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앉아 한 자 거리에서 벽을 바라보니, 벽 왼편에 풍청양風淸揚‘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보였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새긴 글씨는 우아하면서도 힘이 넘쳤고, 홈의 깊이도 반 치나 되었다. - P147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무공이 크게 늘었다고 자부했지만 아직 검으로 돌벽을 꿰뚫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정순하고 두터운 내공을 검에 실어야만 나무를 꿰뚫듯 손쉽게 돌을 꿰뚫을 수 있고, 이는 사부나 사모조차 아직 이르지 못한 경기였다. 어리둥절해하며 검자루를 힘껏 끌어당겼더니 이상한 느낌이 손에 전해져왔다. 놀랍게도 이 돌벽의 두께는 겨우 두 치 혹은 세 치 정도로 몹시 얇았고, 그 안쪽에 텅 빈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85
이 동굴 안의 해골들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여서 최소한 30~40년은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오악검파는 지금까지 강호에 군림해왔고, 그 검법이 깨어졌다는 소문이 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이 동굴 벽에 새겨진 그림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는어려웠다. 숭산파나 태산파의 검법은 차치하더라도, 화산파의 검법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지없이 패배하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방법이 없었다. - P195
‘범송과 조학, 장승풍과 장승운, 저들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오악검파의 검법을 깨뜨리는 방법을 새겼는데도, 어째서 무림에서는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았지? 반면 우리 오악검파는 어떻게 지금까지 명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 오악검파가 지금처럼 강호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속임수를 썼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 P203
"사모의 검을 상대한 방법은 어떻게 나온 것이냐?" 영호충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저,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그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악불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짓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리 화를 내는 것이다. 네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사도邪道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 P235
"그렇다. 화산파 무공의 근본은 바로 ‘기회‘에 있다. 기공을 연성하면 권법이든 검법이든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법, 그것이 바로 정도의 수련 방법이다. 그러나 본 파의 선배들 중 일부는 의견이 달랐다. 바로 본 파 무공의 근본이 ‘검‘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검술을 완벽히 익히면 내공이 부족하더라도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이다. 정도와 사도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 P237
잠시 후 사과애로 올라온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영호 형, 친구가 왔소!" 이 낯익은 목소리는 바로 만리독행 전백광의 것이었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 P246
"당신과 나는 가는 길이 다르오. 전백광, 당신은 악행을 일삼고 무고한 사람을 해쳐 무림의 공분을 샀소. 내 대장부다운 시원시원한 성품을 존중하여 곧바로 물리치지 않고 함께 술 석 잔을 마셨으니, 인사는 충분히 했소. 천하의 미주는 고사하고 세상 그 어떤 진귀한 물건을 가져온들 이 영호충이 당신의 친구가 되리라 생각하시오?" - P250
뒤에 서 있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영호충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전백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이 풍… 노선생이오?" 노인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 풍청양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구나." - P280
죽은 초식을 아무리 깬들 살아 있는 초식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법. 살아있다‘는 말을 똑똑히 기억해두어라. 초식을 배울 때는 살아 있는 것을배우고, 초식을 펼칠 때 역시 살아 있는 것을 펼쳐야 한다. 쓸데없는데 얽매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수천수만 번 절초를 익혀도 진짜 고수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뿐이니라. - P289
"살아 있는 것을 배우고 살아 있는 것을 펼치는 것이 첫걸음이요, 초식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진정으로 고수의 반열에 들게 된다. 너는 초식을 연달아 펼치면 적이 깨뜨릴 틈이 없다고 했으나, 그 말은 반만 맞을 뿐이다. 초식을 연달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식 자체가없어야 한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이어 펼친다 해도 끝내 초식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적은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다. 허나 아예 초식이 없으면 무슨 수로 초식을 깨뜨릴 수 있겠느냐?" - P290
놀랍게도 영호충은 풍청양이 한 말을 거의 절반 정도 외워 보였다. 풍청양은 몹시 신기해하며 물었다. "독고구검獨孤九劍의 총결을 배운 적이 있더냐?" "아닙니다. 저는 독고구검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배운 적이 없는데 어찌 외운 것이냐?" "방금 태사숙께서 그렇게 읊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풍청양은 얼굴 가득 희색을 띠며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하룻밤에 완벽히 익히기는 어려우나 억지로 외울 수는 있으니, 제1식은 외우기만 하고 제3식도 절반만 배우도록 하자꾸나. 잘 듣거라. 귀매에서 무망, 무망에서 동인, 동인에서 대유로 가고…." - P300
"태사숙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어째서 수비는 없고 오로지 공격뿐입니까?" "독고구검은 오로지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느니라! 모든 초식은 공격을 위한 것이고, 공격을 통해 적이 수비만 하도록 몰아가게 되니 자연히 스스로 수비할 필요가 없다. 이 검법을 창안한 독고구패獨孤求敗 선배님은 패배를 바라는 의미인 ‘구패‘를 이름으로 삼아 평생 한번이라도 패하기를 바라셨으나 끝내 바람을 이루지 못하셨다. 이 검법을 펼치기만 하면 천하무적인데 수비를 염두에 둘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 그 선배님이 검을 거둬 수비를 하도록 몰라붙였다면, 그분은 몸시 기뻐하셨을 것이다." - P303
"숭산파, 태산파가 뭐 하는 놈들이야? 우리 도곡육선桃谷六仙의 발끝때만도 못한 것들이…." "살기가 귀찮아진 모양이야. 감히 우리 도곡육선을 개미처럼 짓이기겠다고?" 영호충이 더욱 부추겼다. "당신들은 도곡육선이라 자칭하지만 그자는 입만 열었다 하면 도곡육귀桃谷六鬼라고 하더구려. 아예 여섯 꼬맹이라고 한 적도 있소. 육선, 아무래도 멀리 달아나는 것이 좋겠소. 그자의 무공은 무시무시해서 당신들도 이기지 못할 거요."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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