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존께서는 안문관 밖 석벽 위에 글을 남기시면서 자칭 성은 소이고 이름은 ‘원산遠山‘이라고 하셨소. 그리고 유문에 시주를 ‘봉아兒‘라고 칭했기에 우리는 시주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남겨두었소. 다만 교가 부부에게 양육을 맡겨야 했기에 그들의 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오." - P63
"아주, 앞으로 나를 따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소와 양을 기른다고 한 말,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소?" 아주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협을 따라 살인방화를 하고 민가를 습격해 약탈한다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대협을 따르며 갖은 고초를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해도 기뻐할 거예요." - P78
"그 선봉장 대형은 대리국 황제의 친아우로 진남왕에 봉해진단정순이에요." 소봉은 마 부인이 단정순이라는 이름을 대자 자기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수개월 동안 천 리 길을 분주하게 달려와 어렵게 수소문한 이름을 마침내 얻게 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 P99
초승달이 신양의 옛길을 비추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10여 리를 걸어나간 후에야 소봉이 입을 열었다. "아주, 마 부인을 속여 선봉장 대형이 대리의 단정순이란 걸 실토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고마움을 표할지 모르겠소." 아주가 담담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세경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었지만 소봉은 그녀의 눈빛 속에 뭔가 근심과 초조의 빛이 감돌고 있음을 간파하고 물었다. - P104
소봉은 곧 술 열 근을 시켜 대당에 앉아 실컷 들이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며 복수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머리를 굴렸다. 대리단씨라고 생각하니 자연히 얼마 전 결의형제를 맺은 단예가 떠올라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넋을 잃은 채 술 사발을 들고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순간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 P106
소봉은 술을 마시다 언젠가 무석에서 단예와 술 내기를 할 때 그가 육맥신검의 상승기공으로 술을 손가락으로 쏟아내던 일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그 후에 달리기 대결을 펼칠 때도 그가 지닌 신공과 내력은 소봉이 절대 미치지 못할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단예가 무공은 모르지만 내공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대원수인 단정순은 대리단씨의 수뇌 중 한 명이니 무공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이 아닌가? - P107
별안간 꽃나무가 열리며 한 소녀가 뛰쳐나왔다. 온몸에 자줏빛 옷을 입은 아주보다 두 살 정도 어린 열대여섯 살 나이의 그녀는 새까맣고 또렷한 눈동자를 지닌 장난기로 가득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아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어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앞으로 훌쩍 뛰어와서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웃었다. "정말 예쁘게 생긴 언니네요. 언니가 마음에 들어요." - P143
"주공, 오늘 일은 일시적인 호기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공께 뜻밖의 사고라도 생긴다면 저희가 무슨 면목으로 대리로 돌아가 황상을 뵙겠습니까? 모두 자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봉은 여기까지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소신은 뭐고 황상은 또 뭐지? 속히 대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럼 저자들이 대리 단가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의 그물은 매우 크고 넓다더니 단정순 그 악인을 오늘 공교롭게 마주치게 된 것인가?‘ - P165
"저 숙부는 너 때문에 죽은 게다. 알기나 하느냐?" 아자가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 "사람들이 다 아버지께 주공이라고 부르니까 난 그들한테 작은 주인이잖아요. 노복 한두 명쯤 죽인 게 뭐 대단하다 그래요?" 그 표정 속에는 경멸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 P180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공중에서 다시 우르릉 쿵쾅하며 벼락이 내려치기 시작해 그 번개가 장력의 기세를 도왔다. 소봉의 이 일장에 천지의 거대한 위력이 더해져 격출되자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단정순의 가슴을 강타했다. 순간 그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곧바로 뒤로 나자빠지면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청석교 난간 위로 부딪히며 맥없이 늘어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 P211
바로 그때 번갯불이 다시 한번 번쩍거렸다. 소봉이 손을 뻗어 단정순의 얼굴을 움켜쥐자 손에 잡히는 것은 부드러운 한 줌의 진흙이었다. 한번 비비자 간단히 떨어지면서 번쩍이는 번갯불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아주 똑똑히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주, 아주!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P212
"오라버니한테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누군가 실수로 남을 죽였을 때는 꼭 본심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에요. 물론 저를 해치고 싶진 않으셨겠지만 저한테 일장을 날리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오라버니 부모를 죽였다 해도 무심결에 저지른 잘못이에요." - P219
"설마 그 선봉장 대형이 단정순이 아니라는 말인가? 혹시 저 족자를 단정순이 쓴 게 아닌 건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단정순 외에 ‘대리단이‘라 칭할 사람이 누가 또 있으며 이런 풍류가 넘치는 시사를 써서 이곳에 걸어놓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 부인의 말이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마 부인과 단정순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데다 한 명은 북쪽, 한 명은 남쪽에 있어 무척이나 먼 거리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한 명은 초개 같은 미망인이고 한 명은 왕공 귀족인데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런 거짓말을 날조해낸다는 말인가?‘ - P233
소봉은 다시 마가로 돌아갔다. 집 밖에는 사람이라고는 없이 매우 조용했고 암탉 두 마리만 바닥에 떨어진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들어가자 방문이 열려 있고 방 안 구들장 옆에 온몸에 피범벅이 된 한여자가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마 부인이었다. 소봉은 깜짝 놀랐다. 마 부인은 자신이 밀짚 더미 안에 숨겨두었는데 어찌 여기까지 나왔단 말인가? 그는 황급히 방 안으로 달려갔다. - P322
마 부인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초조함, 흉악함, 악독함, 원한, 고통, 분노 같은 갖가지 추악한 표정이 미간과 입술, 코 사이에 모두 모여 있을 뿐 과거의 곱고 나긋나긋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미모의 가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감지를 못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미모를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죽음에 이르러 거울 속에서 자신의 이런 추악한 몰골을 보게 된 것이다. - P339
"원수를 갚으러 가야 하지만 원수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살아생전에는 그 원수를 절대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아, 알았다. 마 부인이 그 원수를 알고 있었는데 제가 화를 돋워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는 누군지 모르게 된 게로군요. 재미있네요. 교방주는 무공이 고강하고 위대한 명성이 널리 퍼져 있는 분인데 내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만 셈이네요?" - P342
얼마 가지 않아 북풍이 몰아치며 돌연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소봉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이제 그동안 쌓인 원한과 억울함을 설욕할 기회란 없고 원수를 찾아 복수할 수도 없다. 는 생각이 들자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터라 가슴 가득한 근심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해탈이라 여겼다. - P3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