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예는 수많은 위혹이 풀렸지만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다는 기분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커다란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왕어언의 모친과 자기 부친이 과거에 정을 통했던 사이라고 생각하자 매우 못마땅한 생각이 든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갑자기 극심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두려운 일을 감히 있는 그대로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 말할 수 없이 초조하고 불안할 뿐이었다. - P136
"사촌 누이가 어디로 갔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누이는 줄곧 대리 단 공자와 함께 다녔으니 어쩌면 두 사람이 이미 혼례를 올리고 부부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왕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 P138
"단… 단… 벼… 별고 없었나요?" 단정순이 그 목소리를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가 고개를 돌려 그게 왕 부인임을 알아차리고는 더더욱 안색이 변했다. 그는 도처에 적지 않은 정을 흘리고 다녔지만 수많은 상대 중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왕 부인이었다. - P168
"뭐? 저.… 저 녀석이 어언.…." 단정순은 안색이 창백해져 왕 부인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 딸 이름이 어언이오?" 왕 부인은 원래 거칠고 조급한 성격이었던 터라 이 정도까지 참은 것만 해도 평생 처음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컥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이게 다 양심 없고 박정한 당신 때문이에요.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당신 친딸까지 해친단 말이에요? 어언・・・ 어언이・・・ ・・・ 그 아이는 당신 친골육이라고요!" - P174
단예는 남해악신의 상처 부위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자신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그의 사부로서 그에게 제대로 베푼 것이라고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수차에 걸쳐 자신을 구한데다 오늘 이렇게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P178
단연경이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에게 순종하는 자는 창성할 것이며 거역하는 자는 망할 것이다!" 그는 철장을 들어올려 단예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갔다. 별안간 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룡사 밖, 보리수 아래, 더러운 비렁뱅이, 긴 머리의 관음." 단연경이 ‘천룡사 밖‘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철장은 허공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추었다. 그러고는 말이 끝나자 철장이 끊임없이 부들부들 떨리다 천천히 내려갔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도백봉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무궁무진하다는 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 P178
단연경은 ‘임자‘이란 세 글자를 보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임자년? 바로 그해 2월에 적의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채 천룡사 밖에 갔지 않았던가? 이런 저… 저 아이가 11월이 생일이라면 딱 열 달인데 그럼 그때 회임을 했다는 것인가? 그… 그럼… 저… 저 녀석이 내 아들? - P188
모용복이 말했다. "재하의 심원은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대연 재건의 꿈은 하루아침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전 우선 전하가 대리국 황위에 오르는 것을 보좌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자식이 없으니 저를 양자로 거두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대업을 이룬다면 서로 득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 P194
모용복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벗을 팔아 영화를 구하는 것이 불의겠지." 그의 일장은 부드럽고 섬세한 내경으로 포부동의 영대, 지양 두 곳의 요혈을 후려친 것이라 매우 치명적인 장력이었다. 포부동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보살피며 자라난 공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독수를 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그는 무방비 상태에서 요혈을 강타당하자 욱 하고 선혈 한 모금을 뿜어내며 그 자리에 고꾸라져 죽어버렸다. - P200
왕 부인은 고약한 냄새를 한번 맡고 코를 찌르는 듯 구토가 나오려 하자 한바탕 욕을 퍼부으려 했다. 순간 사지의 경력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단정순과 단 부인 그리고 진홍면, 완성죽, 감보보 세 여자를 이리저리 훑어보다 갑자기 질투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야! 어서 저 천한 년들 네 명을 싹 다 죽여버려라!" - P209
단예는 부친과 모친이 동시에 검으로 자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순간 두 다리가 마치 식초에 담가놓은 듯 시리고 마비돼 걸음을 옮길 힘이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바닥에 짚고 기어가며 소리쳤다. 예기치 못한 "어머니, 아버지! 두 분께서 어… 어찌…." "아들아, 아버지와 이 어미 모두 먼저 떠난다. 부..… 부디 자신을 잘 돌보도록 해라……." - P225
단예가 소리쳤다. "죽일 테면 죽여라! 어찌 손을 쓰지 않는 것이냐?" 단연경은 그의 몸에 찍었던 혈도를 풀어주며 여전히 전음입밀 수법으로 말했다. "난 내 아들을 죽이지 않는다! 네가 날 인정 못하겠다고 하니 육맥신검으로 날 죽여 단정순과 네 모친의 복수를 해도 좋다! 이 말을 하면서 가슴을 들이밀고 단예가 손을 쓰기만 기다렸다. - P231
‘황상께서 남쪽으로 내려온 건 무슨 의도일까? 아자의 공주 봉호를 어찌 ‘평남‘이라 한거지? 평남..… 혹시 대송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가?‘ 야율홍기가 소봉의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현제, 우리 둘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가서 얘기나 좀 나누세." - P281
야율홍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남원대왕 소봉은 작위를 받으라." 소봉은 말 위에서 훌쩍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남원대왕 소봉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짐을 훌륭하게 보좌했기에 이제 소봉을 왕으로 봉해 평남대원수로서 삼군을 통솔토록 한다. 이상!" - P286
소봉은 요나라인들의 피와 살점이 난무하고 시체가 바닥에 널려 있는 모습을 보고 흰색 보자기를 든 채 두손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난 거란인이지 한인이 아니다! 난 거란인이지 한인이 아니야!‘ - P340
소봉은 타구봉을 가져와 봉법 요결을 그에게 들려줬다. 허죽은 기억력이 무척 좋고 이해력마저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소무상공이란 기반을 갖추고 있어 타구봉법이 어렵긴 해도 천산절매수나 천산육양장 등 다른 심오한 무공보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 . 소봉은 이어서 항룡십팔장도 전수했다. 이는 극히 강한 것도 극히 부드러운 것도 아닌 유가와 도가의 철학 이론을 겸비한 매우 심오한 무학이었다. - P358
몇 년이 흘러 개방에 한 소년 영웅이 배출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매우 신중하고 실력이 있으며 인간관계 역시 좋았던 터라 개방 제자들이 공개적인 논의를 거쳐 그를 방주로 추대하기로 했다. 모두들 소봉의 의도를 존중해 그를 영취궁에 보내 우선 허죽의 심사를 거치도록 하고 다시 타구봉법과 항룡십팔장을 전수받도록 했다. 그 소년 방주는 이를 저버리지 않고 신공을 배워 개방을 나날이 발전시켜 놀라운 중흥을 이루어냈다. 개방은 이때부터 영취궁을 은인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 P360
"노화상, 당신들 모두 중원 백성이라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 중원 사람 같지 않다. 좋아! 내가 최대한 봐주겠다. 대송 백성은 들어올 수 있지만 대송 백성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다." 군호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예의 수하들은 대리국 사람이고 허죽의 수하들은 서역 사람은 물론 서하, 토번, 고려인들까지 각 부족 사람이 섞여 있었다. 만일 대송 백성들만 관문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대리국과 영취궁 두 무리의 인마들은 대부분 들어갈 수가 없지 않은가? - P380
소봉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제자리에서 잠시 꼼짝 말고 대기하시오. 재하가 요 황제와 얘기를 좀 나눠보겠소." 그는 단기필마로 내달려갔다. 그는 양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손에 아무런 무기가 없다는 뜻을 표한 뒤 큰 소리로 외쳤다. "대요국 황제 폐하, 신 남원대왕 소봉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력을 돋우어 내뱉은 이 말은 먼 곳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10여만에 이르는 요군 장졸들이 이 말을 또렷이 듣고 하나같이 안색이 변했다. - P382
돌연 두 개의 인영이 마치 번개처럼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야율홍기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다름 아닌 허죽과 단예였다. 그 두사람은 정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오늘의 이 상황이 요 황제를 납치해 협박해야만 모두가 온전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서로 손짓을 하며 각각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 P384
소봉이 말했다. "신이 감히 두 형제를 대신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약속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야율홍기가 껄껄대고 웃었다. "천하에는 내가 내놓지 못할 물건이 많지 않네. 터무니없는 요구라 해도 들어줄 것이야." 소봉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즉각 철수를 하시고 평생 단 한 명의 요군 병사도 송나라 변경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 P388
야율홍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소봉이 여전히 꼼짝도 안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소 대왕, 송나라에 그런 큰 공을 세웠으니 고관에 봉해져 후한 봉록을 받을 날이 멀지 않았겠구나." 소봉이 큰 소리로 답했다. "폐하, 소봉은 거란인으로 폐하와 결의형제를 맺었지만 오늘 폐하를 협박해 거란의 대죄인이 되었습니다. 이미 불충에 불의한 이 몸이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이 말을 마치자 오른손에 쥐고 있던 두 토막으로 부러진 화살을 높이 들더니 내공을 돋우어 오른팔을 거꾸로 들어 찔렀다. 화살은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심장에 박혀 버렸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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