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은, 우리 러시아인은 우리가 창조하고 만들어낸 것들을 파괴하는 성향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 P466

3층 층계참을 돌아섰을 때, 거기에 소피야가 있었다. 계단 위에 벌렁 쓰러져 누운 모습의 아이의 눈은 감겨 있고, 머리카락에는 피가 얼룩져 있었다. - P480

갑자기 그는 자신이 따뜻한 여름 대기 속에서 메트로폴 호텔의 문밖 계단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481

백작은 잠금장치를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휴대용 축음기였다. 안에는 갈색 종이로 만든 재킷에 든 레코드판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리처드가 제안한 대로 백작은 맨 위에 놓인 음반을 집어 들었다. 음반 중앙의 라벨을 보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실황 녹음 음반이었다. -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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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침묵도 하나의 의견일 수 있지." 미시카는 혼잣말을 했다.
"침묵도 저항의 한 형태일 수 있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 있어. 또한 시의 한 유파일 수도 있어. 나름의 운율과 비유와 관습을 보유한 시의 유파일 수 있다고. 연필이나 펜으로 쓸 필요 없이, 가슴에 들이댄 총부리를 앞에 두고 영혼에 쓰는 시 말이야." - P426

미시카의 표현을 빌려 말하건대, 그 후유증은 무엇이었을까?
미시카의 발언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당국에 보고되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그의 발언 전체가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8월에 그는 신문을 위해 레닌그라드에 있는 엔카베데의 사무실로 소환되었다. 11월, 그는 사법 절차를 뛰어넘는 권력을 가진 당대의 트로이카 중 한 사람 앞으로 불려 나왔다. 그리고 1939년 3월, 미시카는 시베리아행 열차에 실려 반성의 영역으로 떠나갔다. - P428

우리는 결코 확실히 알 수 없겠지만, 짐작건대 니나에 대한 백작의 걱정도 틀리지 않은 듯했다. 니나는 그 달에도, 그해에도, 아니 영영 메트로폴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P428

소피야가 호텔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들키게 될 거라는 백작의 걱정 역시 틀리지 않았다. 아이의 존재가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소피야가 도착한 지 2주도 안 되어 크렘린의 행정 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발송되었기 때문이다. - P429

소피야를 아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 애에 관해 얘기해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소피야가 공부를 열심히 하며 수줍음이 많고 행동이 얌전한 아이, 한마디로 ‘착실한 아이‘라고 말할 것이다. - P446

"안녕, 아빠." 소피야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 P448

미시카의 모습에는 단순히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만 남은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한 시대가 그 시대의 산물에게 새겨놓은 자국들이 선명했다. - P454

"내가 권총 얘기를 꺼내서 널 불안하게 했구나, 사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사실, 그게 바로 내가 이 도시로 들어온 이유야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은 연구 과제를 위해 도서관엘 좀 가려고…………." - P459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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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불패 15 - 완결, 애장판
문정후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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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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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화이트백작은 잠시 침묵에 빠졌고, 이어 어깨를 으쓱했다.
"1914년 파리로 떠났을 때, 저는 다시는 동포를 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당신은 볼셰비키도 동포로 칩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 P335

"간단하오. 한 달에 한 번씩 이 방에서 나와 저녁을 먹읍시다. 나랑 프랑스어와 영어로 얘기를 합시다. 서구사회에 대한 당신의 인상들을 나에게 들려주시오. 그러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글레브니코프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길게 뺐다. 자신이 백작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게 아니라 반대로 아주 많다는 것을 시사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백작은 손을 들어 보답 얘기는 그만두라는 동작을 취했다.
"오시프 이바노비치, 저는 보야르스키 식당의 고객에게라면 뭐든 기꺼이 해드릴 수 있습니다." - P339

"역사학도로서, 그리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 P338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 시작된 이래로 죽음은 늘 부지불식간에 찾아왔지, 그는 설명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죽음은 소리 없이 마을에 도착한 다음 여관에 방을 하나 잡고, 골목길에 잠복해 있거나 혹은 슬그머니 시장을 어슬렁거리지. 그러다가 주인공이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한숨 돌리려는 그 순간에 죽음은 그를 찾아가. - P357

"지금 저 애를 데려갈 수는 없어요. 일자리와 살 곳을 먼저 알아봐야 하니까요. 한두 달 걸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거기 정착하는 대로 애를 데리러 올게요." - P369

복도를 지나 종탑으로 소피야를 안내한 백작은 다시 한번 소피야에게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소피야는 급격한 각도로 휘어진 좁은 계단을 올려다보더니 백작에게로 몸을 돌려 두 손을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안아주세요‘를 뜻하는 만국 공통의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 P374

이 아이의 무엇이 다 큰 성인 남자로 하여금 일 분 일 분을 조심스럽게 세면서 점심시간이 어서 오기를 바라게 만들었을까?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아서? 낄낄거리며 방 안을 어지러이 돌아다녀서?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울음을 터뜨리거나 짜증을 부려서?
그와 정반대였다. 아이는 조용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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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은 자신의 연금형이 시작된 첫날 밤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그는 자신의 대부가 오래전에 해준 말씀대로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었다. - P251

독일인은 농담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은 눈길로 자기보다 더 젊은 영국인을 바라보았다. "이 술집에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러시아가 서구에 기여한 것을 세 개 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보드카를 한 잔 사겠소." - P253

"실례하겠습니다, 신사분들. 난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부득이 엿듣게 되었습니다. 독일 양반, 물론 나는 러시아가 서구에 기여한 것에 관한 당신의 발언은 일종의 과장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적효과를 위해 사실을 과장되게 깎아내린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난 당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기꺼이 당신의 도전에 응하고자 합니다." - P253

어떻게 내가 옐레나에게, 네가 사랑에 빠진이 남자는 너의 훌륭한 품성에 반해서가 아니라 내게 앙갚음할 속셈으로 네 애정을 갈구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겠소? - P260

만화경을 들여다보면서 손목을 약간만 돌리면 색유리 조각들이 움직여서 새로운 형상―특유의 대칭 형태, 특유의 복잡 미묘한 색상, 특유의 무늬를 지닌 형상을 만들어낸다.
1920년대 후반의 모스크바 역시 그랬다.
메트로폴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 P279

그토록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으므로 어린 니나를 곰처럼 껴안는 것이 백작의 본능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겠지만, 니나는 그의 충동을 억누르게 만드는 태도로 그를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나서 반갑구나, 니나."
"저도요, 알렉산드르 일리치." - P297

"그냥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 니나가 너무 열정적으로, 너무 자신있게, 너무 외곬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니 그 애에게서 유머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 애는 마치 불굴의 모험가처럼 북극 만년설 위에 깃발을 꽂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애의 행복이 그곳과는 전혀 다른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 P303

뒤틀린 것은 백작의 인생행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자신의 침실에서 보야르스키로, 또 그 반대 방향으로 호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 꼬이고 돌아가고 틀어지고 다시 되돌아간 운명은 백작의 인생행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안나의 인생행로였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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