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자가 계속 말했다. "소생이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여쭤보는 말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오늘이 7월 초하루라 이번에도 그것을 여쭈러 왔습니다. 선생의 뜻은 어떠십니까?" 공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투를 들으며 영호충은 속으로 비웃었다. - P34
그는 철판에 새겨진 글자를 더듬으며 천천히 그 뜻을 풀어나갔다. 앞부분이 설명하는 것은 내공을 분산시키는 법과 몸속의 진기를 없애는 법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평생 동안 고생을 마다 않고 수련한 내공을 없애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 자결할 생각이라면 또 모르지만, 자결을 하려면 검으로 목을 찌르면 그만인데 무엇 하러 이렇게 쓸데없는 수고를 한담? 내공을 흩뜨리는 것이 내공을 기르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데, 이런 것을 익혀서 어디에 쓰지?‘ - P41
‘내가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은 몸속에 도곡육선과 불계 화상의 진기가 들어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야. 평 의원조차 치료하지 못한 병이고, 소림사 방장이신 방증 대사께서도 《역근경》의 무공을 익혀야만 그 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셨지. 그런데 이 철판에 새겨진 내공 심법은 바로 몸속의 진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아닌가? 나는 정말 멍청이로구나. 남들은 진기를 잃는 것이 두렵겠지만, 나는 진기를 없애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이 신묘한 무공이야말로 내게 꼭맞는 심법이야.‘ - P43
그 순간까지도 영호충은 자신이 당세에 제일가는 무시무시한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곡육선과 불계 화상의 진기와 소림사에서 요양하는 동안 얻은 방생 대사의 진기가 경혈經穴에 스며들어 고스란히 그의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금 전 흑백자에게서 빨아들인 필생의 내공까지 더해져 아홉 명에 이르는 고수의 내공을 흡수했으니, 힘이 솟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P60
영호충이 한참 넋을 놓고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영호충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았다. 눈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으나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속삭였다. "형제, 안으로 들어가세.. 바로 상문천의 목소리였다. 영호충은 몹시 기뻐 소리 죽여 외쳤다. "상 형님!" - P74
"자네, 아직도 교주님의 신분을 모르고 있었군. 이분이 바로 일월신교의 교주로, 함자는 ‘아 자 ‘행‘ 자를 쓰신다네. 들어본 적 없나?" 영호충도 일월신교가 마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교 사람들은 자신들 무리를 ‘일월신교‘라고 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들 마교라고 불렀다. 그 마교의 교주는 동방불패라고 알려져 있는데, 임아행이라는 교주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 P77
임아행이 그에게 말했다. "영호 형제, 나는 적에게는 몹시 잔혹하고 수하에게는 몹시 엄해서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서호 바닥에서 얼마나 오래 갇혀있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너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 어떤 기분인지 잘 알 터, 적이나 반역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데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들겠느냐?"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P94
‘이 칼이 언제부터 이렇게 빨랐지? 팔을 뻗기만 했을 뿐인데 칼집이 목을 찌르다니….’ 영호충은 어리둥절해하며 칼을 내려다보았다. 흡성대법을 익힌 덕택에 도곡육선과 불계 화상, 흑백자에게 받은 진기를 쓸 수 있게 되자 고강한 공력이 더해진 독고구검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지만, 그 자신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 P179
"너는… 아주 잘했다. 네 사부가 어찌하여 너를 축출했는지 모르겠구나. 듣자니 네가 마교와 결탁했다던데?" "제가 신중하지 못한 탓에 어쩌다 보니 마교의 인물 몇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정일 사태는 코웃음을 쳤다. "숭산파같이 제 욕심만 챙기는 부류라면 마교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도 없다. 흥, 정파의 인물이라고 무조건 마교보다 낫다는 법도 없지." - P301
"자네는 매일 후미에 나가 옷을 입은 채 잠이 들고, 항산파의 제자들에게 무례한 짓은 커녕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더군, 자네는 무례한 방탕아가 아니라 예의 바른 군자일세. 묘령의 여승들과 아리따운 낭자들이 한 배에 타고 있는데도 흔들리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단 하루도 아니고 수십 일 동안 한결같이 그리하였으니, 자네같은 당당한 대장부는 고금을 통틀어 찾아보기 어려울 걸세. 이 막대, 크게 감탄했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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