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게도 너는 요 며칠간,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말하자면 세상이 온통 뒤집혀 버렸기 때문에 생긴 듯한 일련이 사건을 경험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의 네 꿈자리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듯한 우스꽝스러운 영상이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진 것이다. - P802

너는 꿈속에서 너 자신에게, 어느것이 진짜 세계이고, 어느것이 가짜 세계이냐, 바로 선다는 것은 무엇이고 거꾸로 선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을 것이야. 문제는 네가 꿈속에서는, 바로 서는 것과 거꾸로 서는 것, 삶과 죽음을 구별해 낼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네 꿈은, 네가 배운 바를 확신으로 소화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야. - P803

윌리엄 형제, 나는 고백컨대 형제에게훨씬 많은 것, 큰 것을 기대해 왔어요. 수도사께서 여기에 오신 지 벌써 엿새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요? 아델모를 제하고도 수도사 형제가 넷이나 죽었고 둘이 이단 피의자로 심문관들 손에 끌려갔습니다. - P817

한동안 가만히 있던 사부님이 대꾸했다.
「원장의 기대에 내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지요. 이 일련의 사건이 수도사들 간의 감정적 앙금이나 은원 관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 말하자면 이 수도원의 역사에다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P817

여기에는 어떤 사물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과 아무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근에 알아낸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는 그 문제의 물건이 서책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원장께서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P820

너는 참으로 운이 좋아 많은 교단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교단에 들어온 수련사이고, 나는 네가 속한 것과 같은 교단에 속하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다. 따라서 너는 내 손 안에 있다. 그러니 내 명에 따라야 한다. 자, 영원히 네 입을 다물겠다고 서원하거라. - P823

그대는 이제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을 이 교단의 수도원장인 내 앞에서 하고 있군요. 연쇄 살인의 동기가 되었다는 금서는 무엇이고, 나와 비밀을 나누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또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이지요? - P823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건의 안팎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원장이라는 자는 오로지 수도원의 명예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범인인지도 모르고, 그 자신이 다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도 불구하고, 원장은 오로지 이 수도원의 추문이 산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수하의 형제는 죽어도 좋으니 수도원 명예만은 지켜야겠다는 발상이 어디 가당키나 한 노릇이냐? - P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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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을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 P730

나는 철학자로서, 이 세상이 혹 하나의 질서에 꿰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질서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면,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이 일과 저 일 사이에 적어도 무슨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P731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데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그 서책을 묻어 버리고 있구나. - P736

유대의 하느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두 마디를 밝히기 위해 선지자들, 복음 전도자들, 교부들 고승 대덕들이 남긴 말에 지나지 못합니다. - P741

베르나르는 어떻게 하든 미켈레를 아비뇽으로 데려가려 할 게다. 미켈레의 아비뇽 도착 일자를, 소형제회 수도사를 지낸 이단자이며 살인자인 레미지오의 심판 일자와 맞추어 놓겠지.…………. 그래야 레미지오를 태우는 화형대의 불길이 화해의 횃불이 되어 미켈레와 교황이 만나는 자리를 비출 테니………. - P751

나는 하도 부끄러워 눈물을 떨구며 내 방으로 돌아와 밤새 울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았더라면, 동료들과 멜크 수도원에서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사 무훈담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 애통해 할 수 있었을 것을… - P753

노래에 빠져 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든 내 눈에, 언제 없었더냐는 듯이 다시 자리를 채우고 있는 말라키아의 모습이 보인 것이었다. 나는 사부님을 보았다. 사부님 얼굴에도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수도원장의 얼굴에서도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호르헤는 다시 손을 내밀어 의자를 더듬다가 말라키아의 몸을 감촉하고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 P761

상자 속에 든 걸 보고 너무 기죽지 말아라. 나는 다른 교회나 수도원에서도 거룩한 십자가 조각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진짜라면 우리 주님은 통나무 두 개를 걸쳐 만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아주 널찍한 숲속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 - P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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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찾지 못했으니까 없다고 하는지도모른다. 우리가 찾지 못했던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 P680

이윽고 베르나르기가 그 길고 지루한 침묵을 깨뜨리고 공식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건성으로 한 다음 이런 말로 심문을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에 배석한 심판관들로서는 공히 용서하기 어려운 두 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된 자를 심문합니다. 두 가지 혐의 중 한 가지는, 피의자가 살인 사건의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만치 형제들이 익히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이미 그전에 이단적인 범죄 혐의로 수도원 경내에서 수배되고 있었습니다.’
레미지오는 쇠사슬에 묶인 손을 거북살스럽게 올려 얼굴을 감쌌다. - P687

각하께서는 지금 제가하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시키려고 하십니다. 저는, 각하께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가르쳐 주시면 그것을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 - P693

일이 시점에서 네 입으로부터 어떤 고백이 나와야 하는지는 나만이 안다. 그러니까 이실직고하라, 오로지 이실직고하라. 이실직고해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우리의 양심과 너그러움과 연민의 감정을 훼손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대화를 한시 바삐 끝내기 위해서라도 오직 이실직고하라! - P709

베르나르의 간계는 이로써 분명해졌다. 그가 노리는 것은 누가 누구를 죽였느냐는 것이 아니라, 레미지오가 황제측을 대표하는 소형제회 교리에 어떻게 물들어 있느냐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 P710

‘정결함을 얻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성급함이다.‘ - P715

「보았지? 고문을 당하거나 고문의 위협을 당하면 사람이란 제가 하지 않은 짓은 물론이고 알지 못하는 짓 하려던 짓까지 했다고 하는 법이다. 레미지오는 지금 어떻게 하든지 죽기만을 소원한다.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다.」 - 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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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약소 안에 있는 세베리노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로 놀라운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엾은 본초학자 세베리노는 머리를 얻어맞고 시체가 되어, 흥건한 피 위에 쓰러져 있었다. - P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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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수도원장이 추기경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교회가 큰 빚을 지고 있는 교단 수도원의 원장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기독교 교회가 베네딕트 교단에 빚을 지고 있다는 발언에 다른 교단 수도사들이 토를 달고 나선 것이다. - P631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했다. 사부님의 엄청난 박학의 시위에 모두가 넋을 잃은 것 같았다. - P655

교회는, 이단자를 색출했다고 여겨질 경우 이를 제왕에게 통고해야 합니다. 제왕에게는 제국의 신민에 관한 것이니 만치 이를 통고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왕은 이 이단자를 어떻게 처결해야 합니까? 제왕이 하느님 진리의 수호자가 아니면서도 하느님 이름으로 이를 처결해야 합니까? 당치 않습니다. 제왕은, 이단자의 행위가 국가의 안위를 위협했을 경우에만 이단자를 처결할 수 있고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 P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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