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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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빠가 죽었다

정확하게는 살해당했다. 에도바시 다리 앞에 있는 지하도에서 칼에 찔렸는데 거리도 먼 니혼바시 다리까지 가서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중간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도움도 청하지 않고 마치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니혼바시 다리에 있는 기린상까지 걸어갔다. 범인은 금세 특정됐다. 6개월 전 아버지 회사인 가네세키 금속의 구니다치 공장에서 일하다 계약이 만료되어 퇴사한 야시마 후유키. 하지만 야시마는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해 도망치다 트럭에 치여 깨어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의 지갑과 서류가방을 가지고 있었으니 범인이 분명할 것이라고 형사들이 말한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에 당황했고, 여동생은 울기만 한다. 나라도 정신차려야 하는데.. 형사들이 수사하던 중에 야시마가 작업중 사고를 당했다는게 드러나고 회사사람은 아빠가 지시해서 산재신고를 하지 않고 해고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아빠는 야시마가 복수심 때문에 살해했고,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빠에 대해 하는게 하나도 없다. 아빠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1958 ~ . 일본 소설가.


가가 교이치로 형사에 대한 기대감

가가 형사 시리즈 장품 중 세 번째로 읽는 책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책은 워낙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머리 아프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책을 읽은 후에 머리 식힐 겸 읽는 편이다. 특히 이전에 읽었던 《악의》는 게이고가 쓴 소설 중에서도 걸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활약하는 《기린의 날개》도 기대가 컸다.


400 페이지짜리 책이다. 판형이 작고 줄간격도 넓어서 다른 책 400 페이지보다야 양이 적겠지만 그래도 꽤 두껍다. 하지만 굉장히 빨리 읽을 수 있는 것이 게이고 소설의 최대 장점. 보통 이 정도면 3~4일은 걸리는데 하루에 다 읽을 수 있었다. 게이고가 쓴 소설은 이런 면에서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사건은 단순하게 끝나는 듯 하다. 범인도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다케아키(피살자)가 죽기 전에 종이학을 접어서 칠복신 순례를 한다든지, 구태여 니혼바시 다리까지 가서 죽는다든지 하는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가가 형사는 다케아키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 된다. 특히, 유력한 용의자였던 야시마 후유키가 죽은 후, 공소권 없음으로 끝날 것 같은 사건을 가가 형사는 끝까지 파고 든다. 그 후에 밝혀지는 진실은..


니혼바시 다리에 있는 기린의 모습


흥미진진한 전개, 엉뚱한 결말

게이고는 엄청난 다작 작가이다. 그가 쓴 책을 꽤 읽었는데 소설의 질이 고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몰입감이 뛰어나고 쉽게 읽히기는 하는데 걸작이 있는가 하면 졸작도 있다. 《기린의 날개》는 어떠냐고 물어 본다면 전반 3/4는 꽤 괜찮지만 후반 1/4는 만족스럽지 않다. 초중반 부분은 정말 재미있다. 특히 다케아키가 야시마의 산재처리를 해 주지 않아서 비난을 받으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이지메를 당하는 장면이라든지 매스미디어가 사건을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위해서 야시마의 애인인 나카하라 가오리를 설득하는 장면에서는 사회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는 3년 전 수영장 사건은 너무 나중에 나왔다. 힌트도 전혀 없었다. 독자는 다른 곳에 머리쓰게 만들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 마무리지어 버린다. 이걸 충격적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내 생각에는 아니다. 그냥 구성을 잘못해서 독자를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역 광장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찾으라고 하더니 사실은 광화문 광장에 파묻어 놓은 꼴이다. 반전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서로 다른 플롯 두 개를 억지로 붙여 놓은 것 같다. 게다가 이지메 문제라든지 매스미디어의 폭력같은 것은 건드리기만 하고 지나간다. 의식있는 사회파 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을 잃지 않기 위해서 끼워넣어 놓은 것 같다.


인물의 행동에서 제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다케아키가 '죽은' 점이다. 아들의 잘못된 행동을 참회하며 블로그 댓글을 이어 쓰고 칠복신 순례를 한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아들에게 메세지를 남기기 위해서 구태여 니혼바시까지 가야 했을까? 아직 죽지 않은 상황이었고 걸어서 꽤 먼 곳까지 갈 힘이 있었으면 충분히 살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텐데.. 중간에 파출소도 있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을텐데.. 결국 마지막에 억지로 감동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다.


소설 속 기린은 동물 기린이 아니라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수컷을 '기'라고 하고 암컷을 '린'이라고 한다. 성군이 태어나거나 죽을 때 출현한다고 하며 중국의 전설 속 황제인 '황제'의 정원에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 판타지 소설 <십이국기>에 등장하는 '게이키', '다이키', '렌린'의 마지막에 붙은 '키'와 '린'도 기린에서 따온 것이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같지 않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나 역시 야시마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해, 고바야시 주임이 말한 동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걸 증명했다고 해서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아오야기 씨가 왜 이 거리를 드나들었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면 그 가족으로서는 사건이 종결됐다고 볼수 없어. 

p.159


《기린의 날개》가 가가 형사의 캐틱터를 잘 살렸는지도 의심스럽다. 위의 인용문을 보듯이 가가 형사는 단순히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범행의 실질적인 원인, 범인의 심리를 파헤치는 것이 특징인데 《기린의 날개》에서 활약하는 가가 형사는 좀 다르다. 내가 《기린의 날개》를 읽으면서 범인은 야시마가 맞지만 살인을 한 이유는 다른 전개를 기대했다. 가가 형사도 그런 뜻으로 '하지만 그걸 증명했다고 해서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가가 형사는 그저 추리력이 뛰어난 민완형사에 머무르고 말았다. 어쩌면 이전에 내가 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두 권 《악의》와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에서 가가 교이치로 형사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게이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영화화되었다.


★★★☆

게이고 소설 특유의 몰입감은 《기린의 날개》에서도 변함없다. 장르적 재미 역시 충분하다. 하지만 범인이 힌트도 없다가 전혀 뜬금없이 등장하고 마지막 억지 감동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무리하는 바람에 개연성이 흐트러졌다. 가가 교이치로가 활약하는 《악의》에 비해서 많이 떨어진다.


조금 아쉬운 감이 있는 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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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 게임이론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22
와타나베 타카히로 지음, 기미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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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

게임이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여러 책을 읽어 봤다. 어릴 때부터 뭔가 대단한 진리가 게임이론 속에 들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게임이론에 밝으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게임이론을 좀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 들었던 인터넷의 강의는 듣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 복잡한 수식이나 표가 잔뜩 들어간 책도 읽기 귀찮았다. 물론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지식은 사상누각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내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될 건 아니니까 단편적인 지식을 남들보다 조금 많이 알고 이해하는 정도라면 충분해 보인다. 《도해 게임이론》은 그런 내 필요에 잘 맞는 책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게임이론'..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미리 얘기하자면 겨우 200페이지 남짓, 절반이 그림과 도표인 이 책은 생각만큼 만만한 책이 아니다.


저자 와타나베 다카히로 渡辺隆裕. 수도대학도쿄(도쿄도립대학) 교수. 수도대학도쿄는 일본 최상위권의 공립대학이다.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 게임이론

이 책은 AK Trivia Book 시리즈 중에 한 권으로, 나는 이 시리즈 책이 몇 권 있다. 잡스러워 보이는 서브컬쳐 분야의 책들이 대부분이라서 《도해 게임이론》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지도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고 별로 얻을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의외로 《도해 게임이론》은 굉장히 충실한 게임이론 책이다. 본격적인 강의서적도 아니고 가볍게 읽을 책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데 일부분이긴 하지만 '기본 개론 + 일부 심화 학습' 정도 역할을 충분히 한다.


책은 왼쪽에 게임이론에 대한 지식 + 오른쪽에 지식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해'라는 것이 게임이론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은게, 게임이론을 설명하려고 하면 개인이 선택하는 전략을 표로 작성하여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 써 있는 것을 도표로 읽으면서 찬찬히 보다 보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게임이론은 다양한 학문을 색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데 특히 경제학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내쉬 균형, 순차적 게임, 역진적 귀납법

그동안 각주에 해당하는 게임이론에 관한 책만을 읽어 왔다. 게임이론 전반을 훑어보지 않은 것인데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비어있는 구석이 많다. 그런데 처음 우습게 생각한 《도해 게임이론》을 읽으면서 내가 비워 놓은 곳이 어떤 부분이고 무엇을 더 이해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게임이론을 모두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역시 저자가 관심을 가진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집중해서 비어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해 게임이론》의 저자는 특히 순차적 게임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관심있던 것은 죄수의 딜레마같은 동시게임이었는데 이 책은 게임이론에 대한 나의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었다. 순차적 게임에서 최적의 해를 찾기 위해 수행하는 '역진적 귀납법'은 그동안 어렴풋이 퀴즈문제에서 접해보기는 했지만 이 책에서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순차적 게임에서 내쉬균형을 찾고 그 과정에서 경제학의 이슈를 게임이론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해 게임이론》이 순차적 게임에서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은 내쉬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쉬균형은 게임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게임 당사자들의 이익이 최대화되어서 전략을 바꾸지 않는 고정전략이라고 대충 이해하면 된다. 《도해 게임이론》에서는 기본 정보만 가지고 내쉬 균형을 찾는 방법으로부터 시작해서 확률에 의해서 찾는 법, 정보가 없을 때 내쉬균형을 찾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 인센티브, 신호보내기 게임 등 경제학의 주요 논제들을 게임이론으로 설명하고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가정에 의해 제시된 간단한 숫자와 표를 주고 설명을 하는데 대충 봐서는 안되고 꼼꼼하게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게 기본적인 내용이라서 이해가 되지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만만치 않겠다는 느낌이다. 도표를 보다 보면 수학공부하는 것 같다.


존 내시 John Forbes Nash, Jr. 1928 ~ 2015. 미국의 수학자이자 경제학자. 수학에서는 편미분 방정식과 리만가설의 다양체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고, 경제학 분야에서는 비협력게임과 내시 균형의 개념을 제시했다. 1958년 필즈상 수상후보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적어서 다음에 기회가 있다고 하여 수상에 실패했다. 199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2015년 아벨상을 수상했으나 수상 후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리만 가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조현병을 앓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만든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2)'로 더욱 유명해졌다.


생각보다는 만만치 않다

겨우 200 페이지를 넘는 책이고 그나마 한쪽은 설명, 다른 한쪽은 그림 및 도표이기 때문에 굉장히 짧은 책이다. 하지만 이 100여 페이지의 설명이 처음 게임이론을 보는 사람에게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차근차근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연속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나 베이지언 내쉬균형같은 개념은 밑바탕이 되는 지식이 없으면 몇 페이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해서 여러가지 게임이론의 이슈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좋은 점이다.


번역의 아쉬움

일본학자가 쓴 이론서적을 읽을 때, 번역자가 그 분야에 대해 지식이 부족할 경우 용어 번역이나 이론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일본어 한자를 그대로 한글로 읽기만 한다고 번역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후통첩게임'은 책 속 96페이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 봤다. 그리고 138 페이지에서 할인율 설명할 때 '할인율이 낮으면'은 거꾸로 생각한 듯하다. D=0.8을 할인율이 크고 D=0.5가 할인율이 작다고 설명하는데 0.8, 0.5가 남는 가치이므로 0.8이 할인율이 작은 것이고 0.5가 할인율이 큰 것이다. 따라서 '할인율이 작으면 장기간 교섭을 계속하면 손실이 작다'고 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법이 다른 것인가 싶기도 하고 번역자가 잘못 번역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애매해서 이후 할인율 관련 설명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추측으로는 번역자가 게임이론과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따로 감수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아서 중요한 부분 용어와 이론에 오류가 생긴 점은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게임이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회학이론 두 개 중에 하나이다.


★★★☆

게임이론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특히 도표를 꼼꼼히 살펴 보면서 읽으면 내쉬균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론 전반을 설명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순차적 게임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내쉬균형 찾기'에 특화되어 있는 책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번역이 좋지 않아서 기존 게임이론 지식을 어느 정도 동원해서 용어와 이론을 조금씩 바꿔 가며 읽어야 한다는 점은 썩 좋지 않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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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자(振子)를 본 것은 그때였다.
교회 천장에 고정된, 긴 철선에 매달린 구체(球體)는 엄정한 등시성(等시性)의 위엄을 보이며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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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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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죽은 이유를 밝혀야 하는 열외 병장

나(이필립)은 수색대다. 군에 오면서 남자다운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 중 무릎이 망가진 이후 광주통합병원에 4개월씩 2차례, 총 8개월을 치료받는 사이에 자대에서는 열외취급을 받게 되었다. 계급은 병장이지만 아무도 나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만은 편한 탄약고 근무를 말뚝서면서 제대할 날만을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기무대 박대위가 찾아왔다. 나를 광주통합병원에 다시 보내 주겠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얼마남지 않은 군생활을 환자로 편하게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붙지 않는 혜택이 있을 리 없다. 박대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발자국'은 내가 광주통합병원에서 뭔가 조사해 주기 원한다.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친하게 지냈던 정성한에게 무슨 일어났는지 추리해 냈고, 정성한이 죽은 것까지 알아챘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결론이 난 정성한 병장의 사망.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정확히는 기무대의 상관인 '낯선 발자국'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위해 박대위가 움직인 것이다. 두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대보다 익숙한 광주통합병원으로 돌아온 나는 정선한이 죽은 이유를 캐내기 시작한다.


이동원 1979 ~ . 소설가. 2014년 《살고 싶다》로 세계문학상 수상


노골적인 제목, 예상과 다른 내용

처음 읽은 이동원의 소설이다. 사실 누군지 잘 모른다. 제목이 노골적이다. '살고 싶다'. 제목만 봐서는 누군가 주인공이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칠 것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내용이 많이 다르다. 주인공은 군대에서 짬밥대접 받지 못하는 찬밥 신세이고, 자대보다는 병원에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는 군대 부적응자이다. 소설의 배경은 군병원이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환자다. 모두가 최소한 부대내에서는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쓸모없는 존재들 속에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권력관계에 따라서 다른 환자를 억압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최고 권력자의 편의에 따라서 을 사이의 권력관계가 생기는 것을 보니 씁쓸한 느낌이다.


군대라는 장소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군대는 터무니없는 폐쇄성 때문에 존재 자체로 두려움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최근에 휴대폰 반입이 가능해져서 폐쇄성이 많이 약화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더구나 사고의 책임이 지휘관에게 지워지기 때문에 부대내의 각종 사건, 사고는 축소, 은폐되거나 그렇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어지간한 남자는 모두 군대를 경험했고 많은 남자들이 군대내의 부조리를 목격했기 때문에 군 관계자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주인공 보정이 너무 강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선한이 자살을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자명한데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임무가 이필립에게 주어졌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필립이 정성한과 가장 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필립은 대단한 사람이다. 굉장히 찌질하게 찌그러져 있었던 이필립은 엄청난 추리력의 소유자다. 처음 사건조사를 의뢰하는 박대위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으로 되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는 말만 듣고서 정선한의 신상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을 미리 알아채고, 정성한이 죽은 것까지 스스로 추리해낸다. 첫 추리 이후에도 그의 추리는 거침이 없다. 항상 빈틈이 없고 죄있는 자의 의표를 찌르고 결정적인 순간에 진실을 밝혀낸다.


게다가 담력도 어마어마하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병실내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병실장에게 엉겨붙어서 승리를 거둔다. 상대가 대위 정도 되면 긴장같은 건 하지 않는다. 특히 기무대 대위 정도의 명령쯤은 무시하고 농담을 던지는 대담함을 가졌다. 설득력은 또 어떤지.. 누구든지 이필립이 궁금해서 물어 보면 모두 말해 준다. 그것도 토씨하나 어긋남이 없는 진실만을 토로한다. 자기 때문에 병사가 죽어 죄책감에 자살하려던 대위는 말할 것도 없다. 특별한 이유없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병사도 다 털어 놓는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님같다.


주인공인 이필립이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주인공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꼭 셜록 홈즈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의 단서만 봐도 전체를 파악하고 전투력도 뛰어나다. 그래서 홈즈가 추리를 시작하면 독자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위협에 빠져도 별로 긴장되지 않는다. 우리의 명탐정 홈즈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험을 빠져 나갈테니까.. 이필립 병장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부대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어도 앞으로 인생이 막막해도, 친구가 죽은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심장 두근거리는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국군광주통합병원. 소설 속 약칭 광통. 현재는 장소를 옮겨 함평병원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사진 출처: 광주in  http://www.gwangjuin.com/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 아쉬운 전개

시작은 재미있다. 폐쇄적인 공간인 군대, 의문스러운 자살을 한 친구, 권력을 지닌 알 수 없는 존재, 작은 권력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병사들. 이 모든 매력적인 요소들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뻔 했다. 사실 이필립이 처음 병실에 와서 병실장을 꺾을 때는 속시원함도 느꼈다. 그런데 계속해서 어려움없이 모든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해 버리니 흥미가 떨어진다. 긴장의 풍선이 끝까지 부풀어 올라 터지는게 아니라 중간 어디쯤에서 구멍이 뚫려 피식 바람이 빠지는 것 같다.


밑줄긋고 싶은 문장이 굉장히 많은 책이다. 명문장,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그 좋은 문장들이 이 책과 어울리는지, 또는 적혀있는 그 곳에 꼭 있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멋있는 말이 많았다. 따로 떼어 놓으면 참 좋은 말인데..


★★★☆

아직은 몇몇 좋아하는 작가를 제외하면 한국소설을 고르는 눈이 없어서 대충 아무 소설이나 닥치는대로 사서 읽고 있다. 이미 너무 많이 모아 놓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책을 읽는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 무슨 문학상을 받은 책 위주로 읽고 있고 있다. 《살고 싶다》는 게중에 딱 중간정도 되는 책이다.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는데 조금 아쉽다. 지루하지는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 어렵지도 않다.


딱 별 3.5개만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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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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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선을 벗어나 러시아로 떠난 여자

따냐(안나)는 조선 역관 집안에서 자란 여자다. 역시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교육 덕분에 따냐는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익혔고 특히 러시아어에 능하다. 집안에 닥친 불행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로 넘어간 따냐는 '얼음여우 사기단'에 픽업되어 유럽 귀족들에게 숲을 파는 사기에 가담한다. 그 와중에 경쟁사기단인 '흑곰단'의 조선인 '이반'을 만나고 자기가 속한 얼음여우 사기단을 속이고 숲 판 돈으로 한 몫 챙긴다. 따냐와 이반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5명으로 이루어진 갈범무리 사기단을 결성해서 큼직한 사기를 치고 다닌다.


처음 읽은 김탁환의 소설이다.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는데 표지를 살펴 보니 '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였다. '아라사 가베'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무기삼아 구한말을 누빈다

배경은 조선이 저물어 가는 시기. 러시아에서 사기를 치는 일당이던 갈범무리 사기단은 민영환을 대표로 니꼴라이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단의 통역관으로 참석하면서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조선을 지키려는 민영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따냐의 마음이 움직인다. 따냐는 물론이고 이번 역시 조선인이기는 하지만 조선 이름을 잃은 민초들이다. 따냐의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처형단한 역관이고, 이반은 노비로 조선에서 도망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도대체 이들의 마음 속에 조선에 대한 무슨 정이 남아 있을까?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랬던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민영환, 윤치호 이후 이완용도 나오고 고종도 등장한다. 아마도 당시에 러시아어에 능통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냐와 이반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누비고 다닌다. 이반은 고종의 통역관이 되고 따냐는 고종황제에게 커피를 끓여서 대령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의 흐름에 두 명의 가상인물을 슬쩍 끼워 놓았다. 두 사람에게 대단한 역사인식 따위는 별로 없다. 이반은 권력을 향해 움직이고 따냐는 이반을 향해 움직인다. 소설 내내 왠지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와는 다른 맛을 품은 커피향이 진동하는 것 같다. 러시아 커피는 더 쓰고 거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김탁환 1968 ~ . 소설가. 주로 역사에 관한 소설을 많이 쓴다.


하지만..

이 책은 커피향 가득한 정서를 전달한다. 아마도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데서 착안한 소품이고 제목일 것 같다. 커피향 가득한 소설.. 좋다. 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었는지 물어 본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따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구한말의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흘러가지만 엄청나게 흥미가 돋지는 않는다. 독자가 책 속에 푹 빠지기에는 인물들에게 크게 동화가 되지도 않고 연민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빨리 쉽게 읽을 수는 있는 굉장히 재미가 있지는 않다.


나는 그 이유로 이 책이 너무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250 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지만 작은 판형, 자간 간격, 중간에 들어 있는 그림을 감안해 보면 꽉 찬 책 기준으로 70이나 80 페이지 정도밖에 안된다. 한 인물의 삶과 구한말의 복잡한 정세를 다루기엔 너무 짧다. 그러니 모든 사건이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인물들도 두 주인공 빼고는 그냥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정도다. 어느 인물 하나 정붙일 사람이 없다. 당연히 인물 묘사도 생생하지 않고 굉장히 평면적이다. 따냐와 이반도 마찬가지. 오래 등장한다고 정드는게 아니다.


고종. 1852 ~ 1919.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커피를 굉장히 좋아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관파천에서 환궁까지의 긴박함

필치가 담담한 편이라서 크게 긴박감이 느껴지는 소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반(김종식)이 고종을 암살하기 위해서 따냐가 갈아 놓은 커피에 아편을 몰래 넣는 장면은 가상의 인물이 적극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대담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막은 따냐의 활약 역시 눈에 띈다. 더불어 마지막 따냐와 이반의 대화는 인상깊다. 어떻게든 이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으려는 따냐. 따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이반. 따냐는 이반을 사랑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반이 따냐를 사랑했는지는 궁금하다. 그리고 이반이 했던 모든 말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도 궁금하다. 이 모든 궁금증은 이반이 거열형에 처해져서 진실은 이제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흥미진진하게 사건들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정확하게는 사건은 흥미진진할 수 있을 뻔했는데 긴박감이 흐르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글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구한말의 실체적인 모습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특히 역사책에서 '아관파천'이라는 사자성어 비슷한 사건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느껴볼 수 있는 점도 좋다. 마지막에 따냐는 빼째르부르크를 거쳐 미국으로 넘어가 카페를 열고 '노서아가비'를 판다. 그리고 그곳의 문인들과 교류를 갖는다. 참 안전하고 마음이 놓이는 결말이긴 한데,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탄되고 국권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면서 따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지 않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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