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겠습니다. 소생에게는 그만한 복이 없으니 감히 전수해 주십사 청하지 않겠습니다."
방증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소협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오."
영호충은 놀라움과 기쁨에 휩싸여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방생 같은 소림의 고승조차 허락받지 못한 소림의 비술을 전수받을 수 있다니, 감히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 P182

영호충은 일어나서 공손히 말했다.
"방장 대사의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소생은 화산파 제자니 사문을 버리고 소림파에 들 수는 없습니다."
방증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빈승이 말한 큰 장애물이 바로 그것이오. 영호 소협, 소협은 이제 더 이상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오.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려." - P184

영호충을 구해준 사람은 마교의 고수 상문천이었다. 상문천은 마교와 정파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세상 두려운 줄 모르는 젊은이가 나타나 적을 물리쳐주자 크게 감격했다. - P213

"형님, 아우의 절을 받으십시오."
상문천은 몹시 기뻐했다.
"이 세상에 나와 의를 맺은 사람은 자네 한 사람밖에 없네. 꼭 기억하게나."
영호충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과분한 총애십니다." - P233

"비록 의형제를 맺었지만, 내 자네에게 목숨을 빚져 마음이 영 편치 않네. 반드시 자네를 살려놓아야만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줌세."
영호충이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이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포기한 탓이 컸기에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상문천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 P239

"자네야말로 내 지기일세. 큰 형님과 셋째 형님은 고작 술을 얻자고중원의 절초를 서역에 전했다며 어찌나 나무라시던지! 둘째 형님은 웃기만 하셨지만, 필시 속으로는 고개를 저으셨을 거야. 내가 득을 본 장사라는 것을 알아준 사람은 자네뿐일세. 자자, 한 잔 더 들게." - P259

"우리가 매장에 찾아온 것은 부탁할 일이 있어서도, 원하는 물건이 있어서도 아니오. 다만 천하 무학의 최고봉인 이곳에서 당세의 고수들에게 풍 형제의 검법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오. 요행히 승리를 얻으면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떠날 것이오." - P279

때문에 회심의 광초제도 여느 때기럼 반 필기다가 멈줘야 했고, 독필움은 울화가 쌓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하세, 그만해!"
별안간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단정생에게서 술통을 빼앗아 돌탁자 위에 쓴더니 끝을 술에 적셔 허연 백에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배장군시였다. 시를 이루는 스물세 글자는 한 획 한 회에 정기가 충만했고, 특히 ‘약‘자는 벽을 뚫고 날아갈 듯 시원시원했다. 시를 다 쓰고 나가 쌓였던 울분도 가셨는지, 그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껄껄 웃으며 연지처럼 벽을 붉게 물들인 글씨를 흐뭇하게 감상했다. - P296

황종공이 현을 퉁긴 까닭은 여유롭게 음악을 즐기려는 뜻이 아니라 금 소리에 상승의 내공을 실어 적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위함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적의 진기가 금 소리에 공명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주에 조종을 당할 수 있었다. - P319

흑백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 .
"풍 소협, 여기 계신 임 노선생의 성함을 아시오? 무림동도들이 이분을 무어라 부르는지는 아시오? 이분이 본래 어느 파의 장문인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갇히셨는지 아는 바가 있소? 풍 노선생께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소?"
.
.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저는 잘 모릅니다."
영호충의 대답에 단청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모를 만도 하지. 내력을 알고서야 어찌 우리더러 이분을 놓아달라 할 수 있겠나? 이분이 이곳을 떠나면 온 무림이 발칵 뒤집어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 손에 목숨을 잃을 걸세. 그리되면 강호에 더 이상 평화란 없다네." - P356

임 선생은 그가 화를 내는 진짜 이유를 모른 채 껄껄 웃었다.
"물론 화산파 놈들 중에도 노부가 존중하는 사람은 있지. 풍가가 그중 한 명이고, 너도 그렇다. 그리고 네 후배 가운데 그 무엇이더라, ‘화산옥녀’ 영, 영… 그렇지, 영중칙. 그 꼬마 낭자도 제법 기개가 있는 것이 인물은 인물이었지. 애석하게도 악불군에게 시집을 갔으니 고운 꽃을 소똥에 꽂은 격이다."
그가 사모를 ‘꼬마 낭자‘라 칭하자 영호충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 P358

임 선생은 검을 가로세우며 외쳤다.
"젊은 친구, 대체 네게 검법을 전수한 사람이 누구냐? 풍청양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영호충은 당황했다.
"풍 노선배님이 아니고서야 어느 고수가 이런 검법을 전수해 주셨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자, 받아라!"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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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남봉황藍鳳凰이에요. 말했잖아요? 나는 오선교 사람이 맞지만 남 교주의 부하는 아니라고요. 오선교 사람 중에 남봉황의 부하가 아닌 사람이 남봉황 말고 또 있겠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즐거운 듯이 까르르 웃었다. - P23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맑디맑은 물 위에 두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자신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는 묘령의 여인을 보자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때 뒤에 있던 여인이 그의 목덜미에 뜨끈뜨끈한 피를 왜 토하며 힘없이 그의 등으로 쓰러졌다. - P139

"예, 알겠습니다. 한데 성고께서 누구의 목을 원하시는지요?"
영영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자의 성은 ‘영호‘고 이름은 ‘충‘이다. 바로 화산파의 수제자다."
그 말이 떨어지자 영호충은 물론이고 계무시, 조천추, 노두자도 크게 놀라 말문이 턱 막혔다. - P160

‘영영은 줄곧 강호인들에게 존중을 받던 사람이야. 그 많은 호걸들이 그녀를 존경하고 떠받들었으니 세상 부족한 것 없이 오만하게 자랐을 텐데,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으니 견딜 수가 없었겠지. 노두자 일행에게 그런 말을 전하게 한 이유도 나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소문이 오해라는 걸 밝히기 위해서일 거야. 그녀 스스로 한 말이니 이제 그녀가 나와 함께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지.‘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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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육선은 진기를 운용해 자기 나름대로 영호충을 치료하는 한편, 쉬지 않고 말다툼을 해댔다. 그 치료 중에 영호충의 경맥이 뒤죽박죽 망가져버렸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화산파의 상승 내공을 익혀온 영호충은 비록 그 내공은 깊지 않지만 기본은 튼튼해, 선무당 같은 도곡육선의 치료에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 P49

도근선 등 다섯 형제는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도지선이 도실선을 안고 급히 물러났고, 나머지 네 사람은 우르르 달려가 눈 깜짝할 새 악 부인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들이 이대로 팔다리를 잡아당기면 악 부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리라는 것을 잘 아는 악불군은 즉각 검을 뽑아 도근선과 도엽선을 찔러갔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착을 유지하던 악불군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검을 든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P61

악불군의 말이 이어졌다.
"봉불평과 같이 쫓겨난 검종뿐이라면 우려할 필요가 없으나 그들이 오악검파의 영기를 얻어 숭산파, 태산파, 형산파의 인물들과 손을 잡았으니 이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하여…."
그의 시선이 제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다 함께 즉시 숭산으로 가서 좌 맹주를 만나 시비를 가리려 한다."
그 말에 제자들은 흠칫 놀랐다. - P75

육대유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몰래 본 파의 지고무상한 내공 심법을 익히겠어? 마음 푹 놓으라고, 소사매, 사부님이 대사형을 구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비급까지 내주시다니… 이제 대사형은 살았어."
악영산이 소리를 죽였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내가 아버지 몰래 훔친 비급이란 말이에요." - P79

"영호 형, 당신은 이 전백광의 친구요, 영호 형이 중상을 이기지 못해 먼저 죽는다면 나 또한 결코 혼자 살아남지 않겠소!"
진심이 묻어나는 그의 말에 영호충도 마음이 흔들렸다.
‘저자는 역시 친구로 삼을 만한 인물이다.‘
그는 결심을 하고 팔을 뻗어 전백광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전 형, 이렇게 함께 가면 저승길이 외롭지 않겠구려." - P100

의림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영호 사형, 저희 아버지 법명은 ‘불계不戒‘ 예요. 비록 불문에 계시지만 불문의 각종 계율들을 하나도 지키시지 않아 불계라는 법명을 얻으셨죠. - P105

"소사매, 놀라지 마. 내가 혈도를 짚어서 그래."
"깜짝 놀랐잖아요. 왜 육후아를 쓰러뜨렸어요?"
"내가 비급을 보지 않으려고 했더니 여섯째 사제가 비급의 경문을 읽어주기에 막기 위해서는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악불군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육대유의 코앞에 손을 대보고 맥을 짚더니 놀란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이미… 죽었다. 충아, 무슨 혈도를 짚었느냐?"
육대유가 죽었다는 말에 영호충은 충격에 빠져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 P125

도곡육선이 그를 치료한답시고 서로 다른 경맥을 통해 진기를 불어넣는 바람에 내상은 낫지 않고 도리어 여섯 갈래 진기가 몸속을 휘휘 돌며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 후 내공이 깊고 성품은 거칠기 짝이 없는 불계 화상이 억지로 진기를 밀어넣어 도곡육선의 진기를 억누름으로써 일시적으로는 내상이 치료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몸속에 진기 두 갈래가 더해진 것에 불과했다. 서로 다른 진기들이 충돌하고 저항하는 동안 오랫동안 연마해온 화산파의 내공은 소리도 없이 사라져 그를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억울하고 괴로워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외치고 싶었다. - P138

"악 선생, 우리는 악 선생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이다. 오늘 이렇게 결례를 범한 것도 단지 〈벽사검보〉를 한번 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오. 그 검보로 말하자면 본디 화산파의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백방으로 술수를 부려 복위표국의 꼬마를 제자로 삼지 않았소? 결코 정정당당한 방법이라 할 수 없으니, 그 소식을 들은 무림동도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소. 이 늙은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만 내놓으시오!" - P144

"저리 비켜라!"
총불기가 버럭 외치며 영호충의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검이 날아드는 것을 보자 영호충은 기운 없는 몸으로 검을 막아봤자 공연히 들고 있던 검만 날려버릴 뿐이라 여기고 막는 것을 포기한 채 똑같이 그의 목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동귀어진하려는 수법이었다. 그 움직임이 빠르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노리는 방향은 실로 교묘했다. 다름 아닌 독고구검 ‘파검식‘의 절초였기 때문이었다. - P158

"당연한 소리! 네 무공이 그 수준까지 진보했으니 어디 사부와 사모가 눈에 차겠느냐? 우리 화산파의 자질구레한 공력 따위로는 너의 그 대단한 신검神劍을 받아낼 수도 없을 터. 그 복면인들도 말하지 않더냐? 화산파의 장문 자리는 네가 차지해야 한다고 말이다." - P177

"녹죽응, 그 서책이 정말 곡보입니까, 아니면 일부러 곡보처럼 기술한 무공 비급입니까?"
"무공 비급? 허허 우스꽝스러운 말씀 마시구려. 이 서책은 틀림없이 금의 곡보요. 어디 보자…."
곧이어 아취 있는 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호충이 귀 기울여 들어보니 지난날 유정풍과 곡양이 연주한 곡이 분명했다. 그들은 떠났는데 곡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절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 P217

노파가 말했다.
"영호 공자, 떠나기 전에 공자에게 권할 말이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반드시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영호충이 말했지만 노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아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강호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일세. 공자는 성격이 선하고 인자하니 부디 어딜 가나 몸조심하게."
"예." - P240

"평일지라는 사람은 무림의 괴… 아니, 기인인데, 죽은 사람도 살려낼 만큼 고명한 의술 덕에 아무리 무거운 병을 앓는 사람도 그가 손을 대면 반드시 낫는다고들 한단다. 하지만 성격이 괴팍해서 세상 사람의 수는 하느님과 염라대왕이 정해 놓았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을 살려주어 죽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 염라대왕의 눈 밖에 나서 훗날 죽어 저승에 갔을 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겁이 나기 시작한 거야." - P253

평일지가 말했다.
"영호 공자, 공자의 몸속에 있는 여덟 갈래 진기는 제거할 수도, 녹여 없앨 수도, 굴복시킬 수도, 억누를 수도 없어 몹시 까다롭소. 내 귀찮아서 대충 살핀 것이 아니라, 본디 이런 증상은 진기와 관계가 있어 침이나 뜸, 약은 아무 효험이 없소. 의술을 베푼 이래 이런 증상은 보다보다 처음이구려. 내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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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앉아 한 자 거리에서 벽을 바라보니, 벽 왼편에 풍청양風淸揚‘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보였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새긴 글씨는 우아하면서도 힘이 넘쳤고, 홈의 깊이도 반 치나 되었다. - P147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무공이 크게 늘었다고 자부했지만 아직 검으로 돌벽을 꿰뚫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정순하고 두터운 내공을 검에 실어야만 나무를 꿰뚫듯 손쉽게 돌을 꿰뚫을 수 있고, 이는 사부나 사모조차 아직 이르지 못한 경기였다. 어리둥절해하며 검자루를 힘껏 끌어당겼더니 이상한 느낌이 손에 전해져왔다. 놀랍게도 이 돌벽의 두께는 겨우 두 치 혹은 세 치 정도로 몹시 얇았고, 그 안쪽에 텅 빈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85

이 동굴 안의 해골들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여서 최소한 30~40년은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오악검파는 지금까지 강호에 군림해왔고,
그 검법이 깨어졌다는 소문이 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이 동굴 벽에 새겨진 그림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는어려웠다. 숭산파나 태산파의 검법은 차치하더라도, 화산파의 검법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지없이 패배하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방법이 없었다. - P195

‘범송과 조학, 장승풍과 장승운, 저들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오악검파의 검법을 깨뜨리는 방법을 새겼는데도, 어째서 무림에서는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았지? 반면 우리 오악검파는 어떻게 지금까지 명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
오악검파가 지금처럼 강호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속임수를 썼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 P203

"사모의 검을 상대한 방법은 어떻게 나온 것이냐?"
영호충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저,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그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악불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짓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리 화를 내는 것이다. 네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사도邪道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 P235

"그렇다. 화산파 무공의 근본은 바로 ‘기회‘에 있다. 기공을 연성하면 권법이든 검법이든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법, 그것이 바로 정도의 수련 방법이다. 그러나 본 파의 선배들 중 일부는 의견이 달랐다. 바로 본 파 무공의 근본이 ‘검‘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검술을 완벽히 익히면 내공이 부족하더라도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이다. 정도와 사도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 P237

잠시 후 사과애로 올라온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영호 형, 친구가 왔소!"
이 낯익은 목소리는 바로 만리독행 전백광의 것이었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 P246

"당신과 나는 가는 길이 다르오. 전백광, 당신은 악행을 일삼고 무고한 사람을 해쳐 무림의 공분을 샀소. 내 대장부다운 시원시원한 성품을 존중하여 곧바로 물리치지 않고 함께 술 석 잔을 마셨으니, 인사는 충분히 했소. 천하의 미주는 고사하고 세상 그 어떤 진귀한 물건을 가져온들 이 영호충이 당신의 친구가 되리라 생각하시오?" - P250

뒤에 서 있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영호충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전백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이 풍… 노선생이오?"
노인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 풍청양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구나." - P280

죽은 초식을 아무리 깬들 살아 있는 초식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법. 살아있다‘는 말을 똑똑히 기억해두어라. 초식을 배울 때는 살아 있는 것을배우고, 초식을 펼칠 때 역시 살아 있는 것을 펼쳐야 한다. 쓸데없는데 얽매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수천수만 번 절초를 익혀도 진짜 고수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뿐이니라. - P289

"살아 있는 것을 배우고 살아 있는 것을 펼치는 것이 첫걸음이요, 초식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진정으로 고수의 반열에 들게 된다. 너는 초식을 연달아 펼치면 적이 깨뜨릴 틈이 없다고 했으나, 그 말은 반만 맞을 뿐이다. 초식을 연달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식 자체가없어야 한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이어 펼친다 해도 끝내 초식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적은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다. 허나 아예 초식이 없으면 무슨 수로 초식을 깨뜨릴 수 있겠느냐?" - P290

놀랍게도 영호충은 풍청양이 한 말을 거의 절반 정도 외워 보였다.
풍청양은 몹시 신기해하며 물었다.
"독고구검獨孤九劍의 총결을 배운 적이 있더냐?"
"아닙니다. 저는 독고구검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배운 적이 없는데 어찌 외운 것이냐?"
"방금 태사숙께서 그렇게 읊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풍청양은 얼굴 가득 희색을 띠며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하룻밤에 완벽히 익히기는 어려우나 억지로 외울 수는 있으니, 제1식은 외우기만 하고 제3식도 절반만 배우도록 하자꾸나. 잘 듣거라. 귀매에서 무망, 무망에서 동인, 동인에서 대유로 가고…." - P300

"태사숙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어째서 수비는 없고 오로지 공격뿐입니까?"
"독고구검은 오로지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느니라! 모든 초식은 공격을 위한 것이고, 공격을 통해 적이 수비만 하도록 몰아가게 되니 자연히 스스로 수비할 필요가 없다. 이 검법을 창안한 독고구패獨孤求敗 선배님은 패배를 바라는 의미인 ‘구패‘를 이름으로 삼아 평생 한번이라도 패하기를 바라셨으나 끝내 바람을 이루지 못하셨다. 이 검법을 펼치기만 하면 천하무적인데 수비를 염두에 둘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 그 선배님이 검을 거둬 수비를 하도록 몰라붙였다면, 그분은 몸시 기뻐하셨을 것이다." - P303

"숭산파, 태산파가 뭐 하는 놈들이야? 우리 도곡육선桃谷六仙의 발끝때만도 못한 것들이…."
"살기가 귀찮아진 모양이야. 감히 우리 도곡육선을 개미처럼 짓이기겠다고?"
영호충이 더욱 부추겼다.
"당신들은 도곡육선이라 자칭하지만 그자는 입만 열었다 하면 도곡육귀桃谷六鬼라고 하더구려. 아예 여섯 꼬맹이라고 한 적도 있소. 육선,
아무래도 멀리 달아나는 것이 좋겠소. 그자의 무공은 무시무시해서 당신들도 이기지 못할 거요."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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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돈을 주고 벼슬을 샀구나. 순무의 추천서 한 장을 위해 황금을 얼마나 바쳤을꼬? 언제나 올곧던 유정풍이 늘그막에 벼슬 욕심에 사로잡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관직을 사들일 줄이야….’ - P30

"제자 유정풍, 사부님의 은혜로 문하에 들어 무예를 익혔으나 형산파의 이름을 빛내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막대 사형이 본문을 이끌어주시니, 평범하고 재주없는 이 몸 하나쯤 없어진들 무슨 대수겠습니까? 이제 제자는 금분세수하고 관직에 나아가나 벼슬길을 높이기 위해 사문의 무예를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강호의 시비와 은원, 문파 사이의 논쟁 또한 다시는 귀에 담지 않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길 시에는 이 검처럼 될 것입니다." - P32

"이보시오, 사형. 숭산파에서 오신 것 같은데 대청에 동문들과 함께 계셔야 하지 않소?"
청년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상관없소. 나는 유정풍의 식솔들이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맹주의 명을 받았소."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으나 말투가 어찌나 거만한지, 대청에 있는 군웅들마저 안색이 싹 변했다. - P38

유 사형, 오늘 일은 형산파 장문인 막대 선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막대 선생을 끌어들일 필요 없소. 좌 맹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유 사형께 명확한 답을 받아오라는 것이었소. 유 사형은 어찌하여 마교 교주 동방불패와 남몰래 결탁하였소? 그와 함께 우리 오악검파와 무림동도들을 해치기 위해 무슨 음모를 꾸몄소?" - P46

비빈은 대답 대신 셋째 사형 육백을 바라보았다. 육백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유 사형, 온전히 사실만을 말씀하시지는 않은 것 같소이다. 마교에는 곡양曲洋이라는 호법 장로가 있는데, 혹 아시는지?"
그동안 평정을 유지하던 유정풍이었으나 ‘곡양‘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안색이 싹 변해 입을 꾹 다물었다. - P47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유정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곡양 형님을 잘 아오.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내 평생지기이자 가장 가까운 벗이오." - P47

"그 옛날 혜강(삼국시대 위나라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음악가)은 형장에 올랐을 때 금을 쓰다듬으며 다시는 <광릉산(廣陵散)>이 세상에 울릴 일이 없다며 탄식했지. 허허, 〈광릉산>도 절묘하지만 우리가 만든 이〈소오강호곡>만 하겠나? 허나 그때 혜강의 심정은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야." - P83

"유 사숙님, 저희 같은 강호의 협객은 협의를 중요시하여 사마외도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했습니다. 여기서 협의가 무슨 뜻입니까? 중상을 입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협의입니까? 무고한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협의입니까?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가 사마외도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 P88

여기까지 말한 그는 품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소오강호곡>의 금과 퉁소 곡보曲譜라네. 우리 두 사람이 쏟은 심혈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형제가 전승자를 찾아 이 곡보를 전해주게나."
유정풍도 말했다.
"이 <소오강호곡>이 세상에 전해질 수만 있다면 나와 곡 형님은 죽어서도 여한이 없네."
영호충은 허리를 숙이고 곡양의 손에서 곡보를 받아 품속 깊숙이 갈무리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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