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적은 곧 친구라 하지 않았소? 좌 장문께서는 악불군 손에 두 눈을 잃으셨고, 임 소협이 두 눈을 잃은 것도 따지고 보면 악불군 탓이오. 소협이 벽사검법을 익힌 것을 악불군이 안 이상, 세상 끝까지 달아나더라도 반드시 쫓아와 죽일 것이오. 이제 오악파의 장문인이 되어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얻었는데 소협 혼자서 무슨 힘으로 그에게 항거하겠소? 하물며… 하물며 악불군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침저녁으로 소협 곁에 딱 붙어 감시하는데, 소협에게 날개가 돋아난들 베갯머리에서 일어나는 암습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오."
그때 악영산이 높이 외쳤다.
"둘째 사형, 사형이군요!" - P26

"아버지가 정말... 정말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그 뒤에도.… 기회는 많았어요. 그런데 왜 가만히 놔두셨겠어요?"
임평지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후로 나는 살얼음판을 걷듯 신중하게 움직여 그자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았소. 모두 당신 덕분이지. 내가 종일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 죽이고 싶어도 쉽지 않았을 거요." - P29

노덕낙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좌 장문은 바로 이 몸의 은사시오. 나는 그분의 셋째 제자요."
"이제 숭산파로사문을 바꾼 모양이구려."
"사문을 바꾼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숭산파 사람이었소. 단지 은사의 명으로 화산파 제자인 척했을 뿐이오. 은사께서는 악불군의 무공을 가능하고 화산파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나를 보내신 것이오." - P30

"이제 혼자가 되어… 세상에 의지할 곳도 없으니 모두 그를… 그를 괴롭힐 거예요 대사형..… 내가 죽으면 대사형이 그를… 그를 보살펴줘요. 남들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영호충은 멈칫했다. 임평지의 검에 찔려 숨이 끊어져가는 순간까지도 그를 향한 정을 잊지 못하다니!
당장 임평지를 붙잡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이가 갈리는데, 목숨을 살려주는 것도 과분한 무정한 악당을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돌봐달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 P38

갈 장로가 기뻐하며 말했다.
"두 형제, 악씨 계집애를 붙잡았나? 큰 공을 세웠군!"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대답했다.
"악씨는 악씨인데 계집애가 아니라 부인이오"
"응?"
갈 장로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놀란 소리로 외쳤다.
"설--- 설마 - 악불군의 마누라를 붙잡았나?"
영호충의 놀라움은 그보다 훨씬 컸다. - P51

영호충이 어렸을 때부터 키운 악불군이었으나 그 성품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비록 동귀어진 수법으로 반격을 했지만, 영호충은 정말로 사부의 배에 검을 찌를 만큼 배덕한 성격이 못 되었다. 필시 사부의 몸에 닿기 직전에 검을 멈췄을 것이다. - P67

영호충은 남편을 꺾고도 차마 찌르지 못해 물러났지만, 남편은 도리어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독수를 썼다. 방문좌도들도 마다하는 비열한 행동을 당당한 오악파 장문인이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보자 너무도 수치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굳세고 의지가 곧은 악부인이었지만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보는 순간 기운이 쭉 빠지고 모든 희망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 P75

"충아, 앞으로 사람을 만날 때는 그저 좋게만 생각지는 말거라!"
"예!"
그렇게 대답한 영호충은 목 뒤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악 부인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사・・・ 사모님!"
놀란 그가 목청이 터질 듯이 악 부인을 부르며 부축해보니, 뜻밖에도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 한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악 부인은 비수가 심장을 관통해 절명한 것이었다. 영호충은 넋이 나가 입을 떡 벌렸지만, 비명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 P77

"좋아요, 오늘 한 번은 살려주겠어요. 포장로, 막 장로, 우리가 악불군을 붙잡았다가 풀어준 이야기를 강호에 널리 퍼뜨리시오. 그리고 악불군이 벽사검법을 익히기 위해 스스로 몸을 망가뜨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도 천하영웅들에게 낱낱이 알리시오." - P81

"오냐, 이번만은 한발 양보할 테니 두 여자를 모두 맞아들이도록 해다. 태감이 되면 아무하고도 혼인할 수 없으니 화상이 되는 것이 낫겠지. 하지만 혼례를 올린 뒤에 내 귀여운 딸을 박대하면 절대 안 된다! 첫째 부인, 둘째 부인도 나누지 말고 평등하게 하되, 네 나이가 더 많으니 의림더러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마." - P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전으로 들어선 영호충은 주위를 흘끔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하게 긴 전각이군!‘
폭은 30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깊이는 300자는 됨직해 보였다. 전각 끝에는 높다란 단을 설치해 의자를 놓았고, 그 위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동방불패였다. - P25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누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방 형제, 정말로 자네가 나를 잡아오라고 했나?"
나이 지긋한 목소리였지만 공력이 잔뜩 실려 있어, 그 한마디는 널찍한 전각 안에서 한참 동안 메아리쳤다. 당당하고 용맹한 태도로 보아 나타난 사람은 바로 풍뢰당 당주라는 동백웅이 분명했다. - P27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녔다는 동방불패가 고작 힘 빠진 동전 하나를 피하지 못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었다.
임아행이 껄껄 웃으며 외쳤다.
"저 동방불패는 가짜다!" - P35

진짜 동방불패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세상을 뒤덮을 무공과 기지를 지닌 그가 양연정이 가짜를 내세워 권세를 농단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동방불패가 이미 죽은 이상, 양연정과 겁쟁이 가짜 따위를 괴롭히는 일은 임아행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P40

그때 안방에서 교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 아우, 누구를 데려왔어?"
어조는 높고 뾰족했지만 목소리가 굵어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했다. 그 괴상한 목소리를 듣자 일행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양연정이 대답했다.
"옛 친구들이 당신을 꼭 만나야겠다기에 데려왔소."
안방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무엇 하러 여기까지 데려왔어? 여긴 당신만 올 수 있는 곳이란 말이야. 당신 말고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분명히 여자들이 응석을 부릴 때 쓰는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의심할 바 없는 남자였다. - P44

꽃과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방 안에는 연지분 냄새가 진동했다. 주렴 한쪽에 놓인 화장대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는데, 화사한 분홍색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수틀을 다른 한손에는 수침을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이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표정도 임아행 일행의 이상야릇한 표정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영호충을 제외하면, 모두들 그가 일월신교의 교주 자리를 찬탈하고 10여 년 동안 천하제일의 고수라 불려온 동방불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동방불패가 수염을 깎고, 얼굴에 연지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옷은 빛깔이 몹시 선명해 영영이 입어도 너무 요염하고 자극적일 것 같았다. - P45

영호충은 물론이고 견문이 넓은 임아행조차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상황이었다. 남자가 남자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일월신교의 지존인 동방불패가 여장을 하고 첩 노릇을 자처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양연정은 지아비라도 되는 양 위세를 부리고 동방불패는 현숙하고 순종적인 아내처럼 구는 것을 보자 일행은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47

임아행과 상문천도 사태가 위급한 것을 보고 각각 검과 연편을 휘두르며 협공을 퍼부었다.
당세의 3대 고수가 나섰으니 그 위력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만큼 어마어마했지만, 동방불패의 두 손가락에 쥐어진 수침은 패색조차 없이 세 사람 사이를 번개처럼 오갔다. 상관운이 칼을 뽑아 뛰어들자 싸움은 4대 1이 되었다. - P56

‘이 《규화보전》의 요결에는 신공을 연성하려면 스스로 양물을 자르고 영단을 복용하여 안팎을 두루 통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노부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 으하하하!! - P63

"영호충이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악불군은 옆으로 비켜서며 쌀쌀하게 말했다.
"영호 장문께서 어찌 이리 과한 예를 차리시오? 남들이 보면 웃지 않겠소?"
영호충은 그래도 꿋꿋이 절을 끝내고 일어서서 옆으로 비켰다. 악부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앞으로 행동을 삼가고 조심한다면 편히 살 날이 올 거야." - P97

좌냉선이 외쳤다.
"우리 오악검파는 한 뿌리고, 100여 년 동안 결맹을 맺어 이미 한집안이나 다름이 없소. 이 몸이 오악검파의 맹주가 된 지도 벌써 몇 년이지났소. 한데 최근 무림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 오악검파를 위협하기에, 이 몸은 오악검파의 선배들과 상의하여 문파를 하나로 병합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훗날 큰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소."
그때 누군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맹주께서는 대체 어느 문파의 선배들과 상의하셨소? 이 몸은 들은 적이 없소."
바로 형산파 장문인 막대 선생이었다. 형산파는 합병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하지 - P106

영호충은 의아해하며 악영산 옆에 선 임평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누군가 저런 표정 지은 걸 본 것 같은데….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정이었지만 떠오를 듯 떠오를 듯하면서도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 P119

영호충은 고개를 저었다.
"항산파는 혼자가 아니오. 화산파 장문인이신 악 선생은 이 몸에게 절기를 전수해주신 은사시오. 지금은 다른 문파에 몸을 담고 있으나 은사의 가르침을 잊지는 않았소."
"화산파악 선생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우리 항산파는 화산파와 손을 잡고 한마음으로 움직일 것이오." - P131

영호충은 그제야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하에 받아주시겠다는 말씀이 화산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었구나. 오악검파가 합병하면 사부님, 사모님과 한 문파가 된다는 의미였어‘ - P137

도지선이 그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어이, 좌냉선. 옥기자에게 황금과 미녀를 주며 장문인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해놓고 왜 팔다리를 자르는 거야?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여 없애려는 거지?"
도근선도 끼어들었다.
"우리가 옥기자를 네 갈래로 찢을까 봐 제 딴에는 돕겠다고 그런 모양인데, 우리를 완전히 오해한 거야."
"혼자 온갖 똑똑한 척을 다 하더니… 참 딱한 사람이라니까. 우리는 말이야, 그저 장난이나 칠까 하고 옥기자를 붙잡았던 것뿐이야. 오늘은 오악파가 새로 선 경사스러운 날인데 무슨 배짱으로 살풍경하게 사람을 죽이겠어?" - P163

악영산이 검법을 펼치는 순간, 그는 단번에 화산 사과 안쪽 동굴의 벽에 새겨진 태산파 검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사과애에서 벽화를 발견한 뒤로 그는 화산파의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사과애를 떠날 때 안쪽 동굴 입구를 꼼꼼히 가려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악영산은 대체 어떻게 그 동굴을 발견했을까? - P190

‘임 사제와 소사매는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할 신혼인데 어째서 저렇게 울적한 표정일까? 소사매가 사부님께 뺨을 맞았는데도 달려가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무관심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다니, 남편이라는 사람이 정말 인정머리가 없구나.‘ - P199

수십 초가 지나도록 악불군의 방어가 흐트러질 것 같지 않자, 좌냉선은 독이 퍼질 것이 염려되어 더욱더 힘차고 빠르게 검을 놀렸다. 악불군은 허둥지둥 오른쪽 왼쪽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쉽사리 막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그의 검법이 싹 바뀌었다. 검날이 늘어났나 싶게 쭉 뻗어나가다가 별안간 휙 거두어지는 등 신출귀몰하게 움직였고 초식은 여태 누구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기괴했다. - P241

지금 사부가 쓰는 초식은 바로 지난번 동방불패가 수침으로 그들과 싸울 때 펼쳤던 무공이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지독한 통증도 까맣게 잊고 벌떡 일어났다. - P243

영호충은 희미해져가는 사부의 뒷모습과 각 문파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뒤에서 분에 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군자!"
영호충은 몸을 움찔했다. 상처의 통증이 견디기 힘을 정도로 그의 몸을 짓눌렀다. ‘위군자‘라는 단어가 묵직한 망치라도 된 양 그의 가슴을 힘차게 내리치는 것 같아 숨이 턱턱 막혔다. - P253

단 1초에 여창해를 제압한 임평지의 초식은 악불군이 좌냉선과 싸울 때 쓴 초식을 쏙 빼닮았고 방법도 똑같았다. 영호충은 흠칫 놀라며 영영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나지막이 외쳤다.
"동방불패!"
그들의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당황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확실히 임평지의 초식은 동방불패가 흑목애에서 사용했던 무공이었다. - P264

"그 검보를 보았을 때는 이미 당신과의 혼사가 정해진 후였소. 혼례를 올리고 당신과 진정한 부부가 된 다음 검법을 익히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 검보의 초식은..… 무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소. 그래서 결국・・・ 결국・・・ 내 손으로 거세를 하고 연검을 시작했소…." - P341

임평지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벽사검보>의 첫번째 요결은 바로 ‘무림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는 검을 들어 생식기를 잘라낼지어다‘였소." - P3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호 공자, 성고께서는 우리더러 공자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무공이 너무도 높아 털끝 하나 건드릴 수가 없군요. 제 일격은 빗나갔지만 공자께서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셨으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친구들, 모두 똑똑히 보았지? 우리는 영호공자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야. 죽이려고 했지만 힘이 달려 죽일 수가 없는 것뿐이라고! 이 노두자가 못하는 일이니 자네들은 더더욱 어렵지, 안 그런가?" - P24

"12월 15일에 다 함께 소림사로 가서 성고를 구해낼 생각입니다. 그동안 맹주 자리를 놓고 우리 편끼리 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골칫거리였는데, 영호 공자께서 나타나셨으니 말끔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공자께서 맹주를 맡아주시지 않으면 누가 감히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설사 다른 사람이 맹주가 된다 해도 성고께서 아시면 별반 기뻐하시지 않을 테지요." - P25

노인은 두어 걸음 물러나 검을 거두더니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이고 안타까움도 옅게 묻어 있는 표정이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영호 공자는 고명한 검법뿐 아니라 놀라운 담력과 식견도 갖췄구먼, 참으로 탄복을 금할 수 없네!" - P55

"기다리시게! 이 늙은이가 화산파와 왕래가 뜸하기는 하네만, 악 선생은 필시 내 체면을 보아줄 것일세. 이 늙은이와 소림 방장이 공자를 화산으로 돌려보내주겠다 약속한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나?"
그 말에 영호충은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 P60

정한 사태의 눈동자에 기쁨이 출렁였다.
"우리… 우리 항산파… 항산파를… 맡아, 맡아….."
겨우 한마디 하는데도 숨을 헐떡여 말을 끝맺지 못했지만, 그 의미를 알아들은 영호충은 화들짝 놀랐다.
"저는 남자인지라 항산파를 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앞으로 항산파에 어려움이 닥치면 온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항산파의 일이 곧 제 일입니다!"
정한 사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세. 나는… 나는 영호충에게 항산파… 항산파 장문…자리를 넘기는 것이네…. 소협이… 받아주지 않으면… 나는 죽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일세." - P69

"얘야, 내려오너라!"
서쪽 끝에 있는 편액 뒤에서 누군가 살며시 내려섰다. 곱고 나긋나긋한 그 모습은 바로 헤어진 지 오래된 영영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영호충은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일었다. 거칠고 허름한 옷을 걸치고 안색마저 초췌해진 그녀를 보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P113

"하지만 내가 인정하는 사람들 중 으뜸은 방장이 아니오. 당금 무림에서 내가 으뜸으로 여기는 사람은 바로 내게서 일월신교의 교주 자리를 빼앗은 동방불패요."
.
.
.
임아행이 말을 이었다.
"노부는 무공이 고강하고 머리 회전이 빨라 세상에 적수가 없다 여겼소. 그런데 동방불패의 속임수에 넘어가 호수 바닥에 갇혀 하마터면 영영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소.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물을 인정하지 않을 수야 없지 않겠소?" - P129

악불군이 큰 소리로 나섰다.
"임 선생은 간교한 계략으로 승리를 얻었으니 결코 정정당당한 승리가 아니오. 정인군자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오."
상문천은 껄껄 웃었다.
"우리 일월신교에도 정인군자가 있소? 임 교주께서 정인군자라면 진즉 그 더러운 물에서 당신과 어울리셨을 거요. 그랬다면 무엇 하러 이런 시합을 하겠소?"
악불군은 말문이 막혔다. - P148

영호충이 몸을 일으키자 임아행이 검을 건네주었다. 영호충은 검을 받아 검끝을 아래로 향하고 말석에 섰다. 충허 도인은 넋을 잃은 듯 이대전 밖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지난번 무당산에서 본 영호충의 검법을 떠올렸다. 그가 좌선을 하는 듯 꼼짝도 하지 않자 사람들은 저마다 의아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이윽고 충허 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합은 할 필요도 없소이다. 네 분은 이만 산을 내려가시오." - P165

‘나를 다시 화산파 문하에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소사매와 짝지어 주겠다는 거야! 그런 뜻으로 충영검법을 펼치셨는데 내가 어리석어서 깨닫지 못하자 농옥취소와 소사승룡까지 펼치셨구나.’ - P179

악 부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다면 사형은 산이를 미끼로 그 아이를 유혹하셨군요. 그 아이가 산이 생각에 비무에서 져주리라 생각하고 말이지요."
귀가 눈에 뒤덮여 있는데도 영호충은 사모의 말 속에 담긴 분노와 야유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사모의 입에서 이런 말투가 나온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 P207

"무당파 충허 도장께서 축하하러 오셨습니다."
깜짝 놀란 영호충이 황급히 마중을 나가보니, 과연 충허 도인이 제자 여덟 명을 데리고 올라오고 있었다. 영호충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도장께서 왕림해주시다니,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충허 도인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항산파 장문인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이루 말할 수없었네. - P274

"두 분께서 친히 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방생 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영호 소협이 소림사에 세 번이나 방문하였으니 우리도 항산을 방문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영호충은 소림파 승려들과 무당파 도사들을 암자로 안내했다. - P274

"영영, 와주었군."
영영도 생긋 웃었다.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가 방증 대사와 충허 도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방장 대사님, 장문 도장님, 영영이 인사 올립니다."
방증 대사와 충허 도인은 반례를 하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이라도 오늘은 오지 말았어야 했건만… 덕분에 영호충이 더욱 어렵게 되었구나.‘ - P282

"소문에는 그 당시 화산파의 사형제 두 명이 천주 소림사에 손님으로 와 있었는데, 어떤 기연을 얻었는지 그 《규화보전》을 보게 되었다 하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중요한 비급이니 천주 소림사에서 쉽게 보여주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면 화산파 선배들이 훔쳐본 것이 분명하구나. 방증 대사께서는 내 입장을 고려해 훔쳐보았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으신 거야.‘
방증 대사는 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이 번갈아 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두 분은 비급을 나누어 읽은 뒤 화산으로 돌아가 함께 연구를 시작했소. 한데 뜻밖에도 마치 완전히 다른 비급을 읽은 것처럼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고 흐름도 전혀 이어지지 않았소. 두 분은 서로 상대방이 잘못 이해했다고 굳게 믿었지만, 비급의 반만으로는 무공을 익힐 수가 없었소. 이 일로 말미암아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사형제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하오. 화산파가 기종과 검종으로 나뉜 것도 이때부터였소." - P306

그가 ‘악 선생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어부지리를 얻었다‘며 사부를 모욕하자 잔뜩 화가 난 영호충이지만, ‘심모원려‘라는 단어가 나오자 별안간 사부가 둘째 사제인 노덕낙을 변장시켜 소사매와 함께 복주성 외곽에 술집을 차리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사부가 무엇 때문에 그런 명을 내렸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복위표국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 P3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아, 내 알려줌세! 강호에는 이런 말이 돌고 있네. 흑목애의 임 대소저가 몸소 자네를 업고 소림사로 찾아가, 방증 대사에게 자네를 구해주기만 하면 자신은 소림파의 처분을 달게 받겠노라고, 찢어 죽이든 삶아 죽이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애원했다는 것일세."
영호충은 신음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 P332

"도곡육선, 이제 승복하겠소?"
도근선이 나서서 대답했다.
"영호충은 우리 형제의 친구라고, 영호충이 곧 도곡육선이고, 도곡육선이 곧 영호충이지. 영호충이 맹주가 되면 우리 도곡육선이 맹주가 되는 것과 매한가지인데 승복하지 못할 것도 없잖아?"
도화선도 옆에서 퉁을 주었다.
"세상에 자기가 자기에게 승복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백자가 계속 말했다.
"소생이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여쭤보는 말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오늘이 7월 초하루라 이번에도 그것을 여쭈러 왔습니다. 선생의 뜻은 어떠십니까?"
공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투를 들으며 영호충은 속으로 비웃었다. - P34

그는 철판에 새겨진 글자를 더듬으며 천천히 그 뜻을 풀어나갔다. 앞부분이 설명하는 것은 내공을 분산시키는 법과 몸속의 진기를 없애는 법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평생 동안 고생을 마다 않고 수련한 내공을 없애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 자결할 생각이라면 또 모르지만, 자결을 하려면 검으로 목을 찌르면 그만인데 무엇 하러 이렇게 쓸데없는 수고를 한담? 내공을 흩뜨리는 것이 내공을 기르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데, 이런 것을 익혀서 어디에 쓰지?‘ - P41

‘내가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은 몸속에 도곡육선과 불계 화상의 진기가 들어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야. 평 의원조차 치료하지 못한 병이고, 소림사 방장이신 방증 대사께서도 《역근경》의 무공을 익혀야만 그 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셨지. 그런데 이 철판에 새겨진 내공 심법은 바로 몸속의 진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아닌가? 나는 정말 멍청이로구나. 남들은 진기를 잃는 것이 두렵겠지만, 나는 진기를 없애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이 신묘한 무공이야말로 내게 꼭맞는 심법이야.‘ - P43

그 순간까지도 영호충은 자신이 당세에 제일가는 무시무시한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곡육선과 불계 화상의 진기와 소림사에서 요양하는 동안 얻은 방생 대사의 진기가 경혈經穴에 스며들어 고스란히 그의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금 전 흑백자에게서 빨아들인 필생의 내공까지 더해져 아홉 명에 이르는 고수의 내공을 흡수했으니, 힘이 솟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P60

영호충이 한참 넋을 놓고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영호충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았다. 눈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으나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속삭였다.
"형제, 안으로 들어가세..
바로 상문천의 목소리였다. 영호충은 몹시 기뻐 소리 죽여 외쳤다.
"상 형님!" - P74

"자네, 아직도 교주님의 신분을 모르고 있었군. 이분이 바로 일월신교의 교주로, 함자는 ‘아 자 ‘행‘ 자를 쓰신다네. 들어본 적 없나?"
영호충도 일월신교가 마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교 사람들은 자신들 무리를 ‘일월신교‘라고 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들 마교라고 불렀다. 그 마교의 교주는 동방불패라고 알려져 있는데, 임아행이라는 교주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 P77

임아행이 그에게 말했다.
"영호 형제, 나는 적에게는 몹시 잔혹하고 수하에게는 몹시 엄해서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서호 바닥에서 얼마나 오래 갇혀있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너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 어떤 기분인지 잘 알 터, 적이나 반역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데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들겠느냐?"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P94

‘이 칼이 언제부터 이렇게 빨랐지? 팔을 뻗기만 했을 뿐인데 칼집이 목을 찌르다니….’
영호충은 어리둥절해하며 칼을 내려다보았다. 흡성대법을 익힌 덕택에 도곡육선과 불계 화상, 흑백자에게 받은 진기를 쓸 수 있게 되자 고강한 공력이 더해진 독고구검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지만, 그 자신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 P179

"너는… 아주 잘했다. 네 사부가 어찌하여 너를 축출했는지 모르겠구나. 듣자니 네가 마교와 결탁했다던데?"
"제가 신중하지 못한 탓에 어쩌다 보니 마교의 인물 몇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정일 사태는 코웃음을 쳤다.
"숭산파같이 제 욕심만 챙기는 부류라면 마교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도 없다. 흥, 정파의 인물이라고 무조건 마교보다 낫다는 법도 없지." - P301

"자네는 매일 후미에 나가 옷을 입은 채 잠이 들고, 항산파의 제자들에게 무례한 짓은 커녕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더군, 자네는 무례한 방탕아가 아니라 예의 바른 군자일세. 묘령의 여승들과 아리따운 낭자들이 한 배에 타고 있는데도 흔들리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단 하루도 아니고 수십 일 동안 한결같이 그리하였으니, 자네같은 당당한 대장부는 고금을 통틀어 찾아보기 어려울 걸세. 이 막대, 크게 감탄했네." - P3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