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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돌베개, 2011]
그가 내놓은 책은 몇 권있다. 최근까지 근거리 책장을 지키고 있는 책은 <고뇌의 원근법>과 <만남>이다. <고뇌의 원근법>을 통해서는 숨이 막혔다. 그런 비극적인 감정이라니, 마치 전쟁 중에 탈영한 병사와 같지 않은가하며 읽는 과정에서 수차례 책장을 덮었다. 솔직히 공감도 공감이거니와 명증하게 날라와 꽂히는 그의 감상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만남>에서는 트랜스네셔널한 재일조선인의 민족주의와 토종 철학자의 보편주의가 마치 역이 바뀐 배우들처럼 보여 부조리하게 보였다. 이중, 삼중의 정체성이 더욱 사유 사이의 좁은 길로 이끌었을 터이지만 이상하게도 김상봉 교수의 측에서 그들의 대화를 읽게 되었다.
아직도 방황하는 정체성, 재일조선인
<언어의 감옥에서>는 그가 2005년 이후에 발표한 평론들이 모여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제일 관심을 끄는 부분은 재일조선인 학자인 그가 한국에 교환교수로 재직한 경험이 벼려놓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심화된 고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렌즈로 바라본 일본과 한국의 '사이비 평화주의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그의 글은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그 좁은 길은 울퉁불퉁했으며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그려주는 네모반듯한 대로에 비해 다니기 불편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길이 더욱 리얼했음을 인정한다. 이는 나 스스로 쉽게 과거로 떠내려보낸 깊지 않은 고민들을 다시금 꺼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태면, "나에게 모어는 일본어다."(35쪽)라고 시작하는 글을 보자. 피해자의 상황을 가해자의 언어로 밖에는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이란, 그리고 그가 가해자의 언어를 통해서 형성되는 피해자의 정체성이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만틈 아득하다.
그래서 그는 모어와 모국어가 같은 언어 다수자에서 벗어나 비모어인 조선어를 아무리 잘해도 끝내 마음이 편해질 수 없는 상황(41쪽)에 처한다. 이런 상황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자신의 민족을 학살한 가해자의 언어로 밖에는 시를 쓸 수 밖에 없었던 첼란, 아메리, 그리고 이탈리어어가 모어였던 레비의 사례와 오버랩 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서경식이 예를 든 이 세명의 이방인은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문명의 힘이 커질 수록 안에서 터질 수 밖에 없는 이방인의 고통이라는 것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있는가? 그는 해법으로 모국어의 권리와 함께 모어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한다. "본래 모국어의 권리와 모어의 권리는 서로 간에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립 가능한 개념인 것이다."(73쪽)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경험을 가진 우리의 역사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낯선 경험이 아니다. 즉, 앙상한 국어 내셔널리즘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600만명이 넘는, 한국어가 아닌 모어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을 포괄하자는 주장이다.
피해자라는 좁은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
이 정도라면, 서경식이 단순히 언어 다원주의를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제안한 것에서 끝난 것이라면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는 특수의 문턱에 선 보편자의 일면에 불과하다.
<언어의 감옥에서>에 쓰인 윤동주의 '서시' 번역을 둘러싼 갈등(1장), 가해자인 일본에서 오히려 상찬되는 재일 조선인의 소설에 대한 복잡한 감정(3장)과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문제(11, 12, 13장)와 어설픈 한국 평화주의자의 과거해석에 대한 불편한 심정(14장)으로 나아가면 서경식이 제기하는 분절된 정체성의 모습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목전으로 치고 나온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에 대한 소위 일본 정전의 번역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번역되었다. 서경식은 이런 번역의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없애고 윤동주를 공평무사한 평화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로 만들어 버리는 '의도'를 따지고 든다. 이에 대한 논란에서 번역자가 근거로 내세우는 이가 바로 문익환 목사이다. "그것을 그의 저항정신이라 부르는 거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일 수는 없었다."(26쪽)이라는 말이 그렇다.
피해자의 말을 가해자가 가져와 정당화하는 이런 아찔한 보편주의는 서경식이라는 이방인이 없다면 도저히 문제시 될 수 없는 날 것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조국으로 불려들여진 재일조선인 작가 이양지의 글에 대한 서경식의 반발을 보자. 이양지는 '광주사건'이 한창일 때(81쪽) 한국에 있었으며 이 때 그녀는 가야금과 판소리를 배웠다. 일본에서는 국내 민주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재일조선인 그룹에 대한 냉소를 보였던 그이다. 그녀의 비판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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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읽고 쓰지도 못하고 모국인 한국 사람들의 생활 실태도 모르면서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 '연대'를 말하고 '반체제'를 호소할 수 있는가."(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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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서경식의 대꾸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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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만 우리나라를 논하고 혁명을 부르짓는 사람들에 대한 이양자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녀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목표로 살겠다는 방향성이 있을 때일 것이다."(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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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차이일까. 나는 이 점에서 비판의 윤리성을 발견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윤리학의 유물론일 것이다. 맥락에서 보면 이양지의 비판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서경식의 존재로 인하여 이양지의 비판은 힘을 잃는다. 그것은 글의 물질성을 보여주는 비판의 '육화'이다.
좀더 비근한 예로는, 일군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강화된 근대화론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경제발전과 질식된 민주주의를 면도칼로 도려내는 일군의 지식인도 그렇다.
여기서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인의 책임 문제로 나가보자. 서경식은 1997년에 있었던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에 의해 조직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심포지엄을 평가하면서, 두 가지 논점을 정리한다. 즉, 위안부문제를 식민지 지배의 틀로 보면 조선인 '위안부'가 아닌 일본인 '위안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게는가라는 것이 첫번째다. 그리고 현재의 양심적인 일본들이 가해자의 자식으로서 피해자의 자매로서 보이는 이중성에 대한 것이다(247쪽).
이 중에서 서경식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두번재 태도다. 서경식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의 자손들이 피해 당사자에게 느끼는 연대의 '수평성'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렌트를 끌어와 구분하는 '죄'와 '책임'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50쪽).
서경식은 죄는 당대의 가해자 개인이 지는 것이지만, 책임은 집단이 지고 그것은 그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후손들까지 포괄한다. 이런 불편함은, 평소 동경하던 프랑스에 방문하면서 들른 한 베트남 음식점 주인이 '일본인이냐'고 묻는 말에 답을 못하는 서경식의 민감함과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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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음식점 주인은 의례적인 미소를 띠고 있지만, 내가 '코레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의 눈은 어떤 빛을 띠게 될까?"(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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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인 기업이 베트남에서 경제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제2의 식민지'를 강요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베트남인들에게 이런 예민함을 보인 적이 있던가. 외화 획득이라는 명목으로 파병된 우리 국군에 대해서는 영웅으로 칭하면서도, 우리의 삶과는 무관했던 수많은 베트남인의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리는, 정말 일본인들의 극우주의를 비판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자문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어이없음은 사실 우리나라의 사이비 평화주의자들에게도 발견된다.
누가 용서하는가
사실 개인적으로 <언어의 감옥에서> 중,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글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장이다. 특히 일본의 '아사히 신문'이 주최하는 오사라기 지로논단상을 받기까지한,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가 그렇다. 내가 서경식을 알기 전에 박유하의 책을 알았더라면, 그의 유려한 논변에 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는 사람들, 소위 '양심적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낳은 것 역시 다름 아닌 전후 일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그리고 그들이 아직 다수인 것은 분명한 이상, 일본이 전후에 지향했던 '새로운' 일본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반성없는 일본'이라는 대전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335쪽)
아마도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전후 한일간의 새로운 관계 모색이라는 대전제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최초의 민주정부로 등장한 김대중 정부가 '화해의 역사'를 청할 때 느낀 것은 일종의 역사적 진보였을 것이며 소란스러운 일본의 한류열풍은 일말의 문화적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시킨 사례로 느껴 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경식은 박유하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라는 논법을 명확하게 도려낸다. 이는 일본어 번역이 '한국'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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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리와 한국은 등식으로 이을 수 없는 것인데, 일본을 잘 알고 일본어도 잘한다고 자임하는 저자이니 이 번역어는 충분한 숙고를 거쳐 사용한 것이이라. 그러나 이 점에 박유하식 레토릭의 비밀이 숨어 있다."(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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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박유하는 불평등하긴 했어도 한일합방이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강조하고 불완전한 한일협정 역시 '우리의 잘못'이니 이를 재개정하자는 것은 우리의 '자기 비판과 책임의식'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런 입장바꿔보기는 그가 상정하는 '우리' 안에서는 충분히 경청할 만하지만 이를 가해자의 언어로 번역 출간할 때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다시 말해, 그런 박유하의 논법을 쫒아가게 되면 우리는 식민지 가해자인 일본이나 일본 국민에게 비판을 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단계론은 결과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박유하와 같은 평화주의는 그가 원하지 않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감성과 연대를 하게 되고, 오히려 정신대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를 적대시하게 된다.
언어의 감옥에서
서경식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함은 재일조선인 일반이 공유하는 공통의 감정이 아닐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민감한 글쓰기가 우리 스스로 둘러쌓여 있는 언어의 감옥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그에 비추어 보면 우리 모두 언어라는 감옥의 '수인'인 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