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가 전쟁통처럼 흘러간다. 내게 그렇게 지루하고 고독한 날들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정신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보내고, 또 만나며 아쉬운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다. 시간이 가는지 안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에드먼튼에도 봄이 왔다. 아직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하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에 비교하면 뷰리풀! 이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제법 따뜻하다. 

내게 일어난 새로운 일들을 어떻게 기록으로 남길까. 요즘의 고민거리다. 그대로 서술하면 오글거릴 정도로 과장될까봐 걱정되고, 그렇다고 사건을 객관적으로 볼 때까지 기다린다면 너무 많은 것이 묻혀버릴까 걱정이다. 실은 모든 사건들이 머릿 속에서 정리가 될 무렵까지 기다려보자는 쪽이었는데, 최근들어서는 반짝거리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래면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최근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자살시도를 할 정도로 감정적이지만 선천적으로는 밝은 친구다. 원래 이친구는 스킨헤드였는데, 자기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감옥에 가 있는 아빠가 되기 싫어서 갱단에서 은퇴했다고 한다. (은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친구가 그 갱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와는 2주에 한번씩 주말에 시간을 함께 보내고, 한달에 500달러씩 지원을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와는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에드먼튼에서 알아주는 기타리스트지만 밴드가 해체된 이후로는 공연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가 떠나기 전 한 번은 공연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친구의 아빠는 친구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갔는데, 몇 년 전 다시 돌아왔다. 그의 와이프와 함께. 그의 와이프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지만, 모두가 '그녀'라고 하고 그녀의 이름은 엘리다. 그들의 집 베이스먼트에는 드럼과 앰프, 갖가지 종류의 기타와 훌륭한 스피커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수백개가 넘는 영화 DVD가 구비되어 있다. 친구의 아빠와는 별 다른 이야길 하지 않았지만, 엘리는 마치 잔소리쟁이 할머니같이 다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안티소셜같이 보이긴 했지만 무척 다정했다. 

난 그 친구의 인생이 좋은건지, 그 친구가 좋은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무서워보이는 갱스터 백인 남자그룹이 내가 그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정해지는 것도 평생 못해볼 경험이었고, 함께 헤비락 뮤직을 들으면서 내가 그 동안 이런 음악을 얼마나 그리워했었는지 깨달았고, 몽롱한 레드라이트의 불빛 아래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친구와 그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꿈처럼 느껴졌고, 나와 전혀 관계없을 줄만 알았던 나이든 게이피플의 일상사가 신기했다. 매일같이 파티만 하며 사는 젊은 게이피플이 늙으면 이렇게 될까, 이들을 젊었던 시절은 어땠을까..

그런데 이걸 어떻게 기록해 두나? 시간이 지나면 농익을 줄 알았던 추억들은 차츰 희미해져서 이젠 찾을래야 찾기도 힘들어졌고, 그렇다고 설익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줄줄 늘어놓자니 나만 특별한 사람인양 특권의식에 가득 차 떠들어대는 것만 같다. 속으로야 내가 특별한 애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밖으로 드러나면 그만큼 꼴사나운게 없다. 그냥 담담한 어조로, 디테일과 솔직함을 잊지 않으면서도, 반짝거리는 글을 쓰고 싶다. 경험이 쌓일 수록, 욕심도 커지니 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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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1-04-0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내 나는 이렇게 살아요, 나처럼 살아볼래요, 류의 페이퍼를 썼던 저로선 부끄러워져요. 전 특별하지 않으니까 특별한체 했던 것 같아요.

뽀님이 얘기한 삶, 일상으로 펼쳐지는 이질적인 삶. 참 꿈만 같아요.

이 글은 반짝거려요!

Forgettable. 2011-04-04 10:03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히히

예전엔 거의 하루에 하나씩 강박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렸었는데, 요즘은 쓰다가도 자꾸 말아버리게 되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어서 더 힘들어지고. 그래서 오랜만에 글을 쓴다고 해도 뭐 딱히 괜찮은 것 같지도 않고. ㅋㅋ

아마 예전엔 삶이 지루하니까 글에서 돌파구를 찾았고, 지금은 꿈꾸는 것처럼 살고 있으니까 글이 안써지는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무해한모리군 2011-04-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마음에 들어요.
건강하면 다 괜찮아요.
포게터블은 반짝반짝이는 잘난 사람이예요 ㅎㅎㅎ

Forgettable. 2011-04-04 10:07   좋아요 0 | URL
아. 저 여기 온지 1년만에 아파요. ㅠㅠ 감기가 제대로 들었어요. 근데 너무 놀아대다가 아픈거라서 ㅋㅋ 어디 아프다고 징징거리지도 못하겠음 ㅋㅋㅋㅋ

오랜만에 페이퍼 올린 보람 있게 보고 싶은 분들이 댓글 달아줘서 기분이 좋아요. :)

무해한모리군 2011-04-04 12:32   좋아요 0 | URL
아프군요 이런.
어제 많이 먹고 힘내서 더 열심히 놀아요!!

저도 포게터블 소식을 들으니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힘이 나요.
요즘 저도 무척 바빴답니다.

Forgettable. 2011-04-06 14:22   좋아요 0 | URL
저도 아픈데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놀고 있어요. 계속 놀아요 진짜 ㅠㅠㅠㅠㅠㅠ
한국가면 못놀 것 같아서 더 열심히 열심히 ㅋㅋㅋ

노는게 남는거죠. 휘모리님도 열심히 놀고 계세요 저 갈 때까지!
결혼하신 이후론 몸 사리고 계실 것 같다능ㅋㅋ

2011-04-04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1-04-0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요, 솔직 담백하고. :) 한국 들어오시기 전에 아픈 거 다 나으시길!

Forgettable. 2011-04-06 14: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이래저래 많이 노력해봐야겠어요.
아, 그저 스쳐지나가는 감기니까 곧 낫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에선 감기 달고 살았는걸요. ㅎㅎ

pjy 2011-04-0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일상이 참 버라이어티 한게 우리 일상이죠~
놀아서 아프고 싶은데요ㅋ 쓸데없이 민감해서 황사에 눈깔 뒤집혔어요 ㅠ.ㅠ

Forgettable. 2011-04-06 14:25   좋아요 0 | URL
아 황사 ㅠㅠ 전 오만데 안아픈데가 없었는데 여기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공기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이 도시가 체질적으로 저랑 맞는건지?ㅋㅋㅋ

버라이어티한 일상이 자주 찾아오는게 아닌만큼 즐기고 있습니다 ㅋㅋ

Joule 2011-04-0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없어서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아름다워요. 내 손에는 독이 묻어 있어서 내 손이 닿는 순간 그것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버릴 테니까. 이번 이야기는 묘하게도 인디언 써머 같은 느낌이 들어요.

Forgettable. 2011-04-06 14:28   좋아요 0 | URL
한국에도 인디안 써머가 있나요?
전 여기서 인디안 써머의 참 의미를 처음 알았어요.

제 글이 인디안 써머 같다니 마음이 다 훈훈합니다. :) 잡을 수 없는 것이더라도, 잡으려고 계속 발버둥치면 그 일부라도 마음에 새길 수 있겠죠. 인디안 써머였던 작년 가을의 열흘간이 생각나네요.

2011-04-05 0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6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8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4-06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님~ 이제 곧 돌아오는군요~~~~~ 반겨줄테니 광주로 와요!
송정리 떡갈비에 산사춘을 마셔야지요~~~ㅋㅋ

Forgettable. 2011-04-06 14:39   좋아요 0 | URL
아 떡갈비에 산사춘! 안그래도 친구가 광주에 있어서 한 번 가고싶단 생각은 했는데. ^^
캐나다에 있다보니 뭐 버스로 3~4시간 거리는 우습게 됐어요. ㅋㅋㅋ

버벌 2011-04-07 23:23   좋아요 0 | URL
아 저기. 눈팅하다가 반가워서. 제가 광주살아서요. 송정리라니.. 송정리라니.. 아는 단어에 급 흥분을 했어요. 뽀님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남기는 댓글이 뽀님 글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아 광주다 광주.

Forgettable. 2011-04-08 12:54   좋아요 0 | URL
버벌님. 죄송할 것 까지야요. ㅎㅎㅎ 전 모든 댓글 다 환영인걸요. ^^
광주사시는군요. 예전에 일 때문에 한 번 출장갔었는데, 순오기님이 송정리에서 떡갈비 사주셨었거든요. 흐흐흐흐 아으 먹고 싶다!!!

순오기 2011-04-19 20:33   좋아요 0 | URL
아~ 그럼 뽀님 광주에 오면 버벌님까지 같이 만나면 되겠네요.^^
버벌님은 어디에 사는지 모르지만, 광주야 한동네 같으니까요.

에디 2011-04-0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뽀님의 캐내디언 라이프를 훔쳐보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오시는군요 ㅠㅠ

Forgettable. 2011-04-08 12:56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놀만 하니 가야해서 아쉬워 죽겠어요. ㅋㅋ
이런 저런 재밌는 얘기 많이 남겨놨어야 했는데 결국은... 고민만 하다가 술먹고 다 까먹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