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감옥에서 나왔죠?"
여자애는 숟가락으로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쿡쿡 찔렀다. 의자 다리 사이에서 조그만 맨발 두 개가 앞뒤로 엇갈리며 흔들렸다. 푸석한 단발머리에 가무잡잡한 얼굴 열 살이나 되었을까? 대리석 식탁 위로 늘어진 갓등 불빛에 댕그란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 P9

"아… 전 그냥 좋아서 물어본 거예요."
"좋다니, 뭐가?"
"아까 아저씨가 나를 선택해서 좋았다고요. 전 원래 친구도 없고,
.
.
"근데 아저씨 실수한 거예요. 인질은 중요한 사람을 잡아야 인질이지." - P11

틱.
배트가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멈추며 공은 투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공을 잡아 2루로 던지는 투수도 다시 1루로 던지는 유격수도, 애들답지 않게 침착했다. 병살타. 유현이가 경기를 끝냈다. - P35

그가 곁에 두는 사람을 선별하는 기준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 같은 우연적인 요소가 아니라 팔이 안으로 굽는 각도였다. 위급할 때 그의 죄과를 어느 선까지 덮어줄수 있는가 하는 장 선배는 요섭에게 ‘피 묻은 칼을 맡길 수 있음’ 등급을 매겼다. - P47

"예에, 아까 밑에서 그 곡이 흘러나오는 걸 듣다가 저도 모르게 올라왔어요."
"어디서요? 여기서요?"
"저 방에 있던 남자애가 치던데요."
요섭이 손가락으로 슈베르트 룸을 가리키자 여선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저긴 계속 비어 있었는데."
"예? 들어올 때 분명히 봤는데. 호리호리한 남자애가…"
"잘못 보셨을 거예요. 지금 시간엔 레슨 받는 남자애가 없거든요." - P58

요섭은 자신과 가족의 순수한 욕구가 천박한 숫자에 의해 저지되는 굴욕적인 상황을 원치 않았다. 돈이 사람을 돈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법. 느닷없이 현대 문명에 염증을 느껴 호숫가에 통나무집를 지으려 해도, 일단 호숫가 토지는 매입해야 할 게 아닌가. - P62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꾸준히 부정하는 유별난 종족이었다. 이 분열증적 치매의 원인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기 때문이었다. 우린 이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어! 요섭이 보기에, 인간은 언제나 딱 제 수준에 맞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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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모든 것은 한 마리의 송충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설을 이렇게 시작할 생각이었어요. 송충이.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사랑스런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굽실굽실 역동적인 느낌을 주지 않나요? - P287

시간이 흐르면서 슬며시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밝혀낸 그 책의 비밀이 사실일까? 아니, 그날 도서관에서 내가 실제로그 책을 보기는 했던 걸까? - P290

비자발적인 구도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폐쇄된 몸뚱이에 갇힌 영혼은 홀로 순례의 길을 떠나더군요. 잊고 있던 나의 원시림을 찾아서, 삼십여 년 영욕의 세월을 성큼성큼 거슬러 올라 금세 유아기에 도착했습니다. - P315

그 달빛 속에서 저는 하나의 계시를 받았어요. 그래, 앞부분만 읽었던「폭우」를 내가 상상극장에서 이어 써보자. 혼자 동굴을 헤매느니 이야기의 미로를 산책하며 남은 구도의 시간을 때우기로 한 거죠. 나중에 책의 실제 내용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더라고요. - P317

뒤에서 남자가 머뭇거리며 불렀다. 미미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건… 유미미 씨 집 전화번호가 아닌데." - P323

"미친놈,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난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거야! 난 너 같은 미치광이하곤 달라!"
어둠 속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남자의 누런 송곳니가 보이는 것 같았다.
"미친다는 것도 하나의 의지인 거라, 유미미 씨." - P329

"모르겠어요. 저도 제정신이 아닌데, 그딴 헛소리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그 한마디만은 기억나네요. 저에게 어울리는 죽음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죠?"
"뜻은 무슨 사이코라니까요. 그냥 마지막 공연이 끝났다는 거겠죠, 저를 연극 속 살로메와 혼동하고 있었어요." - P333

난 객석에 앉아 전부 지켜봤어. 조용히 숨을 죽이고, 당신 몸에새겨진 문신처럼, 흉터처럼. - P336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말이죠 내용이 끊임없이 변하는 책이에요. 누군가가 책 속에 자신을 유폐시켜놓고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는 거죠. 마치 유령이 연주하는 변주곡처럼. - P361

여기까지 읽었다면, 그래요, 당신도 이미 그 문장을 알고 있을 겁니다.

자, 이야기를 계속해봐. 잠이 들지 않도록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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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각 상자를 듣고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 P179

일본어를 한국어로 한 문장씩 기계적으로 옮기던 M은 무심코 장난기가 발동됐다. 여주인공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밀크티로 바꿔서 번역한 것이다. 왠지 그녀는 밀크티를 더 좋아할 것 같았다. - P187

최근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라는 소설을 번역하던 중 M은 하루를 만났다. 단칸방에 틀어박혀 고슴도치를 벗 삼아 사는 히키코모리. 주조연급은 아니고, 일종의 맥거핀 효과로 짤막하게 세 번 등장하는 엑스트라였다. - P188

목차에는 네 개의 소제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첫번째 소설이 표제작인 <여섯번째꿈>이었다. 표지에는 눈에 절반쯤 파묻힌 산장이 수묵화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 P212

3년 동안이나 멀쩡히 지내던 사람이, 하필이면 내가 방문한 다음 날, 장난삼아 선물한 모텔 열쇠를 손에 쥐고 투신했지만… 우연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세상에는 별일이 다 있지않은가. - P218

"잠이 안 오면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이야기? 무슨 이야기"
"폐쇄된 미로에 빠진 남자 이야기." - P200

식사를 마치자마자 M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파일을 열고 사전을 꺼냈다. 자신의 행동이 의지와 무관하게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실행되는 것 같았다. 무언가 몸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 P245

"가능하면… 이번 생에 결말을 듣고 싶은데."
"그건 당신한테 달렸어. 이 이야기는 당신 <여섯번째 꿈> 번역과 함께 끝나."
"번역과… 그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
"모든 건 연결되어 있어." - P256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 - P258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어둠 속에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보았네
내가 키우는 새끼 고양이는 세 마리뿐인데
하얀 고양이, 까만 고양이, 얼룩 고양이
나는 차마 불을 켜지 못했네 - P261

자신은 이곳 현실에서 퍼즐 조각들을 그러모아, 그것들을 서로 아귀가 맞게 조금씩 비틀어서, 전혀 다른 그림의 새로운 퍼즐을 하나 만들었던 거야. - P267

"자네가 겪은 일이 이곳의 조각들을 가져다 만든 퍼즐이라고 생각하지? 그럼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 여기 이 병원도 어딘가의 다른 현실에서 조각들을 가져다 만든 퍼즐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렇다면 진짜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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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CD 재킷에는 동명의 뭉크 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부둥켜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벌거숭이 소녀와 해골 사나이. 소녀의 살결은 환한 핑크빛이다. - P79

사실 간질 발작으로 죽는 경우는 흔치 않아. 하지만 어머니는 그 흔치 않은 경우 중 하나를 직접 겪으신 탓에 극도로 예민하셨지. 나를 볼 때마다 방에서 혼자 꺽꺽거리다 죽어간 남편이, 그동안 짊어져야 했던 죄책감이 떠올랐을 거야. - P85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나? 두려움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난 의대로 진학했지.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치고 어쩌고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무관하게, 단지 사람들이 얼마나 유약하고 죽음에 가까운 존재인지 곁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 P88

꽤 비중 있는 역을 따냈나 봐. 산장에 모인 사람들이 한 명씩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스토리인데, 거기서 두번째로 죽는 여자를 맡았다. - P91

인생이란 게 서너 번쯤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면 좋을 텐데, 딱 한 번뿐이라는건… 부조리해.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또 당신에게도 안 그래? - P91

나는 그 애의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어. 나에게는 고통의 척도라는 게 없었거든. 죽음을 유일신으로 모신 이후 고통의 무게마저 마냥 축소해왔으니까. 막연히 동생은 이겨낼 거라고만 생각했어. - P93

시간과 노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된 소비재 아닙니까. 제 갈망을 위해 얼마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비례, 뿌린 만큼 거두는 것. 얼마나 깔끔합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잖아요. - P99

나비문신과 마주친 이후 제 마음속에 다시 지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스무 살의 전도유망한 법대생이 놓친 가능성들이, 이제는 깨끗이 떨쳤다고 생각한 미련과 회한이, 한을 품은 원귀들처럼 뛰쳐나와 아우성을 치더군요. - P112

이런 말이 있죠. 복수란 개한테 물렸다고 개를 무는 것과 같다. 제겐 이 말이 반어적인 교훈이 아니라 직설적인 행동 지침으로 들리더군요. 그래요, 저는 놈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광견병이 옮았으니, 저도 미친개가 되어 물어뜯는 수밖에요. - P115

의뢰를 받으면 먼저 그럴듯한 사연을 하나 만들지. 물론 사연에 맞게 내 인생도 전부 새로 짜야하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표적을 미행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내내 그 가짜 인생에 온전히 감정이입을 하는 거야. 나의 철천지원수를 쫓고 있다고 말하자면 일을 하나 맡을 때마다 새로운 내가 하나씩 태어나는 셈이지. - P127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름거린답니다. 거실에 퍼질러 앉아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왜 손을 놓으면 아이도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아갈 거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지요. 당시 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 P144

드디어 뿌리 깊은 내 불운의 비밀이 밝혀진 셈이야. 나의 사주도, 나의 이름도, 나의 별자리도 모두 죽은 형의 껍데기였어. 이유식 맛도 못 보고 골로 간 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인생 잘 풀릴 턱이 있겠어?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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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야기를 계속해봐. 잠이 들지 않도록. 이젠 지쳤어. 모르겠어.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면서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 글쎄, 최소한 지루하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잖아.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니야. 매번 변하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면서. - P11

지난 토요일 저녁, 우리 여섯 명은 산장에 모였어. 하지만 정작 우리를 초대한 악마는 오지 않았지. 모두 초면인지라 선웃음을 지어가며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어. - P12

연쇄살인범은 다만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옮긴 자들입니다. 무기력한 몽상가가 아닌 과감한 행동가들이라고 할 수 있죠. - P17

모두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고 싶어 하잖아. 그래야 자기 마음을 물끄러미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없으니까. - P20

악마는 투명했어. 그가 올린 수많은 글을 살펴봐도 그에 대해 유추할 만한 단서는 전혀 없었지. 연령대, 성별, 직업은 물론이거니와 성향이나 생각조차도 알기 힘들었어. 역사와 심리에 해박하며 지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밖에는. - P23

"그러고 보니, 방이 꼭 여섯 개네요."
연우가 무심코 던진 말이 그들의 가슴 밑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모임의 주최자인 악마까지 왔다면 인원은 총 일곱 명인데.... 혹시 이미 와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똑같은 의혹을 품었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30

이번 주말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회원 몇 분만 제 별장에 초청하여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마련할까 합니다. 홈페이지에 차마 올리지 못한 희귀 자료도 공개하고, 재미있는 게임도 준비되어 있으니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 P35

지금까지의 행태로 봤을 때 악마라는 놈은 철저한 조직적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직적 연쇄살인범은 일정한 기준과 목적을 먼저 세우고 거기에 맞춰 희생자를 선택하는 게 특징이죠. - P41

악마가 제안한 대로 우리는 친목을 다지고 있었어.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반나절 만에 몇 년을 가까이 지낸 지인들보다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었지. 마치 예정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시간을 압축해서 친해지려는 사형수들처럼. - P44

오후 내내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답하던 연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몰렸다.
"우리 모두 연쇄살인범에 미쳤잖아요. 그래서 여기 모이게 된 거 아닌가요?" - P47

민규는 맞은편 벽에 기대앉은 연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간신히 목을 가누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지저분한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것처럼 흐리마리했다. 몸이 구름에 감싸여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째 굶은 것인지,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저 여자가 잠들면, 내가 죽는다. - P67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일곱 명은 산장에 모였어. 하지만 정작 우리를 초대한 악마는 오지 않았지.…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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