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니와 주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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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미치고 환장'하는 기분을 느낀 게 얼마만이더라 꼽아보니 최근엔 소설을 거의 안 읽었구나.

거의 종장까지 읽었을 무렵, 너무 좋아서 책을 안고 방방 뛰다가 결국 M에게 전화했다.

목소리에서 흥분이 전해졌는지 어쩐 일로 M이 두서없이 마구 쏟아지는 내 말을 군소리 없이 들어주었는데 그와중에 나는 낭독까지 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독서가 환희였던 건 아니다.

 

『프래니와 주이』는 중단편「프래니」와「주이」연작 소설로 등장인물은 프래니, 주이, 글래스 부인(엄마), 레인(프래니의 남자친구) 넷이고 이들 외에도 편지와 극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등장하는 버디(둘째 형), 시모어(첫째 형)가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처럼『프래니와 주이』도 '기-기-기-결'의 지루한 구성인데, 중반이 지나도록 그들이 대립하는 내용이 공감도 안 가고 이해도 안 되니 이야기 속으로 진입하는 게 쉽지 않다.

 

일단 이 소설은 종교적 담론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데, 샐린저의 개인 성향인지 청교도적 교조주의는『호밀밭의 파수꾼』에 이어 이번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종교는 그 생리 자체가 폐쇄성과 결벽증을 갖고 있다 보니 '예수기도문'이 실린 작은 책을 둘러싼 글래스 남매의 다툼에 가까운 대화 역시 공감보다는 먼나라 먼이웃처럼 '아이고 의미없다'는 생각만 자꾸 든다.

 

재미있는 점은 종교에 대한 샐린저의 이중적인 태도인데, 매맞는 아내랄까, 그러니까 청교도주의 세태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결국 구원은 청교도주의 안에서 찾는다는 샐린저식 해법은 일견 '종교가 다 해줄거예요~'하는 허탈감을 준다.

게다가 이 소설은 샐린저의 다른 소설에 비해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인상이 강한데 이는 프래니와 주이가 '배우'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주부인 글래스 부인(베시 글래스) 역시 젊은 날엔 배우였으니 이 집안의 내력이 그러하다. 이렇듯 등장인물 모두가 한결같이 연극적 대사, 연극적 제스쳐를 취하니 좋은 말로도 소설의 흡인력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소설에서 감각적인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

 

일본판『프래니와 주이』의 역자인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소설 속 종교적 담론을 일종의 정신적 메타포로 수용하면 '종교'라는 허울에 현혹되지 않고 내용의 핵심에 접근하는데 보다 쉬울 것이라고 했지만, 이게 사실 간단치가 않다. 이 연작 소설이 발표된 1954년, 1957년은 아이젠하워(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사령관) 집권기이고, 10년 째 접어드는 전후 냉전체제가 공고히 다져지고 있고, 매카시즘 광풍이 한바탕 휘몰아쳤던 직후이다. 이런 세태와 청교도라는 배경을 깔고 뉴욕 부유층 남매가 종교적 담론을 벌이는 것이다. 문화의 뿌리가 아예 다른 국가의 독자들은 1950년대 뉴욕의 세태와 더불어 종교적인 장벽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토록 흥분케 했던, 작가로서 샐린저의 명성이 여지 없이 빛나는 지점이 있다. 이 낯설고 까다로운 대화를 인내심을 가지고 듣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보편적 감동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기어이 온다.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읽어야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데, 같은 길을 이어 붙이기 한 것 같은 산길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고 저 아래로 걸어온 길이 완성된 풍경을 이루는 장광을 보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고진감래(苦盡甘來)!

 

소설이 끝나가는 거의 막바지에 소나기처럼 등장한 '뚱뚱한 여자'는 의미 그대로 이 소설의 화룡점정이고 절창이다. 주이에게 구두를 닦게 하고, 프래니에게 무대를 재미있게 만들도록 감시하고 조종하는 시모어의 '뚱뚱한 여자'가 주이가 이해한 것처럼 정말 '그리스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독자(=나)로 하여금 소설 전체를 되돌아보게 하고 다양한 해석과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구원의 메타포임에는 분명하다.

 

(샐린저를 대변하는 것 같은)샐린저의 소설 속 '오빠'에게 여동생은 특별하다.『프래니와 주이』에서 내가 감동 받았던 장면은 두 곳인데 모두 주이가 프래니에게 내면적 소통을 시도하던 장면이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왠지 홀든이 피비로 인해 구원받았던 빚을, 주이가 프래니에게 갚는 것처럼 느꼈고 괜히 울컥했다.

 

* 소설을 읽으면서 영혼 없는 은유 만큼이나 의인법을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거실 나머지 부분에는 그리도 무례하게 굴던 태양이 훌륭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 햇살은 사실 아프간 담요 전체를 씻고 있었고, 연푸른색 울 담요에 노니는 따스하고 화사한 빛의 유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바라볼 가치가 있었다. -p.158

 

 

* 다음은 샐린저의 예술론 혹은 작가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선 생각할 권리가 없어. 어떠한 의미에서든. -p.250

 

분량이 짧은「프래니」편은 그냥 저냥 읽고「주이」편을 읽던 도중, 결국 거미줄보다 얇은 인내심을 탓하며 책 후면을 뒤졌다. 도대체 작가가, 소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옮긴이든 작가든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 엔딩 뒤로 페이지가 공백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뒤늦게 샐린저의 소설은 작가 에이전시의 요구로 서문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내친 김에 일본어판 역자인 하루키의 해설이 궁금해 잉여력을 발휘, 하루키 역자 서문을 잠깐 훑어봤다. 하루키 역자 서문은 삽지 형태로 책에 끼웠다고 한다.

 

 

- 아래는『프래니와 주이』일본어판 하루키 역자 서문(혹은 역자 해설)을 읽고 짧은 감상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이 소설의 재미는 단연 '매력적인 문체'에 있다고 단언하는데, '버디 문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주이」는 주이에게 보낸 버디의 편지로 시작하는데, 서간문의 특성상 화자의 개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그로 인해 친밀감이 더 느껴지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버디 문체'라고 특정 짓기에는 '홀든 문체'와 그 차이가 썩 안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한발 더 나아가 하루키는 샐린저가 버디의 문체를 차용해 '주이'를 쓰고 있으며 문장이 자유자재로 변화한다고 감탄하는데 역시 공감하기 어렵다.「주이」는 서사가 아니라 종교적 담론을 바탕으로 대화에서 시작해 대화로 끝나는 소설이라 딱히 문장을 음미할 대목이 없기 때문. 만약 문법적인 요소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하루키 개인의(혹은 일본인 정서의) 취향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참고로 내가 읽은 '호밀밭'과 '주이'는 역자가 다르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책을 읽은 사람은 대개 공감하겠지만,「프래니」가「주이」의 도입부로 읽힌다는 부분과 샐린저가 레인을 통해 학벌주의 엘리트를 비판한다는 부분인데, 사실 학벌주의 엘리트 의식을 비판하는 부분은『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이미 한차례 등장했기 때문에 딱히 새롭지는 않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다 웃음이 터졌던 부분은 독자들이 제기했다는 '프래니 임신설'이다. 이유는 너무 자주 실신하고, 섭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데 뭔가 설득력이 있는,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은가. 하물며 비평가들마저 이 의문에 가담했다고 하니 자기 소설에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을 가진 샐린저가 기함하고 펄쩍 뛸만 하다.

 

「주이」는 애초에 두 가지 이유로 뉴요커지(紙)로 부터 거절 당했는데 '분량'과 너무 '종교적'이라 게 그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래로 위기에 닥친 작가 옆엔 능력있는 편집자가 있는 법. 뉴요커지 편집장의 결단력과 팬심으로 소설은 분량은 좀 줄었으나 무사히 뉴요커 지면에 실리고 샐린저는 작가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에도 언급하지만 국내『프래니와 주이』역시 책 서두에서 샐린저가 아들과 더불어 편집장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는 헌사를 볼 수 있다. 샐린저의 은둔 성향을 미루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국내판 역자도 일러두기에 Zooey의 발음 표기를 놓고 판본을 가진 에이전시에 연락해 'zooee'라고 발음을 확인했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는 일본도 상황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경우 기존엔 'ゾ-イ-'(조이)가 일반적이었으나 'ズ-イ', 'ゾ-イ'등을 놓고 숙고 끝에 'ズ-イ'를 선택했다고 한다. * 'ズ'의 원어민 발음은 주와 즈의 중간 어드메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샐린저 사후 작가와 관련하여 다양한 책이 출간되고 있다는 내용. 작가가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지만 독자는 그저 반가운 일.

거의 홀짝 수준으로 대충 역자 서문을 훑은 소감은, 그 발로가 하루키의 팬심인지 아니면 역자로서의 성실성과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례사 비평의 느낌이 드는 대목도 적지 않다는 거.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유익했다. 무엇보다 역자 서문만으로도 이런 감상을 쓰게 하는 하루키의 힘이랄까.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나는 하루키를 안 좋아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은 직후 국내 출판사 제공 책소개(=출판사 리뷰)를 읽는데 이미 읽은 듯한 기시감에 대조해 보니 일본판 하루키 서문과 국내판 출판사 리뷰 중 일부는 거의 번역 수준으로 흡사하다.

1950년대 미국, 동양철학, 원시그리스도교리, 비트세대, 반물줄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성, 아카데미즘, 샐린저의 트라우마 등등...

참고로 하루키 역자서문이 실린 일본어판은 2014년 3월에 출간됐다.

아래는 각각 문학동네의 출판사 리뷰와 하루키 역자 서문 중 일부를 비교한 것.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양철학과 원시 그리스도교 교리가 지금보다 훨씬 절박하고 리얼한 존재성을 띠었고, 비트세대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였다. 이러한 종교성은 반물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며 압도적 번영을 반성 없이 향유하던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차갑고 경직된 아카데미즘이나 상상력이 모자란 획일적 미디어에 대한 반대였다. 이는 또한 제2차세계대전에 병사로 종군하며 격전지를 헤쳐온 샐린저가 짊어지게 된 깊은 트라우마의 절실한 위안 수단이며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말하고자 했던 영성은 특정 종교의 고정된 교의가 아니라 오히려 유동적이고 일반적인 ‘신을 원하는 심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출처. 온라인 서점 출판사 리뷰 中)

 

ただひとつご理解いただきたいのは、一九五〇年代のアメリカにおいては、東洋哲学や原始キリスト教の教義は、おそらく現在よりもずっと切迫した、リアルな存在性を持っていたという事実だ。ビート・ジェネレーションへと繋がっていくひとつの思想的ファッションとなっていた、と言ってしまってもいいかもしれない(もちろんサリンジャーの場合はそれは単なるファッションに留まらず、良くも悪くも彼を全的に包含していったわけだが)。それらの宗教性が意味するのは反物質主義であり、反プラグマティズムであり、圧倒的繁栄を無反省に享受するアメリカ社会への静かなる「ノー」であった。冷たく硬直したアカデミズムや、想像力を欠いた画一的メディアに対する「ノー」でもあった。また同時にそれは、第二次大戦に兵士として従軍し、数々の激戦の中をくぐり抜けてきたサリンジャーが背負うことになった深いトラウマの、切実な癒やしの手段であり、ヒューマニティー回復への大事な道筋でもあった。 (출처. http://www.shinchosha.co.jp/fz/fz_murakam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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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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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쓸쓸한,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 2부 타인의 증거를 읽을 때는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건조하고 차갑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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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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꼽아보니 내게 루시디였다가 루슈디가 된 시간은 살만 루슈디와 파트와의 시간, 딱 그만큼이다. 루슈디의 자서전이라니 왠지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얄미운 인간에게 휘두르면 딱이겠다 싶은 총 824쪽의, 중간중간 북마크를 꽂고 메모를 하는 수 초도 아까워하면서 키득키득 읽어내려갔던 이 두꺼운 양장본은, 완독하는대로 논문에 준하는 장문의 리뷰를 써주겠어-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읽은 직후 부산에 다녀오는 공백을 거치면서 내 머리 속도 공백이 되었다. 그나마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의심하며 독서 틈틈이 건성건성 메모한 것마저 없었으면 이 재미있는 책에 대해 내가 할 말은 '재미있었음' 이 한 줄이 전부가 될 뻔 했다.

 

* 이하, '조지프 앤턴' 메모...

  

- 루슈디는 메리앤과 도대체 언제 이혼하는가. CIA가 안가를 뒤졌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남편의 지인들에게 남편을 비겁한 겁쟁이로 매도하고, 시시때때로 거짓말은 일상다반사, 와중에 남편의 친구와 바람도 피는 나쁜 메리엔. '사랑과 전쟁' 수준의 막장에 준하는 루슈디와 메리엔의 일화. 욕하면서 읽는 재미.

- 모든 삶은 정치적 선택의 연속 - 하물며 저녁 테이블 위에 올라온 한 끼도 정치적 산물이다.

- 국가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종교적 위협으로부터 작가를 어떻게 방치하는가.

- 소설적 재미가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을 때와 유사하다. 확인하니 역자가 같다. 내친김에 책장을 뒤져보니 같은 역자의 책을 다수 발견. 기쁨.

- 긍정과 낙관이야말로 삶을 견디는 원동력.

- 살만 루슈디의 1989년

역사적 사건: 톈안먼 사태, 베를린 장벽 붕괴

개인적 사건: 파트와(전 세계 무슬림에게 살인면허를 쥐어주는 일종의 사형선고)

- 10년이 넘게 지속된 파트와, 무슬림의 협박과 죽음의 공포. 루슈디 경호를 예산낭비라고 비난하며 경호 철회를 주장하는 내부의 '적'들.

- 파트와 공표 이후 몇 개월이 지날 무렵 가명 '조지프 앤턴' 탄생. 이는 즉 그의 도피와 은둔 생활이 장기화된다는 의미.

- 궁금했던 제목 '조지프 앤턴'의 정체는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C.체홉에서 딴 것.

- 힌두교 80.5%, 이슬람 13.4%인 인도가 무슬림의 표적인 루슈디 고립에 그토록 앞장선 이유는?, G7과 서유럽으로 구성된 서방세계를 상대로 그토록 오랫동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란의 지정학적, 정치적 입지 혹은 배경은 무엇?

- 영국내 무슬림의 질적양적 영향력, 파급력.

- 88년 이란의 시아파 수장 호메이니가 파트와 공표, 89년 호메이니 사망 후 공식적으로 파트와 철회. 그러나 실제로는 1주기가 돌아올 때마다 파트와 재천명.

- 파트와 해결에 햇수로 13년(1989-2002)이나 걸린 건 루슈디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던가 아니면 그닥 '별볼일없는' 기회비용이었던가.

-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니까.

- 삶을 지배하는 건 운명이 아닌 우연.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니까'는 루슈디가 절망하려는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고, '삶을 지배하는 건 운명이 아닌 우연'은 엘리자베스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인데, 그의 상황과 별개로도 울림과 공감이 크다. 참고로 은둔 생활 중에 만나 애틋했던 엘리자베스와는 이후 볼썽사나운 싸움 끝에 이혼했다. 루슈디의 *'우울함, 호전성, 현명함, 자기연민, 조심스러움, 나약함, 이기주의, 강인함, 쩨째함, 단호함'과 관련된 일면들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그의 여성편력인데, 일단 책에 등장하는 두 번의 결혼은 모두 모양새가 전혀 아름답지 못한 이별이 되었다. 이는 루슈디가 여자를 '몹시' 좋아하는 남자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따라오는 여난인데, 순수한 호기심으로 파트와 철회 이후를 검색해보니 그의 여성편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양.

인도인 남성하면 흔히 떠올리는 정체성이랄까, 민족성이랄까...를 생각하면 루슈디 입장에선 한때는 사랑이었던 그녀들의 비난이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이제 정신 좀 차렸으면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작가로서의 재능을 아끼기 때문이다. 재능있으면 일부일처, 일부종사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못할 건 뭔가? 반문하고 싶다.

 

* 그들은 루슈디의 온갖 모습을 - 우울함, 호전성, 현명함, 자기연민, 조심스러움, 나약함, 이기주의, 강인함, 쩨째함, 단호함 등을 - 두루 목격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도와주었다. -p.262

 

자서전으로는 독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3인칭 시점으로 쓴 이 책은 유년, 청소년기가 잠깐 등장하고 작가로 등단했던 시절을 짧게 거쳐 호메이니의 파트와 공표와 함께 바로 본문으로 들어간다.

죽음이 발뒤꿈치를 끊임없이 쫓아오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하물며 그 시간이 언제 끝날 지도 알 수 없다면.

그 시간이 11년이 될 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견디기가 더 쉬웠을까. 삶과 죽음을 대상으로 하는 가정은 의미 없겠으나 분명한 건 그 지난한 시간 동안 루슈디를 지탱해준 건 낙천과 긍정이었다는 거다. 이후 자서전의 영양분이 되었던 은둔 기간의 메모가 그것을 증명한다. 루슈디가 가진 최고의 재산은 책 한 권을 쓰는 지성이 아니라 삶을 향한 애착이었던 것.

 

이 책을 읽기 전, 하필 모커뮤니티에서 인도인에 대한 사실적인 불평, 불만, 비난, 비판을 읽은 터라 어쩔 수 없이 특정 민족을 향한 약간의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가령 루슈디가 존 르 카레,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가디언 지면을 통해 펜으로 싸웠을 때, 루슈디의 편을 들어 '우리 작가님한테 왜 그래요!'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나 사정이 있었겠지- 라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던지 하는. 실제로 루슈디는 ** 르카레의 인터뷰를 잊지 않고 지면에 첨언한다. 본인도 인정하듯 쩨쩨할지는 모르나(11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는 쪼잔함을 보라) 한편 그의 기본적인 성향은 낙천성이라는 짐작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별개로 인도계 문학인들 모임에서 만난 줌파 라히리를 말그대로 '까는' 일화를 읽을 때는, 아니 이 나쁜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인정한다. 난 여자의 적이다. 참고로, 글쓴이가 작가이다 보니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직,간접으로 찬조출연하는 재미는 덤.

 

**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8년, 존 르카레가 인터뷰에서 오래전의 그 사소한 언쟁에 대해 언급한 글을 읽었다. "어쩌면 내가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틀렸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pp.683-689)

 

이 책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인간의 11년의 기록이다. 그런데도 유쾌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건 그 끝이 결국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남았고, 죽음의 그림자를 따돌리고 승리했다. 파트와와 함께 한 살만 루슈디의 11년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성으로는 비관해도 의지로는 낙관하라'(by 그람시)가 그야말로 제격이다.

 

"밥 경위님, 이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차량 아홉 대에, 모터사이클에, 사이렌, 경광등, 게다가 경찰관도 너무 많고. 차라리 낡은 뷰익을 타고 조용히 뒷길로 지나가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묻자 밥 경위는 대책 없는 바보나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밥 경위님, 저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거창한 대우를 받습니까?"

"아라파트 정도는 돼야겠죠."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동등한 예우라니 좀 놀라웠다.

"밥 경위님, 만약 제가 대통령이라면 지금보다 뭘 더 하는 겁니까?"

"선생님이 미국 대통령이라면 이 길 전체를 봉쇄하고 건물 지붕마다 저격수를 배치했겠죠. 오늘은 그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도 소란스럽지 않은 이 행렬은 맨해튼을 향해 달려갔다. 남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차량 아홉 대가 한 줄로 늘어서고 모터사이클을 울려대고 경광등은 마구 번쩍거렸다 -p.407

 

행운이 한번 더 찾아왔다. 마침 인근에 밀턴 울라둘라 병원이라는 작은 의료 시설이 있어 구급차가 빨리 올 수 있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오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실례지만, 혹시 살만 류슈디 씨 아니세요?" 그 순간만큼은 아니고 싶었다. 그냥 치료를 받고 있는 익명의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 그는 루슈디였다. "정말요? 지금 이런 부탁을 드리면 힘드시겠지만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생각했다. 사인 한 장 해줘. 구급차와 함께 온 사람이야.

(…중략)

트럭 컨테이너에는 신선한 거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다소 흥분해서 자파르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 말은 우리가 똥을 실은 트럭에 깔려 죽을 뻔했다는 거야? 산더미 같은 분뇨에 깔려 죽을 뻔한 거야?" 그랬다, 사실이었다. 7년 가까이 암살 전문가들을 잘도 피해 다녔건만, 그와 그의 사랑하는 가족은 거대한 똥사태에 파묻혀 종말을 고할 뻔했다. -pp.618-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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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서재 - 어느 중국 책벌레의 읽는 삶, 쓰는 삶, 만드는 삶
장샤오위안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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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한단 말인가"는, 내가 책장을 볼 때마다 하는 고민.

오카자키 다케시의『장서의 괴로움』이 장서가의 고충을 토로한다면 장샤오위안의『고양이의 서재』는 책벌레의 즐거움을 얘기한다.

저자 장샤오위안의 직업적 프로필의 가장 첫머리는 '과학사학자'이고 이어 천문학자, 성(性)학자, 저자, 번역가 등등이 이어지는데 그러니까 프로필을 통해 저자가 책을 엄청 좋아하는 과학자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여느 '책을 좋아하는 비문학인이 쓴 에세이'와 다른 점은 저자가 미리 밝힌 것처럼 에세이라기보단 만담에 가깝다는 것에 있다. 한마디로 저자가 처음 '책'에 반한 유년 이래로 청소년기, 청년기를 지나 장년이 되도록 삶의 일부분이었던 책 수다로 가득하다. 이 수다는 책 읽는 취미를 가진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는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데, 그야말로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 정말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이 행간마다 느껴진다. 


<고양이의 서재>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며 흥미를 끄는 부분은 아무래도 책 소개에도 나와 있듯 중국 문화혁명 시기의 '책의 수난'이다. 진시황의 실정(失政)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알려진 분서갱유는 마오쩌뚱에 이르러 비록 책을 불태우고 학자를 땅에 묻지는 않았으나 문화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당이 출판물을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검열하는 현대판 분서갱유로 되살아난다. 역설적이지만 장샤오위안의 독서 이력이 빛을 발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독서행위가 자칫 사상검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열악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책의 무한한 매력에 눈을 뜬 장샤오위안은 부모의 도움으로 또래에 비해 취미생활이 비교적 수월했던 것은 물론이고 책덕후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지적 재산이 되어 이후 장샤오위안이 대학에 진학하고 평생의 직업을 결정하는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올바른 독서가 인간에게 미치는 좋은 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락적인 관점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과학소설의 세 겹 경계」에 등장하는 SF와 관련한 내용인데 그중 헐리우드 영화 <매트릭스>를 개봉에 앞서 해적판으로 봤다는 내용이 있다. 해적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언급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저작의 권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저자의 해적판 감상 수다가 인상적이다.
참고로 찾아 보니 <매트릭스>의 중국 개봉 제목은 <흑객제국(黑客帝國>이다. (이러-언 중국!)

저자는 영상물과 관련해선 스스로 '디스크파'라고 부르는데 그러니까 극장 관람보다 집에서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디스크를 소장하는 걸 선호한다. 서재에 3만 권에 달하는 책을 꽂아두는 저자의 수집욕을 볼 때 '디스크파'가 아니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지만. 디스크파인 저자와 달리 극장파인 친구는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30번이나 봤는데 그 영화가 바로 '서유기 시리즈'라는 것이다. 고백하건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중화권 영화는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이고, 다섯손가락에 꼽는 영화에 반드시 들어가는 작품도 '서유기 시리즈'다. <월광보합>과 <선리기연> 두 편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주성치의 천재성의 정점이다(라고 감히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엔 '김용'으로 알려진 무협소설가 '진융' 얘기도 흥미를 끄는데 그의 지인이 준비한다는 진융 소설 열다섯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보인 '진융소설인물인보'는 나도 꼭 보고 싶다. 1924년 생인 진융은 1972년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했는데 그의 신작을 다시 보고 싶은 기다림은 여전하다. 중화권 최고의 영화가 '서유기시리즈'라면 중화권 최고의 작가는 '진융'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고백하건데 그의 열렬한 팬이다.

그런데 한참 재미있게 읽다 말고 응? 하는 대목이 있었으니, 장샤오위안이 진융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결혼하고 싶은 타입이라고 꼽은 '강민'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단정순의 옛연인이며 부방주 마대원의 부인이라는 강민이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에 오자마자 폭풍검색을 하니 『천룡팔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진융의 소설 중 가장 재미없게 읽은 책이라 아마 기억도 흐릿했던 모양.

이 외에도 유년시절 셰익스피어를 암기할 정도로 좋아했던 다윈의 감성이 자서전을 쓰는 칠순이 되자 마른 모래처럼 버석하게 말랐다는(다윈 자서전 인용 by 저자) 얘기를 할 때는 노년에 들어선 저자의 나이 탓인지 그 어투가 사뭇 진중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책 한 권으로도 이렇게나 수다를 떨게 하는 장샤오위안. 아마 그를 만난다면 십년지기처럼 밤새워 얘기를 나눌 것이 틀림없다. 그가 아니라 같은 취미를 가진 누구를 만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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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2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에 끌리는데
아직 장만하지는 못했네요.
책수다란 참으로 재미나겠지요

인삼밭에그아낙네 2015-08-27 14:31   좋아요 0 | URL
책수다야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숙명이자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무질 지음, 김래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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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던가, '신의 증명'과 관련된 내용의 글을 읽었는데 내용 중 '허수(虛數)'가 눈길을 끌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건 수학 문제를 풀 때 '허수'를 등장시키는 것과 같다... 는, 대충 그런 내용인데 하필 직후에 집어든 소설에서 이 '허수'가 등장해서 재미있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어린 퇴를레스('young Torless')에게 닥친 혼란의 기저는 결국 '본질'이라는 개념이다. 퇴를레스는 어느날 예고 없이 기성사회(부모, 사회, 교육...)로부터 물려받은 통념이 의심받고 나아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한다. 계기는 동료 생도가 절도를 하다 들키면서 시작된다.

동료 생도들의 돈을 훔쳐오던 바시니가 퇴를레스 무리 중 한 명인 라이팅에게 발각되는데, 학교 당국에 사실을 알리고 바시니를 퇴학시켜야 한다는 퇴를레스와 달리 라이팅과 바이네베르크는 바시니의 절도를 공론화하는 대신 바시니에게 그들이 직접 좀 더 효과적인 하지만 개인적인 징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주장에 확신도 없는 퇴를레스가 태도를 결정 짓지 못하는 동안 나머지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바시니에게 징벌을 주는데 이를 목격한 퇴를레스는 '가해자를 가해하는' 그들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는 죄와 벌이라는 근원을 향한 환멸로 이어진다.

 

요는, 퇴를레스는 자신이 느끼는 환멸의 정체조차 확신할 수 없어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결책으로 자연과학의 '허수', 철학자 칸트로 위안을 삼고자 하나 이는 일시적인 것일 뿐, 혼란은 오히려 미궁이다.

 

잠깐이나마 퇴를레스에게 혼란을 정리할 열쇠로 등장했던 칸트의 저서는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나 앞뒤 맥락으로 보아 아마 <윤리학 정초>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 짐작이 맞다는 가정 하에, 칸트의 윤리학에서 특기할 것은 '덕(or 선)이란 정언적이어야 한다'는 덕의 조건인데, 정언(定言)적이라는 건 조건이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 칸트에 의하면 하얀거짓말도 거짓말인 것. 과연 이런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정의가 퇴를레스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먼훗날 언젠가 퇴를레스의 뒤통수를 치며 깨달음을 줄 지언정 어쨌든 현재의 퇴를레스에겐 그조차도 또다른 혼란일 뿐이다.

 

'오성'(Understanding, 悟性, Verstand)은 소설 전반에 걸쳐 퇴를레스의 대사와 독백을 통해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인데, 흄의 <오성에 관하여>를 빌려오면 결국 판단의 대상은 '도덕'이며, 판단의 주체를 경험으로 삼을 것인가, 본성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흄 식으로 말하면 logos인가, pathos인가- 쯤 되겠다.

 

퇴를레스는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침묵하겠다'로 일단은 자신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는(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렇게 읽었으나 오독일 수도 있다. 책장에 원서가 있는데 올해 안으로 시간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다.

 

퇴를레스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애써 진한 농담을 해보고 싶었다. 그는 이럴 때 아무 말이나 그냥 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굳어 있는 미소로 자기 위에 있는 거친 얼굴을, 그리고 뜻 모를 두 눈을 응시했다. 그때 바깥 세계는 작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순간 돌멩이를 집어 들었던 그 농촌 총각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가 자기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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