야가 물리쳤던 바알과 아세라 신들이 사실은 중동에서는 굉장히 긍정적인 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중동신화여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에 큰 영향을 끼쳤던 고대 중동의 신화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이다.

원통형의 인장을 굴려서 점토판에 찍은 엔키(오른쪽에서 두번째)의 모습. 엔키는 수메르 신화의 최고신인 안의 둘째 아들로 실제적인 최고신인 엔릴의 동생이다. 대홍수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포지션과 비슷하다.


강연을 옮겨놓은 책

《중동신화여행》은 2017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원에서 주관한 '신화와 예술 맥놀이 - 중동신화여행'에서 강연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일곱 명이고 책의 내용도 강의체로 되어 있다. 중간에 간혹 현장에 없었던 사람은 느끼지 못할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크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형식의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주제의 핵심을 짚어내면서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렇다.

 

길가메시 부조. 길가메시는 수메르 신화에서 처음 나타나 바빌론 신화에까지 등장한다. 친구인 엔키두가 죽은 후 불사가 되기 위해 여행을 해서 거의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잠깐의 실수로 불사의 기회를 놓쳤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영웅이다.


중동신화의 핵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

일곱 명의 강연자는 처음에 기조 강연을 통해 신화를 보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한 후 각자가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중동신화에 대해서 강연한다. 그러니까 책은 모두 8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하나의 독립적인 강연 내용이다. 각 강연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수메르의 엔키 신화, 메소포타미아의 이난나 신화, 길가메시 이야기, 에누마 엘리쉬와 쿠쉬나메까지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한 신화 전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각 신화의 중요한 신(또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길어야 2~3시간 정도 되었을 시간에 신화 전체를 다룰 수는 없었을 테니 집중적으로 한 명의 신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각 장은 신화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집중적으로 개별 신에 대해서 안내하는데 해당 신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신화를 설명하기 때문에 신화의 대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특히 몇 번 읽어 봐서 익숙했던 수메르나 이집트의 신화보다는 익숙하지 않았던 쿠쉬나메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한 6, 7장의 내용이 나에게는 관심이 더 많이 갔다.

 

이난나. 아카드어로는 이슈타르. 릴리스라고도 하고 금성을 상징한다. 판본에 따라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저승을 다녀 온 것으로 유명하다.


쉽게 접하기 힘든 중동신화,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할 수도..

고대중동신화는 접하기 쉽지 않다. 내가 처음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때는 적당한 책이 없어서 백과사전을 뒤적이면서 서사가 아닌 사전적으로 신들을 기억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인기있는 그리스나 켈트 신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많은 책들이 나와 있고, 원서를 바로 번역해 놓은 좋은 책들도 있다. 그리고 개별 신화를 넘어서 서사구조를 가진 신화는 내용이 꽤 많아서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이 책 한권으로 중동신화를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상식선에서 충분할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중동신화에 관심이 많이 생긴다면 더 많은 책을 찾아 보고 보충을 하면 될 것이다.

 

오시리스.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죽은 자와 부활의 신이다. 아내는 이시스. 동생인 세트가 살해하여 몸을 산산조각을 냈으나 아내인 이시스가 조각을 찾아 몸을 다시 맞추어 부활했다. 단, 성기만은 찾지 못해서 진흙으로 빚어서 붙였다고 한다. 오시리스의 피부는 녹색이고 한 손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홀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생산을 상징하는 도리깨를 들고 있다.


★★★★☆

꽤 많은 신화에 관한 책을 읽어 봤는데 《중동신화여행》은 그 중에서도 쉬우면서도 핵심을 잘 소개하는 책이다. 그리고 중동신화 전체를 조망해서 설명한 점에서 중동신화 입문용으로 굉장히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혹시나 해서 찾아 보니 같은 시리즈로 되어 있는 신화에 관한 책들이 몇 권이 더 있다. 아마도 조만간 구매해서 읽어 보게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 속에 실려 있는 그림이 좀 컸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좀 남는다.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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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콘롤 2021-03-05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알과 아세라를 물리쳤던 유대 (정확히는 북 이스라엘) 선지자는 이사야가 아니고
엘리야입니다.

한담 2021-03-05 18: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잘못 써 놓았네요. ^^

로콘롤 2021-07-1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이 책을 사서 완독했습니다.

다만 수메르 신화가 성경 창세기의 원형처럼 보이는건
이스라엘 성경의 성문화가 수메르보다 늦었던거죠.

시장에 상품 하나가 출시되었다고 봅시다.

중국산 짝퉁이 재빠르게 시장을 장악합니다.

소비자들은 짝퉁이 오리지널인 줄 압니다.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 잊혀지는 신앙과 사라진 신들의 역사 지도에서 사라진 시리즈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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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화와 종교

역사에 관심이 많다. 워낙 기억력이 나빠서 읽은 책들의 내용은 며칠 지나면 새까맣게 잊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바로 몇 페이지 전에 읽은 것도 기억 못할 때가 많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많고 기억력은 나쁘니 어떻게든 기억을 대체하기 위해서 최대한 읽은 것들을 정리해 놓으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고, 지금도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있다.


역사에 대해서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신화 덕분이다. 신화를 읽다가 실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대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신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니 당연히 종교에도 흥미가 생기고 결국 점성술, 기호, 상징 등 관심 분야가 점점 넓어졌다. 이건 내 얘기다. 내 얘기를 처음에 자세히 쓰는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나와 비슷한 단계를 거친 것 같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은 내가 관심이 깊은 역사와 종교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은 책이다. 제목만 봐도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저승에서 죽은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지옥에서 데리고 나오는 오르페우스. 천신만고 끝에 지옥에서 아내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허락받은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 보면 안된다는 하데스의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 봐서 결국 아내를 데리고 이승으로 나오는데는 실패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단순한 등장인물 중에 한 명이지만 그를 경배하는 오르페우스 종교가 책 속에 소개되어 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종교 이야기

책 제목부터 굉장히 흥미를 끈다. 뭔가 신비한 기운이 책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그나마 익숙하고 이슬람만 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것보다 더 익숙하지 않은 '사라진 종교들'에 대해서 다룬다고 하니 굉장히 기대가 많이 됐다.


책은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장은 인류 초기의 종교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 장에서 설명하는 종교는 대체로 고대 근동의 종교들로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인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연관성이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조로아스터 교에서 갈라져 나온 미트라교에 관한 설명도 나오는데, 미트라는 알고 있었지만 미트라가 미륵불의 원형이라는 건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첫 장은 문명의 기원과 관련있는 종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익숙한 종교가 꽤 많다. 반면에 한때 번성했지만 다른 종교와 세력 싸움에서 패배해서 사라진 종교들을 다룬 둘째 장과 다른 종교들과는 많이 다른 교리를 지녀서 독특한 느낌이 있는 종교들을 다룬 세번째 장에 나온 종교들은 좀 생경하다. 이 책을 집은 이유는 바로 2, 3장을 읽기 위해서였고,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미트라. 슬픈 얼굴을 하고 황소를 죽이는 모습이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황소는 고대 이란의 종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땅에 '식물'과 '황소'와 '사람'을 만들어서 식물은 으깨고 황소와 사람은 죽이는데 식물에서는 모든 꽃과 농작물, 나무가 싹트고 사람에게서는 당연히 모든 사람이 나타나고, 황소에서는 모든 동물들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즉, 모든 동물의 대표가 황소이다.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것도 신의 명령을 받은 것인데 미트라교 신화에 의하면 황소가 죽은 후에 황소는 달로 변하고 미트라의 외투는 하늘로 변했으며 황소의 꼬리와 피에서는 곡물과 포도가, 황소의 생식기에서는 생명의 씨가 나타나 그것들이 섞여서 모든 생물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미트라가 미륵불의 원형이라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분명히 역덕이다.

지은이인 '도현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앞표지 날개의 저자 소개에서 '어릴 때부터 역사책을 좋아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가...'가 눈에 띈다. 졸업한 학교에 과가 명시되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역사를 전공한 건 아닐 것 같다. 추정해 보면 흔히 생각하는 역사 덕후가 분명해 보인다. 더불어서 서브컬쳐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도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역덕이 좋아할 만한 책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다른 책(예를 들면, 판타지 소설 같은...)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다가 내용이 쓸모있는 자료가 많아서 책을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은 이런 지은이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우선 굉장히 접하기 힘든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종교에 꽤 관심이 있는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종교, 신화에 대한 내용들이 상당히 흥미를 끌었다. 역사적인 배경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적는 것도 특징인데, 특히 앵글로-색슨 족의 고대 신앙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종교보다 역사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다. 종교를 설명하는데 역사가 따라오지 않을 수는 없지만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다'. 책의 제목과 소제목만 봐도 흥미가 생기고, 내용도 흔히 접하기 힘든 내용이라 읽으면서 책 속에 쭉 빨려 들어간다. 주변에서 책 좀 읽는 사람들 역시 책 제목만으로도 흥미있어 했다.


책이 좀 단정적이고 크로스체크가 제대로 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좀 든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본격적으로 역사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읽은 몇 권의 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지식을 쌓는 것과 그 지식 이면에 흐르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경우를 많이 봤다. 꼭 저자가 그럴 것이라는 건 아닌데,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단정적인 표현이 눈에 좀 거슬리고 좀 더 자료를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망치를 이용해서 링을 제거하고 있는 드루이드교 사제.


★★★★

신화와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좋아할 책이다. 흥미진진한 소재를 풀어냈고, 풍부한 역사지식으로 주변 이야기도 쉽게 풀어냈다. 굉장히 지엽적인 종교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다른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어 보려고 한다. 단지, 정리하면서 씌여진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지는 한계 역시 뚜렷하다.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좀 아쉽다. 이 책의 안내를 받아 더 많은 내용을 알기 위한 길잡이 책으로서 훌륭하지만 워낙 특이한 소재를 책으로 썼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불안하다. 책 마지막에 씌여 있는 참고도서를 관심있게 본 이유이다.


글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이 책을 추천하는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다. 저자의 다른 책을 살펴 보니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사라진 민족에 대한 책이 있다. 역시 굉장히 흥미로와 보이는 책이다. 아마도 조만간 사서 볼 것 같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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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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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있다. 알수는 없다. 나에겐 그게 수학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연필을 들고 수학문제를 풀 기회는 전혀 없다. 간혹 간단한 계산을 할 때는 있지만, 그건 '산수'다. 한때는 공책 바닥을 채우며 수학문제 푸는 것을 꽤 좋아했지만 대학교에 다니면서는 인문계열 전공이기 때문에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더더군다나 그렇다. 근의 공식 정도는 여전히 외우고 있고, 피타고라스 정리는 증명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다.


가끔 서점에서 수학에 관한 책을 들춰 보고 사기도 한다. 앤드류 와일즈가 증명했다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나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골드바흐의 추측'같이 이해하기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는 '혹시 내가?'라는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밀레니엄 7대 난제같은 이해하기조차 불가능한 문제는 그냥 멍하니 쳐다볼 수 밖에 없다. (7문제 중 푸앵카레 추측은 페렐만이 증명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놀랍게도 리만 가설이 증명됐다는 뉴스가 떴다.) 수식이 참 예쁘고 멋있어 보이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수학 속에는 뭔가 있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문제를 하나 핵결하면 거만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볼 만하다. 나에게는 그게 수학이다.

 


저자 김민형 1963 ~ .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 굉장히 동안이다.


언제 우리에게 수학이 필요하지?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수학자가 쓴 책이다. 분명히 이 책은 수학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수학의 이론을 비전공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수학교양서는 아니다. (사실 나는 그런 책을 기대했다.) 머릿말에서부터 '양자 역학'에 대한 얘기가 살짝 나와서 긴장과 함께 또다른 기대감을 갖게 하더니, 처음에는 이 책이 물리학 입문서인가 싶을 정도로 과학의 역사를 다룬다. 여기까지는 아직 이 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책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간단한 확률에 대해 설명한 후에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인공지능의 선택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 다음장에서는 투표를 할 때, 어떤 후보가 선출되는 것이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당연히 정답을 내기 힘든 문제이다. 이때쯤 되서야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정체를 드러냈다. 이 책은 수학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수학적인 사고방식으로 틀을 만들어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렇게 보면 39페이지에서 저자가 수학의 정의를 '추상적인 개념적 도구를 사용해 세상을 체계적으로 또, 정밀하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바로 수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이해된다. 저자는 수학을 통해서 세상을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설명하는 다양한 실례를 이 책에서 보여준다.

 


수학포기자. 줄여서 수포자라고 한다. 학문으로서 수학은 사회생활에서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학적 사고방식은 학업을 마친 후에도 필요하다.


추상성의 끝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 수학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와 증명, 그래프가 난무하는 수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에 이전에 수학에 관한 책을 읽을 때 별도의 칸에 '읽을거리'로 올라와 있을 법한 짧은 수학상식을 전문적으로 설명해 놓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일상이나 학문에서 생길 수 있는 의문점에서 출발해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학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문제를 풀지는 못하더라도 풀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하도록 안내를 한다. 이 과정에서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 트롤리 문제, 게일-섀플리 알고리즘처럼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제법 유명한 문제들이 제시된다.


분야도 다양해서, 수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인 물리학으로부터 윤리학, 우주론까지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가 생각하는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한 모든 학문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 전체에 수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꼭 '수학'이 아니라 '수학적인 사고방식'이라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천재 수학자의 뇌와 일반인은 뇌는 다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은 접근하지 못한 추상성의 끝을 연구하는 수학자들이 부럽다.


정말 쉽게 읽을 수 있을까?

띠지에 보면 '문과생들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수학책'이라고 씌여 있다. 정말 그럴까?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판형이 작고 글자도 많지 않고, 그림이나 도표도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어서 양은 많지 않다. 나이에 비해서 앳되 보이는 친절한 저자의 모습을 보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학적인 사고방식에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내용을 따라가기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특히 위상기하학을 설명한 6강(위상기하학을 다루는 이 장에서 푸앵카레 추측이 들어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과 코딩과 암호를 다룬 특강(RSA 암호체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은 뇌 속의 논리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까다로울 것 같다. 하지만 꼭 그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내용을 전개해 가는 과정만 지켜보더라도 충분히 읽어 볼만한 책이다.


이 책은 수학에 관심이 있지만 계산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문과생에게 추천할만한 책이다.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슥 넘기고 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계산해서 먹고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정말 어려운 수학문제들은 천재들도 모른다. 천재들이 이해못하는 건 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아는 건 천재들도 알고 있을테니까, 어차피 그게 그거지 뭐.

 


수학사상 최고의 천재로 유명한 가우스. Johann Carl Friedrich Gauß.


 

★★★★☆

너무 어려워지는 걸 경계해서 그랬는지 각 단원이 설명을 하다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좀 아쉽다. 책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으니 내가 기대한 것을 채우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보충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런 기대를 책 한 권에서 모두 채울 수는 없는 거니까.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일반인이 읽어도 좋고 좀 모리좋은 중학생 이상 학생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이 책과 비슷한 구상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간 책이 후속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면 책 판매량은 훨씬 떨어지겠지만...


마지막으로.. 항상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대화식으로 쓴 책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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