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로 난 백수다. 

학생들이 신학기라고 마구 재잘거리며 맞지도 않는 교복을 입고 뒤뚱거리며 걷는 뒷태가 마냥 귀엽다. 그러고보니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게, 올해로 딱 십년 전이다. 그 때 난, (아빠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명문고에 입학 했으니 꼴지를 해도 성균관대쯤은 갈 수 있을거라며 자신만만해 했던게 기억난다. 그러고선 첫 중간고사에서 정말로 난생 처음으로 1등이 아닌 꼴찌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고, 충격을 받아서, 음, 더욱 더 분발하여 공부를 하기는 커녕 그냥 포기해 버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왠일인지 마음먹은대로 하고자 할 때,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일이 술술 풀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 왔다. 나는 그것을 평안한 가정 환경과 나쁘지 않은 머리,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정도의 아주 소량의 행운 덕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덕에 '안되도 되게 한다'는 경이로운 노력은 커녕 인내심따위 역시 눈꼽만치도 키우지 않았다. 어른들이 보시기에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노력한 것에 과분한 결과가 따르지 않을 땐 기꺼이 포기해버리고 만다. 쉽게 포기하고, 기대치를 매번 낮추며, 그만큼 조금씩 조금씩 더 나태하게 살아왔다.  

그로부터 십년 후, 난 변한 것 하나 없이 또 포기해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포기가 참 힘들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난 내가 참 대견하다. 토닥) 

나름대로 남들 다 사는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 기울인 아주 작은 노력에 과분하게도, 퇴사 인사 메일에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격려해주시고 안타까워해주셨으며 앞날의 행복을 기원해주셨다. 생각해보면 2년이 아주 낭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말릴 정도로 '술술 풀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포기해버린 모양이다. 

백수라고! 당당하게 페이퍼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은 어째 아르바이트가 쉽게 구해져버리는 바람에 오늘 바로 출근했다. 시급 4,300원에, 오전 7시까지 출근해서는 작은 베이커리에서 빵과 커피를 판다. (왠지 귀여워.) 나는 오늘 벌써 라떼를 만들어보았다. 맛없었다; 내게 커피만드는 방법을 정성스럽게 가르쳐주는 아이는 파리크라상에서 메인바리스타를 1년이나 했단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친구를 스승으로 받들게 되었다니, 정말 '마음먹은대로 하고자 할 때,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일이 술술 풀리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은가!!!!!!!!!!

아침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빵을 정리하는데 문득 너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했다.

앞으로 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것을 새로 시작할까. 떨린다. 무척. 

(+ 1학년 중간고사때 포기했던 공부는, 물론 2학년 중간고사때 다시 시작했다.:D 며,  
이 땅의 모든 고딩 부모님께 용기를!
아직도 고딩막내와 그 고딩만도 못한 20대 후반 철없는 딸래미를 둔 우리 부모님께도 화이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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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3-03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딘가요 그 가게..
출입문을 통해 들어온 왠 곰 한마리가 커피와 쏘시지 들어간 빵을
우적우적 씹어 먹어도 너무 놀라진 마세요.

2010-03-03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3-0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떼를 만들고. 그리고 포기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용기. 그런 것들이 다 너무 부럽고 예뻐 보이네요. 게다가 추정컨대 저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나이도 더불어서요^^;;

Forgettable. 2010-03-03 22:35   좋아요 0 | URL
앗, 하이드님 서재에서 뵙던 (물론 blanca님의 서재에도 자주 구경 갔습니다만^^) blanca님이시군요! ㅎㅎ

에스프레소에 넣을 우유를 뎁히는게 그렇게 세심한 작업인줄 몰랐어요. 그래서 전 자꾸 엄청나게 느리게 하고 있고요 ^^;; 백수생활, 그러니까 평일낮에 집에서 햇빛받으면서 커피 마시며 책읽는 생활을 하루도 못누리고 바로 아르바이트 시작해서 아쉽긴 하지만요.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서 참 다행이고 행복해요. 더 다행인건 엄청나게 미덥잖아하시던 부모님도 제가 좋아하니까 덩달아 웃어주시는거요. ^^

용기낸 제 자신이 참 대견해요. (얼씨구나~ 자화자찬~ ^^;;)

Arch 2010-03-0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일이 술술 풀리다니! 칫~ ^^ 좀 약올라요.
그래도 뽀님, 멋져요. 나중에 라떼 아트(맞나?) 해줘요. 나 커피맛 좀 알아보는 여자에요. ㅋㅋ

아아, 뽀님 믿어요!

Forgettable. 2010-03-03 22:37   좋아요 0 | URL
일이 술술 풀린다고 생각하는 제 밑도 끝도 없이 바닥만 치는 기대치를 생각해보면 그리 약오를 일도 아니랍니다. ㅋㅋㅋ

다음에 서울올 때 커피마시러 와요. 끝날 때 맞춰서 오면 커피 마시고 같이 불라 가면 되겠다. 히히
그때까지 엄청 연마할게요!!!! ㅋㅋ

자하(紫霞) 2010-03-0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뽀님 일하시는 가게에 가보고 싶군요~^^

Forgettable. 2010-03-04 21:40   좋아요 0 | URL
베리베리님 놀러 오실래요? ㅎㅎ
전 일요일만 빼고 오후2시까지 일하는데요, 시간 맞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오세요!
조용하고 커피도 맛있고 좋아요. ^^

자하(紫霞) 2010-03-05 16:52   좋아요 0 | URL
뽀님 외국가세요?
이런~언제가세요?
가시기 전에 한번 뵈어야 하나?
가게 위치는 어디인가요?

2010-03-05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10-03-0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로망스런 분위기에요.
아침에 빵을 만들고 커피를 내린다는 것은.
부디 포겟님이 그 일에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바리스타를 스승으로 두셨으니 전문 바리스타 자격에도
함~ 도전해 보시는 건..? ^^

Forgettable. 2010-03-04 21:42   좋아요 0 | URL
정말 로망이죠. 전 제 로망이 실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진짜 행복해요.

안그래도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볼까 생각중이었어요. 뭔가 수료증 같은것도 있는데, 일단 그거라도..
그 친구가 이것저것 많이 알려줘서 진짜 좋아요. ㅎㅎ 그런데 꼼꼼한 성격이 못되서.. 이번 기회에 섬세한 커피의 세계에 뛰어들어볼까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입맛이 싸구려고 ㅠ

아포지 2010-03-04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파란색은 정말로 잘 담는 듯.... 저 원등처럼 생긴게 뽀인트구려...

Forgettable. 2010-03-04 21:43   좋아요 0 | URL
제가 잘 담는게 아니고, 원래 제 카메라가 파란색 예쁘게 나오기로 유명하다네요. 히히

오늘 합격레터 집으로 왔네요 :)

다락방 2010-03-04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또 이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설정했어요. 이 사진 좋다 ㅠㅠ

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했다니! 그 순간이 뽀님에게 찾아왔다니, 다행이에요! 아침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빵을 정리하는 모습은, 제가 그려봐도 행복이네요. 아, 갑자기 저도 뛰쳐나가서 빵을 정리해야할 것만 같아요.

네, 뽀님. 지금처럼 계속 행복하도록 해요!!

이 땅의 모든 고딩 부모님께 용기를!
아직도 고딩막내와 그 고딩만도 못한 20대 후반 철없는 딸래미를 둔 뽀님의 부모님께도 화이팅을,
받고,
뽀게터블님께도 계속되는 행운과 축복을 얹어서 콜!

Forgettable. 2010-03-04 21:46   좋아요 0 | URL
흐흐 역시 락방님밖에 없어요!!!!!!!
요즘처럼 우중충한 날에는 이런 사진이 최고죠. ㅎㅎㅎ 좋아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전 어째 단순노동이 체질인가봐요. 그래도 퇴근시간 기다리는건 똑같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 락방님 우리 같이 행복하기로해요.

아유, 난 이렇게 행운을 빌어주고 날 믿어주는 사람이 많아서 참 좋네요.
서재질에 매진한 노력에 비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

2010-03-04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4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0-03-0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동네서 일하실까요? ^^
(흑심을 품고 물어보는 탕이..ㅎㅎㅎ)

Forgettable. 2010-03-04 21:50   좋아요 0 | URL
아뇨. 동네에는 별로 구하는데가 없더라구요. ㅠㅠ
동네에서 했으면 편했을텐데.. ㅎㅎㅎ

머큐리 2010-03-04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게 위치를 공개하라! 토욜도 일하면 빵과 커피 먹으러 갈지도,,,ㅎㅎ
7시 출근이면...퇴근은 몇시??

2010-03-04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3-05 08:40   좋아요 0 | URL
저랑가요 머큐리님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