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소 모는 평소 영웅을 존경하고 호한을 아껴왔소. 당신 무공이 비록 나보다 못하지만 대단한 영웅호한임에는 틀림없소. 하물며 다 같은 거란인이 아니오? 소 모는 당신을 벗으로 삼고자 하니 그만돌아가시오!"
홍포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 무엇이라고?"
소봉이 빙긋 웃었다.
"소 모가 당신을 벗으로 여기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이오." - P38

"그날 제가 갑자기 독침을 쐈을 때 왜 그랬는지 알아요?" .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출귀몰한 네 심사를 내가 어찌 알아내겠느냐?"
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내지 못했다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어찌 됐건 난 형부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 형부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목숨바쳐 구할 거예요. 아주 언니가 형부한테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이 아자가 언니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할 수는 없죠." - P49

야율기가 껄껄대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만일 내가 대요국 당금의 황제라는 사실을 소 현제가 미리 알았다.
면 나와 결의형제가 되려 하지 않았을 걸세. 소 현제, 내 진짜 이름은 야율홍기耶律洪基네. 내 목숨을 살려준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야."
소봉은 도량이 넓고 호탕한 성격이긴 했지만 평생 황제를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웅장한 장면을 직접 대하니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야율홍기를 향해 말했다. - P61

"형부, 짐작은 해봤어요? 그날 제가 왜 형부한테 독침을 쐈는지 말이에요. 형부를 죽이려고 쏜 게 아니라 그냥 꼼짝 못하게 할 생각이었어요. 제가 시중을 들려고 말이에요."
소봉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
아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부가 꼼짝 못하면 영원히 제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안 그럼 속으로 절 무시하는 형부가 언제든 절 버리고 모른 체할 것 아니겠어요?" - P87

소봉이 소리쳤다.
"황태숙의 명이다. 전군은 당장 무기를 버리고 성지를 받들어라. 황제 폐하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황태숙과 모든 반군 관병을 사면하셨으니 황제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반을 꾀한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 P95

"교봉 이 나쁜 놈! 네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백부님을 죽였다. 네… 네놈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못해 한이다!"
소봉은 그가 교봉이라는 자신의 옛 이름을 부르짖는 데다 그의 부모와 백부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과거 중원에서 맺은 원수일 것이라짐작할 수 있었다.
.
.
.
그 소년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이름은 유탄지다! 나도 백부님과 아버지께 배운 대로 할 수 있다!" - P123

"좋았어! 훌륭해! 진짜 사람 연을 띄웠어!"
유탄지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바라봤다.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줏빛 옷을 입은 미모의 소녀였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자 가슴이 격하게 떨려왔다. 몸은 공중에 두둥실 떠 있고 머릿속은 멍한 상태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 미모의 소녀는 바로 아자였다. - P137

유탄지는 눈물을 줄줄 흘려가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군주, 독장을 연성하고 나면 군주를 위해 죽은 소인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제 성은 유, 이름은 탄지입니다. 철추로 기억하지 마십시오."
아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 네 이름이 유탄지라는 걸 기억하면 되잖아? 넌 나한테 충성을 다했다. 아주 좋아. 넌 정말 충심이 가득한 노복이었어!"
유탄지는 그녀가 칭찬하는 말을 듣자 크게 위안을 받고 다시 두 번 더 절을 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군주!" - P199

유탄지가 무심히 무공 연마를 하다가 <<신족경>>에 그려진 그림에 따라 체내의 빙잠을 불러내고 이리저리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게 만든 것은 재미로 그런 것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력이 발전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던 것이다. - P207

‘소성하蘇星河가 바둑에 정통한 무림의 인재들을 청하니 6월 보름에여남汝南 뇌고산의 천농지아곡으로 왕림하시어 담소나 나누었으면 합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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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 형부! 어서 앉으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자가 만일 이봐요!‘ 혹은 ‘교 방주!’, ‘소 오라버니!‘ 등으로 불렀다면 소봉은 본체만체하고 그대로 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형부!‘ 하며 두 번이나 연달아 부르는 소리에 그는 아주 생각에 가슴이 시려와 대뜸 물었다.
"뭐?" - P369

아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주보의 시체를 바라보고 웃었다.
"저런 얼간이가 소나 말이랑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김승 한 마리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면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봉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악독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지닌 계집애로구나. 내가 왜 이런 계집을 상대해야 하지?‘ - P370

적성자가 아자에게 물었다.
"네 언니는 어쩌다 그런 자에게 시집을 간 게냐? 천하인들이 모두 죽기라도 했던 게냐? 아니면 그자에게 겁탈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처가 된 것이냐?"
아자가 실실 웃었다.
"어쩌다 시집을 갔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언니는 형부의 일장에 맞아 죽었어요." - P399

‘이제 보니 저들의 서열은 입문한 순서가 아닌 무공의 강약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저자는 나이가 젊은데도 대사형 대접을 받고 저자보다 연장자인 수많은 사람이 오히려 저자의 사제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상호 간에 늘 쟁투를 벌여 죽고 죽이는 일이 지속될 텐데 동문 간에 무슨 정과 형제의 의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P406

적성자는 지극히 지친 기색을 하며 몸을 휘청거리다 갑자기 무릎에 맥이 풀린 듯 바닥에 꿇어앉아버렸다. 아자가 말했다.
"대사형, 왜 그래요? 승복하는 건가요?"
적성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이… 이제… 대사형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대는 우리의 대사저입니다!"
모든 제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 P415

소봉은 비록 강호에서 참혹하고 흉악스러운 일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아자처럼 수려하고 활달하며 천진무구한 소녀가 저렇듯 악랄하게 일을 행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 P416

아자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형부, 그럼 가지 마세요. 나도 성수해로 돌아가지 않고 형부와 술이나 마시고 싸움이나 할래요."
"넌 성수파의 대사저야. 성수파 문하에 후계자인 대사저가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제가 대사저가 된 건 속임수였어요. 일단 마각이 드러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예요.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대단한 것도 없어요. 전 그냥 형부랑 술이나 마시고 싸움이나 하면서 놀고 싶어요." - P422

성수파의 암기는 무섭고 악랄하기로 소문나 있어 그의 독침에 적중됐다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희박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자가 자신의 일장에 10여 장 밖으로 날아간 걸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이 일장을 저 아이가 어찌 견디겠나? 이미 죽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양쪽 입가에서 두 줄기 선혈을 흘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 P426

‘오래된 산삼은 장백산長白山 일대의 혹한 지역에서 자생한다고 하던데 운이 좋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자를 속세에 하루라도 더 남겨둘 수만 있다면 저승에 있는 아주도 더욱 기뻐할 것이다. 내가 동생을 잘 돌보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말이야.‘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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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존께서는 안문관 밖 석벽 위에 글을 남기시면서 자칭 성은 소이고 이름은 ‘원산遠山‘이라고 하셨소. 그리고 유문에 시주를 ‘봉아兒‘라고 칭했기에 우리는 시주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남겨두었소. 다만 교가 부부에게 양육을 맡겨야 했기에 그들의 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오." - P63

"아주, 앞으로 나를 따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소와 양을 기른다고 한 말,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소?"
아주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협을 따라 살인방화를 하고 민가를 습격해 약탈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대협을 따르며 갖은 고초를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해도 기뻐할 거예요." - P78

"그 선봉장 대형은 대리국 황제의 친아우로 진남왕에 봉해진단정순이에요."
소봉은 마 부인이 단정순이라는 이름을 대자 자기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수개월 동안 천 리 길을 분주하게 달려와 어렵게 수소문한 이름을 마침내 얻게 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 P99

초승달이 신양의 옛길을 비추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10여 리를 걸어나간 후에야 소봉이 입을 열었다.
"아주, 마 부인을 속여 선봉장 대형이 대리의 단정순이란 걸 실토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고마움을 표할지 모르겠소."
아주가 담담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세경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지만 소봉은 그녀의 눈빛 속에 뭔가 근심과 초조의 빛이 감돌고 있음을 간파하고 물었다. - P104

소봉은 곧 술 열 근을 시켜 대당에 앉아 실컷 들이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며 복수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머리를 굴렸다. 대리단씨라고 생각하니 자연히 얼마 전 결의형제를 맺은 단예가 떠올라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넋을 잃은 채 술 사발을 들고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순간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 P106

소봉은 술을 마시다 언젠가 무석에서 단예와 술 내기를 할 때 그가 육맥신검의 상승기공으로 술을 손가락으로 쏟아내던 일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그 후에 달리기 대결을 펼칠 때도 그가 지닌 신공과 내력은 소봉이 절대 미치지 못할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단예가 무공은 모르지만 내공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대원수인 단정순은 대리단씨의 수뇌 중 한 명이니 무공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이 아닌가? - P107

별안간 꽃나무가 열리며 한 소녀가 뛰쳐나왔다. 온몸에 자줏빛 옷을 입은 아주보다 두 살 정도 어린 열대여섯 살 나이의 그녀는 새까맣고 또렷한 눈동자를 지닌 장난기로 가득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아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어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앞으로 훌쩍 뛰어와서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웃었다.
"정말 예쁘게 생긴 언니네요. 언니가 마음에 들어요." - P143

"주공, 오늘 일은 일시적인 호기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공께 뜻밖의 사고라도 생긴다면 저희가 무슨 면목으로 대리로 돌아가 황상을 뵙겠습니까? 모두 자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봉은 여기까지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소신은 뭐고 황상은 또 뭐지? 속히 대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럼 저자들이 대리 단가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의 그물은 매우 크고 넓다더니 단정순 그 악인을 오늘 공교롭게 마주치게 된 것인가?‘ - P165

"저 숙부는 너 때문에 죽은 게다. 알기나 하느냐?"
아자가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
"사람들이 다 아버지께 주공이라고 부르니까 난 그들한테 작은 주인이잖아요. 노복 한두 명쯤 죽인 게 뭐 대단하다 그래요?"
그 표정 속에는 경멸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 P180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공중에서 다시 우르릉 쿵쾅하며 벼락이 내려치기 시작해 그 번개가 장력의 기세를 도왔다. 소봉의 이 일장에 천지의 거대한 위력이 더해져 격출되자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단정순의 가슴을 강타했다. 순간 그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곧바로 뒤로 나자빠지면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청석교 난간 위로 부딪히며 맥없이 늘어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 P211

바로 그때 번갯불이 다시 한번 번쩍거렸다. 소봉이 손을 뻗어 단정순의 얼굴을 움켜쥐자 손에 잡히는 것은 부드러운 한 줌의 진흙이었다. 한번 비비자 간단히 떨어지면서 번쩍이는 번갯불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아주 똑똑히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주, 아주!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P212

"오라버니한테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누군가 실수로 남을 죽였을 때는 꼭 본심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에요. 물론 저를 해치고 싶진 않으셨겠지만 저한테 일장을 날리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오라버니 부모를 죽였다 해도 무심결에 저지른 잘못이에요." - P219

"설마 그 선봉장 대형이 단정순이 아니라는 말인가? 혹시 저 족자를 단정순이 쓴 게 아닌 건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단정순 외에 ‘대리단이‘라 칭할 사람이 누가 또 있으며 이런 풍류가 넘치는 시사를 써서 이곳에 걸어놓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 부인의 말이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마 부인과 단정순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데다 한 명은 북쪽, 한 명은 남쪽에 있어 무척이나 먼 거리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한 명은 초개 같은 미망인이고 한 명은 왕공 귀족인데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런 거짓말을 날조해낸다는 말인가?‘ - P233

소봉은 다시 마가로 돌아갔다. 집 밖에는 사람이라고는 없이 매우 조용했고 암탉 두 마리만 바닥에 떨어진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들어가자 방문이 열려 있고 방 안 구들장 옆에 온몸에 피범벅이 된 한여자가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마 부인이었다. 소봉은 깜짝 놀랐다. 마 부인은 자신이 밀짚 더미 안에 숨겨두었는데 어찌 여기까지 나왔단 말인가? 그는 황급히 방 안으로 달려갔다. - P322

마 부인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초조함, 흉악함, 악독함, 원한, 고통, 분노 같은 갖가지 추악한 표정이 미간과 입술, 코 사이에 모두 모여 있을 뿐 과거의 곱고 나긋나긋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미모의 가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감지를 못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미모를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죽음에 이르러 거울 속에서 자신의 이런 추악한 몰골을 보게 된 것이다. - P339

"원수를 갚으러 가야 하지만 원수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살아생전에는 그 원수를 절대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아, 알았다. 마 부인이 그 원수를 알고 있었는데 제가 화를 돋워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는 누군지 모르게 된 게로군요. 재미있네요. 교방주는 무공이 고강하고 위대한 명성이 널리 퍼져 있는 분인데 내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만 셈이네요?" - P342

얼마 가지 않아 북풍이 몰아치며 돌연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소봉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이제 그동안 쌓인 원한과 억울함을 설욕할 기회란 없고 원수를 찾아 복수할 수도 없다.
는 생각이 들자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터라 가슴 가득한 근심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해탈이라 여겼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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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왕어언은 오 장로의 기문삼재도를 일부러 사상육합도라고 말했다. 그녀는 운중학이 그의 여러 초식 중 필시 학사팔도를 펼칠 것이라 짐작하고 그가 자기도 모르게 번번이 제압을 당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과연 그는 하마터면 왼손이 잘려나갈 뻔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P85

난 오늘 그녀와 똑같은 위험천만한 일을 당했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호했다. 내가 그녀를 위해 죽는다면 그녀는 남은 일생에 가끔씩은 나 단예를 어느 정도 그리워할 것이다. 훗날 그녀가 모용복과 혼인을 하고 아들딸을 낳아 원두막 밑에서 자식들과 과거를 얘기하거나 혹은 오늘 일을 거론할 수도 있다. 그때 그녀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단 공자‘라는 세 글자를 언급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겠지…. - P94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교봉이 정통한 것은 단지 한 문파의 무예뿐이다. 네 사촌 오라버니는 천하 무학을 두루 알고 있어 장차 그 기예가 나날이 발전할 것이므로 천하제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왕어언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도 그렇게는 안 돼요. 다가오는 장래의 천하제일은 아마 여기이 단 공자일 거예요."
이연종은 고개를 뒤로 젖혀 큰 소리로 깔깔대고 웃었다. - P135

이연종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자부심으로 가득하군.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이 단가한테 깊은 연정을 느끼고 있나 보구나?"
왕어언이 얼굴을 붉혔다.
"무슨 깊은 연정이 있다 그래요? 저분과는 연정 같은 얘기를 논할 사이가 아니에요. 그저 날 위해 죽겠다고 나섰으니 당연히 복수를 해주려고 결심한 것뿐이에요."
"지금 한 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당연히 후회하지 않아요." - P147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예요? 설마 공자도 우리 사촌 오라버니처럼 온종일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단예가 이상한 듯 물었다.
"모용 공자가 황제를 꿈꾼단 말이오?"
왕어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의식중에 사촌 오라버니의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 P156

단예가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어찌 답할지 몰랐을 것이다. 한데 공교롭게도 당신이 묻는구먼.’
그는 접선을 펼쳐 천천히 몇 번 흔들며 말했다.
"남해악신 악노삼, 당신이 자랑하는 재주는 우두둑 소리를 내서 상대의 목을 비틀어 꺾어버리는 것 아니오? 근자에 공력이 많이 진보해서 요즘 가장 만족스럽게 여기는 무공은 악미편과 악취전이지. 내가 당신을 상대하려면 당연히 악미편이나 악취전을 사용하게 될 것이오." - P181

남해악신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웃었다.
"나한테 무공을 전수해주신 원래 사부님은 이미 세상을 뜨셨고 실력도 웬만하니 말하지 않겠다. 허나 내가 새로 모신 사부님은 실력이 굉장하지. 다른 건 몰라도 능파미보 하나만큼은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분이다."
단예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능파미보라… 음… 확실히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 대리의 단 공자가 뜻밖에도 귀하를 제자로 거두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소." - P182

교봉이 아무리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누군가 자신으로 변장해 조금 전 천녕사에 와서 개방 형제들을 구해줬을 거라고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 안에 필시 중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 P198

"교봉!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로다! 교삼괴 부부가 네 친부모는 아니라 해도 널 10여 년 동안이나 길러준 은혜를 경시할 수 없거늘 어찌 이리 모질게 살해를 한 것이냐?" - P204

현고대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등잔불 밑에 비친 교봉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돌연 안색이 변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너였구나. 네가 교봉이야. 내… 내가 직접 가르쳐낸 제자…."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공포와 고통 그리고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 P219

교봉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매우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기만 할 뿐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구리거울을 힐끗쳐다보자 자신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얼마 전에도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어디였지?‘ - P232

그녀는 교봉을 보고 억지웃음을 짓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교 방주!"
이 말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교봉이 그녀의 승포 자락을 개울물에 적셔 그녀 얼굴 위를 힘껏 몇번 닦아내자 잿빛 밀가루가 후두두둑 떨어지면서 아리따운 소녀 얼굴이 드러났다. 교봉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주 낭자였군!"
허청으로 교묘하게 변장하고 소림사 보리원에 잠입한 사람은 다름아닌 모용복의 시녀인 아주였다. - P248

순간 교봉은 그녀가 자신의 진기에만 의지해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진기를 그녀의 체내에 쏟아넣지 않으면 한 시진이 채 되지 않아 기운이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이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 P254

아, 교 대협, 근데 이 얘기가 실화인가요?"
"실제 있었던 일이오."
아주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토록 흉악한 아이라면 못된 거란인일 거예요!"
교봉은 돌연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 몸을 박차고 일어섰다. - P266

"여러 형제들이 짐작한 바로는 설신의가 영웅첩을 돌리는 이유가 교봉을 어찌 대처할지 상의하자는 거라 하더군요. 염왕적은 불의를 원수처럼 증오하는 데다 소림사의 현난과 현적 두 대사와 교분이 매우 두텁다고 하더이다." - P276

난 도대체 거란인인가, 아니면 한인인가? 내 부모와 사부님을 죽인자는 누구일까? 난 평생 인의를 행하며 살아왔는데 오늘 내가 어찌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수많은 영웅을 해쳤을까? 난 아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 왔건만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됐으니 이 어찌 우둔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천하 영웅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아니던가?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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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중원의 호걸들은 거란국에서 대규모 무사들을 소림사로 보내 사찰 내에 비밀리 소장해오던 수백 년 된 무공 도보를 탈취해 가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됐소이다." - P19

"그렇소. 나도 봤지만 알아볼 순 없었소. 그때 사방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석벽 위에서 사각사각 글 새기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숨소리조차 감히 내뱉을 수 없었으니 말이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는 땡그랑하고 단도를 바닥에 집어던져 버렸소.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안은 채 벼랑가로 걸어가더니 깊은 계곡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는 것이었소." - P32

"우리 세 사람은 그 우마 장수가 써준 역문을 서로 한 번씩 돌려봤지만 정말 믿기 힘들었소. 그 거란인은 그때 이미 자결을 결심한 상태였는데 어찌 거짓을 말하겠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서 거란문에 능통한 사람을 찾아내 그에게 탁본한 글귀를 번역해 달라고 했지만 그뜻은 역시 다르지 않았소. 에이, 만일 그 내용이 확실하다면 희생당한 형제 17명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며 그 거란인 역시 무고하게 희생된 것이고 그 거란인 부부에게는 더더욱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셈이 된 것이오." - P37

교봉은 여기까지 듣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광대사, 그… 그 소실산 밑의 농부가 … 성… 성이 뭡니까?"
지광대사는 말했다.
"이미 짐작을 했을 테니 숨기지는 않겠소. 그 농부의 성은 교喬이고 이름은 삼괴三權요."
교봉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아니, 아닙니다! 헛소리 마십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날조해 사람을 무고하다니! 난 당당한 한인이거늘 어찌 거란 오랑캐일 수가 있습니까? 우리… 우리… 삼괴공은 내 친아버지입니다. 다시 한번 헛소리를 한다면…." - P40

마 부인, 이 교봉이 가진 솜씨로 부인 댁에 가서 뭔가를 훔치려 했다면 굳이 미혼향같은 걸 사용했으리라 생각하시오? 더구나 난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며 내 몸에 지닌 물건을 떨어뜨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집에 아녀자만 두셋 있는 집은 고사하고 황궁 내원이나 승상부의 막사, 천군만마 안이라 해도 나 교봉이 취해 오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취해오지 못할 것이 없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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