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거의 대부분 서재의 리클라이너 소파에서 읽는다. 책 읽는 시간은 깨어있는 동안 무시로.

대중교통 이용 중에는 책을 거의 못 읽는데 이유는 버스는 멀미가 나서, 지하철은 집중이 흐트러져서.

그렇지만 읽든 안 읽든 외출할 때 책을 늘 챙기는데, 일정 중에 시간의 공백이 생겼을 때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실물이 가진 물성을 격하게 아끼는고로 아직까지는 종이책만 읽는다. 책 한 권을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질감, 페이지를 넘길 때 손끝에 닿는 감각, 장정 등의 만듦새를 사랑한다.

앤 페디먼 식으로 말하면 책에 대한 내 애정은 궁정식 연애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내킬 때 수시로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는 습관 탓에 아직까지는 전자책의 장점에 매력을 못 느낀다.

(자칭)원형보존강박증이 있어 책에 직접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을 때 플래그 포스트잇을 이용하고, 발췌는 메모지나 개인 SNS를 적극 활용.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침대 머리맡은 아니고 책상에 최근 배송 받은 아리시마 다케오 소설 두 권, 뮐러 희곡선/산문선/해제집이 있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현재 4천 권이 넘어섰는데 일단 내 손으로 책장에 꽂은 책은 모두 소장하고 아직까지 책을 판매한 적은 없다. 그래도 심정적 저지선인 5천 권은 안 넘겨야지 한다.

배열 원칙은 대분류는 해외와 국내, 소분류는 전집 - 작가 - 출판사 순으로 책장이 따로 있다..., 따로 있었지만 최근 들어 점점 책장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정리해야되는데 엄두가 안 나서 내버려두는 중.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해문에서 나오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용돈을 받을 때마다 서점으로 뛰어가서 한 권씩 사모았던 탓에 특히 애착이 가는 시리즈. 어린 내게 살인 사건의 동기는 돈 아니면 치정이라는 절대명제를 가르쳐 준 고마운 책, 고마운 작가.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겐지이야기' 만화 원서. 나름 희귀본.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이 왜 전쟁에 참전했는지 꼭 묻고 싶다. 나만의 문학 속 3대 미스테리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10년이 넘도록 '읽어야지'에 머물고 있다. 책은 골동품 수준(이미지 클릭).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아모스 오즈의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1권 20여 페이지를 읽다가 반납.

이유는, 이 책은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영어사전, 가톨릭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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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친과 각자 볼일을 보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 일이 조금 더 일찍 끝나 도서관에 들렀다. 그리고 신착도서 칸에서 발견한 황현산과 배수아의 에세이. 반납기일을 넘겨 대출정지 기간이라 대출은 못하고 일단 동친과 만나 나머지 볼일을 보고 점심도 먹고 동친은 집,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그리고 일몰 직전까지 읽은 두 권.

황현산의 책은 시비평에세이, 배수아의 책은 여행에세이.

 

 

 

먼저, 황현산의『우물에서 하늘보기』

첫번째 목차가 청마 이육사의 '광야'인데, 사실 나는 광야 첫 구절이 해석의 논란에 있는 걸 이 책에서 알았다. 학교에선 배운 기억이 없는데;;;;;

논란이 된 구절은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이중에서도 들렸으랴를 '들렸을리가 없다'는 부정형으로 해석할 것인가, '들렸다'는 감탄형으로 해석할 것인가 주장이 나뉜 것이다.

부연하면, 

 

'들렸을리 없다'(부정형)이면 앞 소절 닭우는 소리는 의미 그대로 '꼬끼오'인 거고,

'들렸다'(감탄형)이면 닭우는 소리는 개벽, 새로운 도래 등의 은유인 거고.

 

라는 것이다.

감탄형으로 해석해야 한다가 뒤에 나온 주장(70년 대 중반)인데, 양쪽 모두 상대를 완전히 설득시킬 의견을 내지 못해 지금까지 결론을 못 내렸다고 한다.

사실 작가는 원고지에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끝낸 것이고 또 그게 맞는데, 이렇게 후대에서 해석의 문제가 불거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작가 스스로 '해제론'을 만들어 어딘가에 보물찾기로 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작품이 오역되면 제일 억울한 건 작가 본인이니까.

읽으면서 가슴 아팠던 목차는「박정만의 투쟁」편.

 

박정만은 1981년 5월 어느 날 그가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던 출판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의 잠적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했지만 무책임한 사람이기도 해서, 우리들의 관심은 또 한 차례의 잠적을 성사시켰을 어느 여성의 정체에 대해 더 많이 쏠렸다. 그러나 여자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동창이기도 한 어느 소설가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로 검은 차를 몰고 온 사나이들에게 끌려갔다는 것도, 이제는 문학인들의 집이 된 남산의 어느 시설에서 내리 사흘 동안 "청동상"처럼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었다. -p. 178

 

박정만은 결국 고문의 후유증을 못 이기고 7년 후 사망한다. 공식사인은 간경화.

내겐 생소한, 이름을 처음 듣는 시인 박정만은 죽음을 앞두고 보름동안 300여 편에 가까운 시작(詩作)을 했다. 유작시를 비롯, 시전집이 있다.

저자는 대안은 역사를 전제로 하는데 역사는 어떤 문제도 해결한 적이 없다.(p.192)라고 말한다.

씁쓸하지만 옳은 얘기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얘기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때그시절엔 술집에서 술 마시다 끌려가고, 집에서 TV보다가 끌려가고, 길가다가 끌려가고 그랬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사촌이 카투사 복무 중에 의문사한 일이 있어(가족이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영안실이었다), 아버지에겐 시대의 일부가 개인사가 된 그때그시절 얘기. 그래도 뭐. 선거가 있을 때마다 6시 땡- 하면 제일 먼저 투표소로 가서 우리가남이가당에 투표하신다.

제목은 잊어버렸고, 어렸을 때 TV에서 본 한국영화인데(흑백 분위기였던 걸로 보아 아주 옛날 영화였던 것 같다), 잘 나가는 교수(?)가 어찌저찌 알게 된 사람- 실은 남파간첩과 술을 마시는데 남파간첩이 "우리 건배합시다"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면서 건배하는 순간 두 사람 뒤로 커튼이 걷히면서 김일성 '존영'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교수는 남파간첩의 덫에 걸린 것이다. 앞뒤 얘기는 기억 안 나고 유독 이 부분만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건 어린 마음에도 '누명 쓰는 거 참 쉽구나' 공포를 느꼈기 때문.

쓰면서 되새겨보니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이 한국영화는 아마 반공정신 고취를 목적으로 한 선전영화였던가 싶다.

지난 3월에 통칭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총선이 일주일여 남았다. 당연히 선거판에 나올 수 있는 온갖 세태가 벌어지고 있다.

히틀러의 유명한 선전관 괴벨스의 명언 몇 가지를 옮겨본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있다.

99가지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대중은 정말 개돼지일까. 먹을거리, 유흥거리만 주면 만족하는 가축일까.

가끔 동친과 하는 얘기인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패착은 친일청산을 못했다는 거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부조리와 비극은 친일청산 실패에서 시작한다.

 

 

 

다음, 배수아의『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비유를 들자면 첫타석 삼진, 둘째타석 삼진인데 셋째타석에서 홈런을 치는 작가가 있다. 작가(or 작품)에 대한 호불호 얘기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로 지금 딱 떠오르는 작가가 정혜윤인데 계속 별로다- 하다가『마술 라디오』에서 홈런을 친 경우로 이후 정혜윤의 신간이 나오면 눈여겨 보게 되었다. 나한테는 그렇다는 얘기. 반면 배수아는 계속해서 타석 삼진. 파울볼도 없고 사구도 없다.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잠자는 남자가 실존인물이긴 할까, 라는 거. 잠자는 남자와 나누는 대화도 마찬가지. 남자도 대화도 지나치게 소설적이라 이런 의문이 남는 것이다. 도중에 책 날개 안쪽의 프로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도, 집에 돌아와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확신을 못하고 있다.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거다. 뭐가? 작가의 글쓰기가. 혹은 글쓰는 스타일이. 혹은 글쓰는 방향성이.

블로그식 글쓰기던가? 아마 그런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인고 하니 개인 SNS에 쓰는,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만의' 글을 의미한다. '스타일리쉬'하다는 건 다른 의미로 개성적이라는 얘기인데, 작가의 글쓰기가 지나치게 '스타일리쉬'하면 독자를 일방적인 청자로 만든다. 작가에겐 발산이고 힐링일지 모르나 독자에겐 타인의 꿈 얘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배수아에 대한 나의 호불호는, 그리하여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진행형이다. 그녀의 글은 소설, 수필, 번역- 장르 가리지 않고 여전히 불편하다. 하물며 그녀는 번역조차도 그녀의 언어로 채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에 그녀가 번역한 책이 꽤 있는 걸 보면(확인하고 심쿵;;;) 그녀의 글에 느끼는 불편함은 내 불호일 뿐, 대중은 그녀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다렸던 혹은 끌렸던 책의 역자가 배수아라 구매를 포기한 경험이 다수 있는 탓에 페소아의 책이 다른 역자의, 그것도 중역이 아닌 완역이 나온 것에 새삼 '다행이다'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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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너 뮐러

 

 

주초에 온라인서점 두 곳에서 하이너 뮐러의 책(산문집 + 작품해제론)을 한 권씩 주문했는데 어제 y서점의 해제론이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이 배송일임에도 아직도 출고 전인 a서점에서 뮐러 희곡선을 추가 주문. 근데 이 책도 다음 주중에나 온다.

당일배송 시대인 요즘 배송이 4, 5일이나 걸리는 걸 보면 보유재고가 없어서 출판사에 주문을 넣은 것 같지만 어쨌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좋긴 하다.

『하이너 뮐러의 연극세계』는 2006년 초판인쇄인데 이런 책은 책이 있을 때, 살 수 있을 때 미리미리 사두는 게 여러모로 정신건강에 좋다. 연극과인간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는데 초판이 소진되면 대부분 증판 없이 절판으로 이어지는 모양새. 이 기회에 여기 책을 싹 주문해버릴까 싶기도 하고.

다음은 <뮐러 산문선>을 배송받은 직후, '필톡테트'를 읽던 도중 M과 통화한 얘기.

 

나: 오디세우스가 영화, 만화, 소설 등으로 재가공되면서 영웅으로 미화돼서 그렇지 사실 원전을 읽어보면 이놈이 진짜 나쁜놈거든

M: …….

나: 아군에겐 지략가이고 능력있는 장수지만 적에겐 교활하고 나쁜놈이지, 비유하자면 조조같달까

M: 오디세우스가 도대체 누군데?

나: 오디세우스 몰라?

M: 처음 듣는다

나: 아킬레우스는 알지

M: 모르는데

나: 트로이 전쟁은 알지? 예전에 영화 봤잖아, 거기 나오는,

M: 아킬레스?

나: 아킬레우스는 모르고 아킬레스는 알고? 

M: (웃음소리)

나: 그래 걔. 여튼 트로이 전쟁 때 아킬레우스 휘하 장수인데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부하들을 데리고 귀향하면서 모험을 겪거든, 오디세우스의 모험이라고 열 개인가 열세 개인가 이게 원전마다 조금씩 다른데, 어쨌든 모험을 겪는데 이 모험이 유명해

M: 혹시 율리시즈 얘기?

나: 관두자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얘기를 접었다는 엔딩. 율리시즈는 오디세우스의 영어(라틴)식 이름.

이렇게 쓰니 M이 바보같지만 그래봬도 IQ156의 멘사회원이다. 수학은 수업만 듣고도 만점 받는 이과형 천재인데 단지 책만 안 읽을 뿐. 이분은 온라인 게시판 글도 세 줄 넘어가면 안 읽는다.

 

 

:: 다 이유가 있다

 

고전은, 고전인 이유가 있다.

 

- 반값리스트에 계속 있을 땐 심드렁- 안 사놓고선 정가는커녕 절판되어 이제 살 수도 없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저 운다.

 

- 미하일 바흐친의 책을 읽고 싶은데, 하나같이 품절/절판이다. 아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제목과 껍데기만 바꾼 자기계발서는 허구헌날 나오더구만. 이럴 땐 정말이지 몇 개 국어하는 언어천재들이 재벌할배보다 세계제일미인보다 백만배 부럽다.

 

- 구도소설, 계몽소설을 읽고 감동하기엔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나보다.

오랜만에 톨스토이의『부활』을 재독하고 있는데 청소년소설을 읽는 기분. 책장도 술술술- 얼마나 잘 넘어가는지, 오히려 어렸을 땐 가슴을 부여잡고 읽었던 것 같은데. 참고로, 이건 이 소설이 가볍다는 것과 다른 얘기. 대가의 소설은 대가의 소설이다. 단지, 소설이 너무 착하다는 것뿐... 그뿐.

근데 우스운 건『부활』을 읽는데 자꾸만 도끼 소설이 땡긴다는 거. 케잌을 먹으면 라면이 땡기는 기분이랄까. 내용 중에 까쮸샤(열린책들) 가 투르게네프의 '정적'을 읽는 대목이 있는데 수정전 초판본에선 도끼의 '죄와벌'이었다고 하니, 내 증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안나 카레니나』이후 20년 공백이 이 위대한 작가를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만들어버렸다.

 

 

::: 재미가 없다

 

이건 드라마 태양의후예 잡담.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재미를 상중하로 나누면 중? 인심 쓰면 중상? 뭐 하여튼.

시청률이 40%에 육박하고, 유대위 신드롬에, 여자들은 송중기/유대위 앓이를 하고, "-지 말입니다"가 유행어가 됐다는데, 왜 난 여기에 끼지를 못하는 거냐고.

주초에 태양의 후예를 정주행하기 직전,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 신드롬이라는 이 드라마를 보고도 재미가 없거나 가슴이 안 뛰면 난 진짜 드라마고자가 된 거라고.

나 이제 어떡하냐. 그동안 드라마를 너무 오래 끊었나봐. 가슴이 안 뛰어. 몰입이 안 돼. 감정이입도 안 돼.ㅠㅠ

어린시절 셰익스피어를 줄줄 외우던 다윈이 칠순이 되어 더이상 셰익스피어에게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심정이 이랬을까. 난 심지어 칠순이 되려면 아직 하아안~참 멀었다고.

그나저나 난 왜 자꾸 강선생이 울면 같이 울고 있는 걸까...???

 

11,12회를 본 소감.

- 쓰리스타가 분명 작전 시간으로 3시간 준다고 했는데 강선생 구하기에 걸린 시간은 3시간이 훌쩍 넘겠던데? 쓰리스타가 그 3시간 동안 유대위는 알파팀 아니랬는데 작전은 알파팀이 하던데? 아, 궁금해, 실종된 3시간.

- 대한민국 군인은 싸구려 불량 군장을 쓴다던데(방수/방진/방탄 안됨 feat.공중파뉴스) 특전대는 다행히 좋은 군장을 쓰나 보구나. 총에 맞아도 끄떡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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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내가 M에게 "배트맨과 슈퍼맨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물으면서 배트맨의 딜레마에 대해 얘기했더니 M이 그 얘기 예전에도 했다는 거다. 내겐 반복할 정도로 재미있는 주제였던 모양이다.

"누가 이길까?" 에 대한 M의 대답은, "그게 말이 되나."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났는데 집에 돌아와 뒤늦게 궁금하다.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당시엔 외계인과 지구인의 싸움이니 당연히 외계인이 이긴다는 얘기겠거니, 지레 이해하고 더 묻지 않았는데 나의 '이해'는 결국 '나의' 이해였던 것.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야 되는 건데 아, 궁금궁금...;

 

슈퍼맨은 지구보다 문명이 발달한 크립토 행성의 크립토니안으로 실상 외계인이다. 당연히 지구인인 배트맨이 이길리가 만무...... 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지구에서 클락을 괴롭혔던 악당들이 과학자, 사업가, 괴짜 돌연변이 등이었던 걸 상기하면 썩 일방적인 싸움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영화에서 배트맨을 부추겨 슈퍼맨과 싸움을 붙이는 인물이 클락과 악연 중의 악연인 렉스 루터라고 하니 여기서부터 클락이 이미 핸디캡을 지고 들어가는 대결이라 결과는 쉽게 장담 못 할 듯.

작년 여름 코믹콘에서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이 공개된 이후 두 영웅의 대결이 계속 화제였는데 제작사 발표에 의하면 영화가 거의 완성됐다고 하니 예정대로 올 3월에 극장에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워낙 소문난 잔치라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먹을 거 없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는 옵션.)

 

 

 

웨인 파이낸셜 빌딩 잔해 위에 선 브루스 웨인

 

 

 

배트맨의 딜레마

  

 출판사가 그린비가 아니었으면 안 읽었을『배트맨과 철학』은 애초에 제목에서 느꼈던 '기획의 냄새'는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였고, 나중에 재독하고 싶을 만큼 내용이 알차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전반에 걸쳐 배트맨의 딜레마를 다루는데, 특히 인상적인 내용은 '살인하지 않는 배트맨의 딜레마'를 다룬 대목.

 

배트맨은 자신의 의무는 범죄자를 법의 안마당에 데려다 놓는 것까지라고 생각하며 범죄자를 심판하는 건 법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뛰는 공권력 위에 나는 범죄자인지라 잡아다 주면 탈옥하고, 잡아다 주면 탈옥하는 범죄자로 인하여 고담시는 여전히 범죄, 악당, 부패의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배트맨은 범죄자를 포획하는 과정은 자신의 영역이지만 범죄자의 심판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라고, 자신의 역할에 선을 긋는데 이러한 배트맨의 윤리의식의 가장 큰 피해자는 고담시민, 그리고 그의 조수격인 로빈이다. 배트맨에겐 두 명의 로빈이 있었는데 한 명은 예의 탈옥한 범죄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다음 로빈 역시 범죄자의 복수 놀이에 희생양이 된다. 두 로빈이 멀쩡했다면 그리하여 고담시에서 펼쳤을 정의와 선의 실현을 가정한다면, 이는 결국 고담시민의 악운이며 배트맨은 범죄방조와 살인방조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제일 나쁜 건 무능한 공권력이지만 이건 이미 기성의 질서 즉 현실이므로 그 질서에서 벗어난 박쥐 가면을 쓴 배트맨에게 개인의 윤리를 넘어선 공리주의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요구가 당연한가 하면 그건 또 아니올시다 인데, 배트맨의 정체는 고담시 경제의 절반이 넘는 부를 소유한 고담 시민 '브루스 웨인'으로 브루스는 자연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성 질서의 바깥에 배트맨이 있다면 안쪽에 브루스 웨인이 있는 형국. 결국 배트맨의 딜레마는 개인의 윤리와 공인의 윤리 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배트맨은 범죄자를 포획하고, 브루스 웨인은 범죄자를 공권력에 인도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 시리즈를 '비긴즈'로 이야기를 회귀시킨 건 브루스 웨인의 성장담을 안배한 긴 안목의 기획이 아니었나 뒤늦은 추측도 할 수 있다. 아마도 프로이트라면 브루스 웨인이 아버지의 죽음에 간적접으로 관여했다는 죄책감, 그러니까 서양인의 뿌리깊은 원죄 의식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또다른 변형이 브루스 웨인으로 하여금 살인하지 않는 배트맨을 만들어냈다고 해석하지 않았을까.

 

한때 설왕설래 했던 마블&DC 히어로 중 최고 갑부는 스타크 인더스트리 CEO인 토니 스타크로 추정 소유 재산이 토니 1000억 달러라고 한다. 내가 놀란 건 2위 브루스 웨인. 역시 추정재산 800억 달러 수준이라는데, 브루스 웨인이 이렇게 부자인 줄 난 정말 몰랐네. 참고로 이번에 두 영웅을 싸움 붙이는 렉스 루터는 자산가 히어로들 사이에서 47억 달러로 당당히 4위를 기록했다.

 

 

뭔가 다크다크 흑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배트맨

 

 

<배트맨 v 슈퍼맨>에서 브루스 웨인을 연기하는 배우가 영화 <데어 데블>의 벤 애플렉이다. 보통 히어로 배우는 겹치기 출연을 안 하는 걸로 아는데 미드 <데어 데블>이 올 3월에 시즌 2 방영 예정이고, 14년에 종영되기 직전까지 인기 코믹스였는데 왜 하필 벤 애플렉일까. '배트맨'과 '슈퍼맨' 모두 마블의 히어로이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벤 애플렉이 역을 맡은 것 같지는 않고.

클락 켄트는 <맨 프롬 엉클>의 또라이 CIA 요원인 헨리 카빌이 연기한다. 헨리 카빌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참 고전적인 프로필이 돋보이는 배우.

 

하나 더. <배트맨 V 슈퍼맨>의 V가 궁금한 건 나뿐인지. versus의 'VS' 가인 아닌 'V'다. 역시 배트맨과 슈퍼맨은 대결하지 않는 걸까.

이쯤되니 다시 궁금해진다. M의 "배트맨과 슈퍼맨이 싸우는 게 말이 되나." 의 의미가 뭔지.

 

 

 

* 영화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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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지 책장을 아무리 뒤져도 마루야마 겐지의『소설가의 각오』가 안 보인다. 결국 내 기억을 의심하며 '살까 말까 고민만 하다 안 샀나봐' 포기했는데 직후에 책을 찾았다. 웬 숨바꼭질이냐 싶지만 사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갑자기 예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손바닥 소설』이 읽고 싶은 갈증이 확 일었는데 이 갈증이 마루야마 겐지에게로 번졌다. 결국 두 작가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이중 마루야마 겐지는 품절, 절판된 책이 있어 동친에게 투덜투덜 하던 중에 화제가 하루키로 확장됐다.

하루키가 화제에 오를 때 대개 내 어투는 부정적인데 고백하자면 자연인 하루키에겐 아무 유감 없다. 오히려 살짝 호감이다. 작가 하루키가 취향이 아닐 뿐 내 부정적인 논조는 순전히 국내 하루키 열풍에 국한된다.

 

여하튼 하루키와 관련하여 국내 출판사의 비정상적인 인세 계약을 비난하던 중에 동친이 불쑥 "난 일본소설에 열광하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 한다.
직전에 일본소설 십여 권을 주문한 입장에서 동친에게 거듭 강조했지만 일본작가에 대한 내 호불호는 50년代 출생을 전후해 갈린다. 간단하게 50년 이전 출생 작가는 호, 50년 이후 출생 작가는 불호인데, 마찬가지로 나오키 수상작은 거의 관심 없는 반면 아쿠타가와 수상작은 선호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43년 생이며,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였으나(23살 때 수상) 2004년에 스무 살 와타야 리사가『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수상하면서 최연소 기록은 깨어진다. 뱀발이지만 개인적으로 아쿠타가와상에 대해 가졌던 신뢰가 처음으로 위협받았던 것도 이때였다. 실제로 이후 시들해지기도 했고.

재미있는 우연은 마치 경쟁하듯 이듬해인 2005년 국내에서도 모일간지 주최 문학상 최연소 수상자가 나왔는데 바로 김애란이다. 그녀는 그해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데뷔한다. 재미없는 우연은 두 작가의 소설을 읽은 내 감상이 대동소이하다는 거.

 

 아쿠타가와상 하니, 생각난 김에 검색해본 히라노 게이치로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첫 소설로 23살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는데 와타야 리사와 달리 그의 경우는 '신동'이라는 찬사와 함께 일으킨 열풍이 수긍이 간달까. 당시 내 나이가 어린 탓도 있겠지만 특히『달』을 읽고 난 직후 느꼈던 서늘함과 기괴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김난주, 문학동네

 

십구 년 전, 타인이 쓴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내가 팔리는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를 알고 싶어 읽은 적이 있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고 비평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아예 비평 대상이 될 수 없는 엉터리들이었다. 읽자니 눈이 썩어들어갈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정말 이런 소설을 좋아한단 말인가,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니 내가 쓴 소설이 팔릴 까닭이 없지'라고 깨달은 나는, 이후 그 문제에 대해 거리낌없는 기분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나는 내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독자들이 내 책을 사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또는 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데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 읽지 못한 독자들이 사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런 바람뿐이다. (pp. 286-287)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을 읽다 보면 '김훈스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문 구석구석에 밥벌이하는 지겨움이 잔뜩 배어있기 때문인데, 마루야마든 김훈이든 글쓰기는 밥벌이를 의미한다. 먹고 살아야 하는 지겨움, 먹고 살기 위해 써야 하는 지겨움, 이젠 먹고 살만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글쓰기의 지겨움.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두 작가 모두 연필로 꾹꾹 눌러 쓰는 곡진함이 행간마다 가득하다. 문학이 작가에겐 먹고사니즘의 수단이고, 독자에겐 취미생활이라니 작가에겐 불행인지 모르나 독자로선 어쨌든 다행한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 라는 건 용돈을 버는 수준이 아닌 말그대로 빵 한 조각을 살 돈을 위해 글을 쓴다는 의미로 발자크가 그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필립 k.딕이 그랬다. 덕분에 우리는 시대를 가로질러 그들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것이고.


왜 소설가가 되었는가 보다 왜 소설을 쓰고 있는가를 얘기하고 싶어하는 마루야마 겐지는 400자 원고지 백 매면 얼마, 2쇄 증판하면 얼마를 늘 계산하고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나 끊임없이 투덜거리지만 문학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유년 때부터 그의 삶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과거의 추억을 통해 스스로 간증한다.

산문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 이 양반이 작가가 된 건 우연인가, 고개를 갸웃하지만 결국 필연이구나 하는 부분이 이런 지점이다.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글쟁이가 될 수 없는 것. 이제 그만 쓸 테다! 외치는 다음 순간 뭘 쓸까 고민하는 것.

문학을 한다는 행위는 결국 그런 거다. 시지프스처럼 일생을 문학이라는 신기루의 산 위로 원고지라는 돌을 굴리는 것. 뭐, 독서가 더 이상 취미가 아니게 되거나 지구상에 나무가 사라지거나 하면 글쟁이를 그만 두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음. 이북이라는 대체제가 있으니 나무 이야기는 이제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을 읽을 땐 못 느꼈는데 산문은 묘하게 김훈과 장정일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니 안 좋아할 수가 없다. 작가가 자기글에서조차 고상할 필요는 없다. 작가가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하는 건 소설만으로도 충분하다.


안 산 줄 알고 낙담했다가 뒤늦게 책을 찾은 김에 잠깐 읽었는데 짧은 독서가 주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나중에 제대로 다시 정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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