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시마코가 도망간 것이다. 아마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돈이 바닥난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돈이 떨어진 아버지가 자신에게 기댈까 봐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가로챈 것들과 함께 말이다. - P221

그날 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더 나아가 나는 아버지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막연히 느꼈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 P223

에지리 요코와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이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구라모치는 내게서 그 소중한 추억을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비열한 방법으로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그것은 살인에 필적하는 행위다. - P239

"사실이야. 물론 그 애는 처음이 아니었어. 아주 능숙하더라고. 내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끝나자마자 팬티를 입더니 ‘자, 5천엔‘ 하면서 손을 내밀었어."
"매춘부처럼 말이야?"
"매춘부처럼이 아니라 매춘부 그 자체였어. - P276

그날 밤늦도록 고민했다. 구라모치와 함께 사는 일에 여전히 저항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그 저항감을 이기고 말았다. - P331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동안 세상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권 거래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나였지만 구라모치의 회사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 P268

"어떤 계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인이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경우 바로 그 계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계기가 없으면 살인자가 되는 문을 통과하지 못하죠. 아, 물론 통과하지 못하는 편이 낫지만 말입니다. 그런 문은 영원히 지나가지 않는 게 좋아요."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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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많은데 혼자서 여러가지를 해야 하는 터라 시급에 비해 일이 힘들었지만 나는 그곳에 가는 게 즐거웠다. 그 이유는 바로 에지리 요코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53

카페에서 보낸 두 시간 동안 대화는 대부분 구라모치와 요코사이에서 오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을 뿐이다.
카페에서 나오자 구라모치는 요코를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 P160

요리할 일도 없는 아버지가 뭐 하러 아들의 조각칼 숫돌까지 빌려 가면서 칼을 갈았을까.
아침부터 무더운 날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는 시마코를 죽일 작정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 P176

아버지를 말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시마코 때문에 추락한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그보다 나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여자를 죽일까 하는 것이었다. 죽인 다음엔 어떻게 할것인가, 죽이겠다는 결의는 얼마나 강렬한가, 그런 것들도 궁금했다. - P176

나는 모쪼록 아버지가 냉철한 실행자이기를 바랐다. 가슴 깊이 살의를 불태우며 치밀하게 계획해 대담하게 결행하길 바랐다. - P177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너무도 허망한 첫사랑의 종말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역 개찰구를 지나면서 내가 물었다.
"요코가 사귄다는 상대,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이야?"
요코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놀란 기색은 없었다. 내가 눈치를 챘다는 건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P182

아버지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자를 죽이려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환멸이 느껴졌다. 아니, 아버지의 살의가 겨우 그정도였다는 사실에 실망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살인은 역시 무리였다. - P194

시마코에게 감쪽같이 넘어간 아버지는 그녀가 일하는 술집의 단골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들고 있는 성냥을 보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시마코와 관계를 회복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휴일에도 그녀를 만나는 눈치였다. 나는 수년 전 그들과 함께 긴자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아버지는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다. - P195

사건이 일어난 학교는 에지리 요코가 다니던 고등학교였다. 그리고 투신자살한 학생은 바로 에지리 요코였다. - P196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살의가 용솟음쳤다. 물론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몇 번이나 그런 장면을 상상했다. 엉망으로 취한 채 자고 있는 아버지의 해마 같은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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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을 떠올리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 하나 아버지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동을 거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젊은 연인에게 푹 빠져 있던 아버지를 제자리로 돌려놓지는 못하더라도 그토록 처참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 P86

그런데 가는 도중에 누군가 뒤에서 아버지 머리를 내리쳐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아버지가 쓰러진 뒤에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줄알고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P88

"이러니저러니 해도 솜씨와 기술이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아버지는 이 오른손이 있는 한 밥은 굶지 않아.",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믿음직하다고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 오른손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 P92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나는 원망에 가득 차서 밤마다 이불 속에서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주의 편지가 떠올랐다. 내게 배달된 23통의 엽서. ‘殺’이라고 적힌 23명의 저주가 담긴 엽서. - P94

그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 처지를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숨기기는커녕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험담하는 일도 없어진다. 나와 이야기 나누는 걸 꺼리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집안의 치부를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철저히 우리 반의 어릿광대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 P98

남자가 웃는 얼굴로 집 안쪽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한 후 걸음을 옮기자 문 안쪽에서 팔이 나와 문을 닫았다.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팔이었다. 나는 그것이 엄마 팔이라고 확신했다. 동시에 관두자는 생각이 가슴속에 번져 나갔다. 이제 엄마 곁에 내가 머물자리 따위는 없었다. - P107

‘무시‘라는 형태의 따돌림은 내게 육체적 고통은 주지 않았지만 정신에는 착실하게 상처를 입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의논할 상대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아파트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고, 산양 얼굴을 한 담임은 나와 엮이는 걸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P117

다만 내가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의지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어디 맘대로 해 봐. 여차하면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살인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 아닐까 싶다. 나는 매일 살인을 상상했다.
단순한 몽상이 아니었다. 내게는 살인의 수단이 있었다. 책상서랍에 감춰 둔 그것, 바로 승홍이었다. - P122

가토 녀석들을 죽인다는 데 양심의 가책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을 실행하는 건 나 자신이 망가져도 좋으니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 P123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살인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살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동경하는 건 분명한 동기가 있고 살인의지가 지속적이며 냉철하게 실행에 옮기는 유형의 살인이었다. 브랭빌리에르 후작 부인이 바로 그랬다.
살인의 유혹은 강렬했지만 실행하려면 동기가 있어야 했다. 동기 없는 살인은 진정한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 P124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경트럭 뒤에 몸을 숨기고 있으려니 구라모치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위를 살피다가 화분 밑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내 머릿속에는 이미 살인 계획이 완성되어 있었다. - P134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구라모치를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를 독살한다는 계획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에 살인 자체를 즐기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끈질기게 잠복할 수 있었다. - P135

구라모치에게 독이 든 붕어빵을 주지 않은 이유는 그가 저주의 편지 건에 대해 사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독특한 화술에 말려들어 살의를 잃고 말았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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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 그랬어요. 어머님 음식에 독을 넣는 짓 따위 죽어도 못해요. 아까 당신도 말했잖아요. 내가 그동안 부엌에 들어간 적도 별로 없다고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님 식사를 준비했던 사람뿐이에요."
흥분한 탓인지 얘기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P52

살인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된 건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독약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독약을 사용하는 장면을 꿈꿨다.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 아니야, 이런 방법도 있잖아, 하는 식으로. 다만 그때 내게는 독약을 먹이고 싶은 상대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기분을 알고 싶었다. - P58

엄마가 정말로 할머니에게 독을 먹였는지를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거기에 비소 같은 독극물을 엄마가 무슨 수로 손에 넣었을까 하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소금과 설탕, 조미료 등을 버리는 장면이다. 왜그랬을까. 그것들이 진짜 설탕과 소금 같은 것들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것들과는 다른 ‘하얀 가루‘였을까. - P60

부모님은 내게 하나의 선택을 강요했다. 아버지와 엄마 중 한쪽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이혼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 P61

아버지와 살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엄마는 낙담이라기보다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냈다.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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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란 오목이다. 그것 역시 구라모치의 속살거림에 의해 눈뜨게 된 놀이였다. 물론 그러기 전에도 오목을 두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라모치는 내게 오목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 P25

어른들은 술이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아했던 건 웃고 떠드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도 웃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아버지마저 어딘가 모르게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역시 어른들은 시체라는 게 망가진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고 생각했다. - P35

사람이 죽는다는 건 별게 아니다.
그것이 할머니 죽음에 대한 내 감상이었다. - P35

"그럼 미네코가 큰어머니를 살해한 거나 마찬가지네요."
누군가 내뱉은 이 한마디에 모두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지나치지."
이번에는 누군가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왠지 즐기는 듯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 P37

"실은 그렇습니다. 음식에 매일 조금씩 비소를 넣어 먹이는 바람에 다지마 씨네 할머니가 죽었다, 이게 현재 나돌고 있는 소문의 내용입니다." - P45

"비소인가 뭔가 하는 독이 있나 보려고 뒤진 거잖아요. 형사 얘기를 듣고 내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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