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6월 12일. 설라이나에서 모건까지 가는 데 세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에밋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60마일 정도를 가는 동안 윌리엄스 원장은 친근하게 얘기를 주고받으려 노력했다. - P15

그는 자신의 삶이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고, 동생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또한 자신이 불행의 창조자라기보다는 불행의 중개자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빚을 다 갚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 P18

네 아버지 재산의 집행자로서 우린 네가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해주길 바라고 있어.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몇 주 내에 동생과 함께 이사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거야. - P23

"네 앞에 창창한 인생이 펼쳐져 있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네 앞에 창창한 인생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네 인생을 시작하는 걸 고려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에밋이 말했다. "지금부터 48시간 후면 빌리와 저는 네브래스카주에 있지 않을 테니까요." - P32

어머니가 그들 둘을 침대에 눕히고 잘 자라는 키스를 해준 다음 문을 나선 지 거의 8년이 지났다. 이후 그들은 어머니로부터 한마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전화도 없었고 편지도 없었다. - P39

자기 아이들을 계획적으로 버리고 떠난 여인이 이따금씩 보내오는 3×5인치 엽서의 뒷면에 쓰인 글 몇 문장을 받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P40

"형, 우린 캘리포니아로 가야 해. 그걸 모르겠어? 엄마가 우리에게 이 그림엽서를 보낸 이유가 그거잖아. 우리가 엄마를 따라올 수 있게 하려고 말이야."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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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침실 문이 열리고 드레스 차림의 소피야가 앞으로 걸어 나왔을 때, 백작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소피야가 성년의 문턱을 넘어서는 시점이었다. 경계의 한쪽에는 백작에게서 우정과 조언을 기대하는, 몸가짐이 바르고 차분하면서도 동시에 상상력이 기발한 다섯 살, 열 살, 또는 스무 살의 소녀가 있었다. 경계의 다른 한쪽에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기댈 필요가 없는 분별력과 우아함을 갖춘 젊은 여성이있었다. - P630

이 부분을 읽은 여러분은 혹시 로스토프 백작이 - 스스로를 예의범절의 표본이라고 주장하는 - 그가 탁자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엿듣지는 않았는지, 다소 냉소적으로 묻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의 질문과 냉소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최고의 하인들이 그렇듯, 유능한 웨이터의 기본 업무가 바로 엿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 P644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 P654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 P657

애초에 백작은 노르웨이나 덴마크, 스웨덴, 또는 핀란드에서 온 투숙객에게 몇 가지 물건을 슬쩍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 P666

그렇지만 한 가지 사소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백작이 확보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품목은 바로 남자의 여권이었다. - P667

비숍이 들고 있는 것은 최근에 쓴 편지가 아니었다. 아니, 편지 자체가아니었다. 그것은 맨 처음 잘라냈던 베데커의 지도였다. 팔레 가르니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생크 거리를 거쳐 미국 대사관에 이르는 길을 백작이 선홍색으로 그려 넣은 그 지도였다. - P670

비숍이 침실을 빠져나갔을 때 백작은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정-분노, 회의, 자책,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리석게 지도를 책상 서랍에 넣어둘 게 아니라 불에 태워버렸어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6개월 동안이나 공들여 계획하고 필사적으로 실행한 일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소피야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었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그 애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할까? - P672

"제가 오는 걸………… 모르고 계셨어요?" 소피야가 망설이면서 물었다.
"물론 알고야 있었지! 네 아버지는 이런 첩보 영화 같은 방식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백작은 나한테 분명 네가 올 거라고만 얘기했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 거라는 건 알려주지 않았어. 더구나 맨발의 소년 차림으로 올 거라는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단다." - P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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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이죠. 이 상자에는 파란 단추들만 담고, 저 상자에는 은 단추들만 담고, 또 다른 상자에는 빨간 단추들만 담는 거죠. 아빠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여기서도 맺고 저기서도 맺는데, 그 관계들이 서로 구분되도록 하고 싶어 한대요." - P540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 P555

"그렇습니다, 소피야. 저는 ‘붉은 10월 청년 오케스트라단‘의 단장입니다. 선생의 따님이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지요. 사실 오늘 밤 따님이 연주하는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된 거고요. 저는 따님에게 우리 오케스트라단의 제2 피아니스트 자리를 기쁜 마음으로 제안하고자 찾아왔습니다." - P574

백작이 조용히 문을 닫고 안나 쪽으로 돌아섰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문화부 장관이 언제부터 소피야에게 개인적 관심을 갖기 시작한거요?" 그가 물었다.
"늦어도" 그녀가 대답했다. "내일 오후부터요." - P577

"미시카 일로 오셨군요…………." 잠시 후 백작이 말했다.
"네."
"언제였나요?"
"딱 일주일 전이에요." - P580

"저는 평생 시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카테리나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시를 쓴 사람은 미시카입니다. 티히차스의 남쪽 거실에서였지요……………. 1913년 여름에・・・………." - P581

자기 자리에 앉은 백작은 지금부터 6개월 뒤인 6월 21일에 소피야가 프랑스의 파리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백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복스VOKS 덕분이죠." 복스는 ‘대외문화교류협회‘의 약칭이었다. - P596

"방금 전 바빌로프 단장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소피야가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연주 투어 초대를 거절했다고 알려주더군요."
"초대를 거절했다고? 여보게, 난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네. 실은 난 그 애의 밝은 미래는 이번 연주 투어에 달렸다는 자네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피야가 자기 맘대로 행동한 게로군." - P603

"아빠가 지금 제 맘을 편하게 만들어주려고 노력하시는 중이라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네요. 솔직히 아빠, 두려운 마음과 제 결정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 P607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 P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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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야가 다섯 살 때 백작은 순진하게도 소피야가 머리카락만 검은색으로 바뀐 니나로 성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명한 인식과 확실한 자기 주장을 가졌다는 면에서 소피야는 니나와 공통점이 있었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완전히 달랐다. 니나는 세상의 사소한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자신의 조바심을 솔직히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소피야는 지구가 가끔씩 엇나가면서 자전하기는 해도 대체로 큰 문제 없이 돌아가는 행성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P508

백작이 안내 데스크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가 무도회장까지 달려가는 데는 3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그가 악당의 옷깃을 틀어쥔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 P511

"아빠! 뭐 하시는 거예요?"
"네 방으로 가거라, 소피야. 이 인간이랑 나는 얘기할 게 좀 있다. 내가 이 인간한테 평생 잊지 못할 주먹맛을 보여주기 전에 말이다."
"평생 잊지 못할 주먹맛이라고요? 빅토르 스테파노비치는 제 선생님이세요."
백작은 한쪽 눈으로 악당을 주시하면서 다른 쪽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네 뭐라고?"
"제 선생님요. 저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주신다고요."
이른바 선생은 고개를 네 번 연속해서 끄덕였다. - P512

그는 소피야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다음으로는, 소피야가 으뜸과 버금딸림 멜로디를 능란하게 연주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소피야의 음악적 표현에 묻어난 감성이었다. - P514

"젊었을 때 나도 내 누이에 대해 똑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단다. 해가 지날수록 누이에 대한 기억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 그리고 언젠가는 누이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게 되었어. 하지만 사실은 말이야,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 P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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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은, 우리 러시아인은 우리가 창조하고 만들어낸 것들을 파괴하는 성향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 P466

3층 층계참을 돌아섰을 때, 거기에 소피야가 있었다. 계단 위에 벌렁 쓰러져 누운 모습의 아이의 눈은 감겨 있고, 머리카락에는 피가 얼룩져 있었다. - P480

갑자기 그는 자신이 따뜻한 여름 대기 속에서 메트로폴 호텔의 문밖 계단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481

백작은 잠금장치를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휴대용 축음기였다. 안에는 갈색 종이로 만든 재킷에 든 레코드판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리처드가 제안한 대로 백작은 맨 위에 놓인 음반을 집어 들었다. 음반 중앙의 라벨을 보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실황 녹음 음반이었다. -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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