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왕어언은 오 장로의 기문삼재도를 일부러 사상육합도라고 말했다. 그녀는 운중학이 그의 여러 초식 중 필시 학사팔도를 펼칠 것이라 짐작하고 그가 자기도 모르게 번번이 제압을 당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과연 그는 하마터면 왼손이 잘려나갈 뻔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P85
난 오늘 그녀와 똑같은 위험천만한 일을 당했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호했다. 내가 그녀를 위해 죽는다면 그녀는 남은 일생에 가끔씩은 나 단예를 어느 정도 그리워할 것이다. 훗날 그녀가 모용복과 혼인을 하고 아들딸을 낳아 원두막 밑에서 자식들과 과거를 얘기하거나 혹은 오늘 일을 거론할 수도 있다. 그때 그녀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단 공자‘라는 세 글자를 언급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겠지…. - P94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교봉이 정통한 것은 단지 한 문파의 무예뿐이다. 네 사촌 오라버니는 천하 무학을 두루 알고 있어 장차 그 기예가 나날이 발전할 것이므로 천하제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왕어언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도 그렇게는 안 돼요. 다가오는 장래의 천하제일은 아마 여기이 단 공자일 거예요." 이연종은 고개를 뒤로 젖혀 큰 소리로 깔깔대고 웃었다. - P135
이연종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자부심으로 가득하군.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이 단가한테 깊은 연정을 느끼고 있나 보구나?" 왕어언이 얼굴을 붉혔다. "무슨 깊은 연정이 있다 그래요? 저분과는 연정 같은 얘기를 논할 사이가 아니에요. 그저 날 위해 죽겠다고 나섰으니 당연히 복수를 해주려고 결심한 것뿐이에요." "지금 한 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당연히 후회하지 않아요." - P147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예요? 설마 공자도 우리 사촌 오라버니처럼 온종일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단예가 이상한 듯 물었다. "모용 공자가 황제를 꿈꾼단 말이오?" 왕어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의식중에 사촌 오라버니의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 P156
단예가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어찌 답할지 몰랐을 것이다. 한데 공교롭게도 당신이 묻는구먼.’ 그는 접선을 펼쳐 천천히 몇 번 흔들며 말했다. "남해악신 악노삼, 당신이 자랑하는 재주는 우두둑 소리를 내서 상대의 목을 비틀어 꺾어버리는 것 아니오? 근자에 공력이 많이 진보해서 요즘 가장 만족스럽게 여기는 무공은 악미편과 악취전이지. 내가 당신을 상대하려면 당연히 악미편이나 악취전을 사용하게 될 것이오." - P181
남해악신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웃었다. "나한테 무공을 전수해주신 원래 사부님은 이미 세상을 뜨셨고 실력도 웬만하니 말하지 않겠다. 허나 내가 새로 모신 사부님은 실력이 굉장하지. 다른 건 몰라도 능파미보 하나만큼은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분이다." 단예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능파미보라… 음… 확실히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 대리의 단 공자가 뜻밖에도 귀하를 제자로 거두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소." - P182
교봉이 아무리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누군가 자신으로 변장해 조금 전 천녕사에 와서 개방 형제들을 구해줬을 거라고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 안에 필시 중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 P198
"교봉!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로다! 교삼괴 부부가 네 친부모는 아니라 해도 널 10여 년 동안이나 길러준 은혜를 경시할 수 없거늘 어찌 이리 모질게 살해를 한 것이냐?" - P204
현고대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등잔불 밑에 비친 교봉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돌연 안색이 변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너였구나. 네가 교봉이야. 내… 내가 직접 가르쳐낸 제자…."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공포와 고통 그리고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 P219
교봉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매우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기만 할 뿐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구리거울을 힐끗쳐다보자 자신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얼마 전에도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어디였지?‘ - P232
그녀는 교봉을 보고 억지웃음을 짓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교 방주!" 이 말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교봉이 그녀의 승포 자락을 개울물에 적셔 그녀 얼굴 위를 힘껏 몇번 닦아내자 잿빛 밀가루가 후두두둑 떨어지면서 아리따운 소녀 얼굴이 드러났다. 교봉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주 낭자였군!" 허청으로 교묘하게 변장하고 소림사 보리원에 잠입한 사람은 다름아닌 모용복의 시녀인 아주였다. - P248
순간 교봉은 그녀가 자신의 진기에만 의지해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진기를 그녀의 체내에 쏟아넣지 않으면 한 시진이 채 되지 않아 기운이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이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 P254
아, 교 대협, 근데 이 얘기가 실화인가요?" "실제 있었던 일이오." 아주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토록 흉악한 아이라면 못된 거란인일 거예요!" 교봉은 돌연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 몸을 박차고 일어섰다. - P266
"여러 형제들이 짐작한 바로는 설신의가 영웅첩을 돌리는 이유가 교봉을 어찌 대처할지 상의하자는 거라 하더군요. 염왕적은 불의를 원수처럼 증오하는 데다 소림사의 현난과 현적 두 대사와 교분이 매우 두텁다고 하더이다." - P276
난 도대체 거란인인가, 아니면 한인인가? 내 부모와 사부님을 죽인자는 누구일까? 난 평생 인의를 행하며 살아왔는데 오늘 내가 어찌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수많은 영웅을 해쳤을까? 난 아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 왔건만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됐으니 이 어찌 우둔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천하 영웅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아니던가?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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