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건 해왕성, 저건 천…… 아니, 토성이에요!" 거대한 목성형 행성 2개가 이미 2차원으로 변해 있었다. 천왕성의 궤도가 토성보다 더 밖에 있지만 지금은 천왕성이 태양 너머 토성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 토성이 먼저 2차원으로 변한 것이었다. - P672
2차원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3차원 섬이 계속 가라앉으며 녹아내렸다. 유럽 6호 우주 도시가 완전히 2차원화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 P678
하지만 추락 지역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조금 전 AI가 한 말은태양계의 3차원 공간이라는 거대한 카펫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2차원 심연을 향해 떠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망치고 있는 우주선들은 카펫 위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벌레일 뿐이며, 그들은 별로 남지 않은 생존 시간조차 얼마 연장할 수 없을 것이다. - P686
"떠나라고요? 어디로요?" "어디든. 은하계 어디든 갈 수 있어. 살아 있는 동안 안드로메다 은하도 직접 볼 수 있을 게다. 헤일로호는 광속 우주선이니까. 그 우주선에 세계에서 하나뿐인 공간곡률 추진 엔진이 탑재되어 있어." 경악에 가까운 전율이 청신과 AA의 말문을 막았다. - P696
청신이 AI에게 명령한 뒤 화면 속 뤄지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겠어요. 아직 시간이 있어요. 아직 천왕성도 다 추락하지 않았잖아요!" 그때 AI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현재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최고 권한은 뤄지 박사님에게 있습니다. 헤일로호를 명왕성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건 뤄지 박사님뿐입니다." 뤄지가 통로 앞에 선 채 웃으며 말했다. "떠날 생각이었다면 아까 너희와 함께 떠났겠지. 난 장거리 항해를 하기엔 너무 늙었어. 내 걱정은 마라. 난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공간곡률 추진 엔진 시동 준비." - P699
청신은 이제야 알았다. 지구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 즉벙커, 블랙존, 광속 우주선 가운데 광속 우주선만이 진정한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윈톈밍이 그 길을 알려주었지만 그녀가 그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 P704
청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AA가 지구 문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이 될 것이다. 그녀가 죽는다는 건 지구 인류의 절반을 죽이는 것과 같았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이었다. - P706
헤일로호가 윈톈밍이 청신에게 선물한 별을 향해 광속으로 날아갔다. - P710
AA가 말했다. "선생님 잘못으로 태양계가 멸망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정말 우스운 착각이에요.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기가 지구를 들어 올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라고요. 설사 당시에 선생님이 웨이드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 전쟁의 결과가 어땠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 P713
비행선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흰색 재킷과 어두운 색 바지 차림이었으며 헤일로호가 착륙할 때 생긴 기류에 머리가 어지럽게 날렸다. AA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이에요?" 청신이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얼핏 보았지만 윈텐밍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 P718
주위를 둘러보러 다니는 동안 AA는계속 관이판 곁을 맴돌며 관이판이 말할 때마다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녀는 지금껏 남자 앞에서 그런 적이 없었다. . . . 그런데 지금 AA가 위협의 세기에서 온 이 우주학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면 AA가 행복한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에 청신은 속으로 흐뭇했다. - P727
청신 자신은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녀의 정신이 계속 살아있도록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윈톈밍이었지만 이제 그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286광년 밖에서 만나기로 한 4세기 전 약속은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계속 살아가겠지만 그건 그저 책임감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지구 문명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막아야했다. - P727
관이판은 헌터호를 타고 회색별로 가보기로했다. 청신이 함께 가겠다고 고집하자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하던 관이판이 AA의 한마디에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AA가 말했다. "같이 가게 해주세요. 윈톈밍과 관계된 일인지 알고 싶으실 거예요." - P728
"빛무덤이라고요?" "광속 우주선의 항적이 만들어낸 저속 블랙홀이죠. 3호 세계는 블랙홀이에요. 어떤 사건으로 그 세계의 좌표가 노출되는 바람에 그곳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자기 세계를 블랙홀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우린 그걸 블랙존이라고 불러요." - P730
"암흑의 숲 상태가 우리에겐 생존의 전부이지만 우주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일이에요. 우주는 거대한 전쟁터예요. 각 진지 사이에 있는 저격수들이 실수로 자기 위치를 노출한 적을 사살하죠. 통신병이라든가 취사병 같은 그게 바로 암흑의 숲 상태예요. 전쟁 전체로 보면 작은 일이라고요. 태양계 인류는 진정한 행성 간 전쟁을 보지 못했어요." - P732
진정한 행성 간 전쟁에서는 신에 버금가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문명들이 서슴없이 우주의 법칙을 전쟁 무기로 삼죠.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규칙은 아주 많아요. 제일 흔하게 사용하는 게 공간적 차원과 광속이에요. 보통 차원을 낮추는 건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광속을 낮추는 건 방어용으로 쓰죠. - P733
공격자가 먼저 자신을 바꾸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저차원 존재로 바꾸는 거죠. 4차원에서 3차원으로 바꿀 수도 있고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전체 문명이 저차원으로 들어간 뒤에 적에게 차원 공격을 가해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가공할 규모의 광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거예요. - P734
전쟁에서 저광속 블랙홀을 만들어 적을 그 안에 가둬버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방어용 성벽이나 함정으로 더 많이 사용해요. 저광속 지대 중 면적이 넓은 건 성계 하나를 통째로 에워쌀 수 있을 만큼 길어요. 항성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는 수많은 저광속 블랙홀이 하나로 합쳐져 수천만 광년에 걸쳐 이어져 있죠. 그게 행성간 만리장성이에요. 아무리 강력한 함대도 그 함정에 빠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어요." - P736
"전원 시대가 지나고 전쟁 시대가 되면서 한차원, 한차원 거시에서 미시로 줄어들고, 광속도 계속 늦어진 거로군요………" - P738
"복원자?" "리세터(Resetter)라고도 불러요. . . 복원자는 우주를 리셋해 전원 시대로 되돌리고 싶어 해요." "어떻게요?" "시곗바늘이 12시를 지나게 하는 거예요. 공간의 차원을 예로 들어볼게요. 이미 저차원으로 떨어진 우주를 다시 고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우주를 차원으로 낮추고도 계속 차원을 낮추면 시계가 재설정되면서 우주의 거시 차원이 다시 10차원으로 복원된다는 논리예요." "0차원이라고요? 공간이 차원으로 변하는 걸 봤어요?" "아뇨, 2차원으로 떨어지는 것만 봤어요. 1차원화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디선가 복원자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들이 성공한 적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광속을 0으로 낮추는 게 상대적으로 더 쉬우니까 그렇게 해서 무한한 광속으로 되돌아가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거죠." - P742
"그렇진 않아요. 죽음의 선이 완전히 확산된 후에는 곡률 추진 항적처럼 그 내부의 광속은 0이 아니에요. 넓게 확산될수록 내부의 광속은 더 높죠. 하지만 그래도 초속 10여 킬로미터의 저광속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의 선이 확산되고 나면 이 성계가 저속 블랙홀로 변할 가능성이 커요. 박사님이 말한 블랙존이죠. 어서 가요." - P743
그때 AA가 그들을 호출했다. 관이판이 응답했다. "여기는 헌터호. 무슨 일이에요?" AA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수없이 불렀지만 AI가 받아서 두 분을 깨울 수 없다고 했어요!" "위급 상황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엄청난 소식이에요! 윈톈밍이 왔어요!" - P745
그때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귓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예리한칼이 왕복선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가르고 들어오는 것 같더니 뒤이어 격렬한 진동이 찾아왔다. 바로 다음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청신은 그것이 찰나의 시간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한없이 짧고 또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뛰어넘는 느낌이 들며 청신은 자신의 몸이 시간의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잠시 후 관이판이 방금 그녀가 ‘시간의 진공‘을 경험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 P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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