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네 인생의 이야기」

이 소설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시간을 보는 관점, 시간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얘기한다.

 

1. 인과론적 해석 vs 목적론적 해석

하나의 결과물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심리학은 보통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해석과 아들러의 목적론적 해석인데, 인과론적 해석은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로 이어진다고 보고, 목적론적 해석은 현재의 목적이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관점이다.

  

2. 표의 문자 vs 표음 문자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관점을 바꾼다는 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소설이 설정한 '시간'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학에 대해 약간의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류의 언어는 표의문자표음문자로 대변된다.

 

어느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7足(헵타포드) 생물 외계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즈가 호출된다. 루이즈는 거대한 거울로 묘사되는 체경을 통해 헵타포드와 대화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문자는 말하자면 표의문자에 가깝다. 인류가 현재 사용하는 문자체계는 알다시피 음성에 기반한 음성+기호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다.

표의문자는 표식, 그림과 같이 직관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자로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듯 하다.

흔히 드는 예가 교통표지판인데 붉은 원 안에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는 표식을 봤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진입금지'라고 해석한다. 기호를 보는 순간 뇌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읽는 과정 없이 바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같은 기호를 글자(인류 언어)로 표현해보자. 짧게는 '진입금지'부터 길게는 '여기서부터는 차량통행을 금지합니다'까지 표현할 수 있다.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이 의사소통에 있다고 할 때 그냥 단순비교로도 인간의 표의문자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고 낭비로 보인다. 

  

3. 사피어-워프 이론 vs 페르마 이론

헵타포드와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를 구분했다면 다음 단계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개의 이론인 사피어-워프 이론과 페르마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사피어-워프 이론 -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

페르마의 최적화 이론 -  빛이 표면에 도착하는 최단 거리

 

이 두 이론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처음과 끝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이다.

 

4. 언어와 인지

마지막으로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류의 언어의 차이를 보자.

 

헵타포드의 언어 - 동시적 체계, 목적론적 해석

인류의 언어 - 선형적/순차적 체계, 인과론적 해석

 

언어학자인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게 되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기존에 갖고 있던 인류의 시간 개념이 깨어지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는다(사피어-워프 이론). 즉 과거-현재-미래를 순차적으로 나열하여 해석하는 선형적 체계,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에 이른다는 인과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헵타포드의 동시적, 목적론적 사고 체계를 체득하게 되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게 되면서 루이즈에게 시제(時制)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루이즈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인류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시제(時制)의 틀 안에서 운용된다. 즉 '읽었다(과) - 읽는다(현) - 읽을 것이다(미)'로 이어지는데 이와 달리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 덩어리 즉 동시적(同時的)으로 기능한다. 즉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과정 전체가 하나의 결과=목적이기(페르마 이론) 때문에 헵타포드의 사고 체계에서 시간은 연쇄적,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의미도 없다. 이것을 페르마 원리에 빗대면, 빛이 대기를 통과해 표면에 닿는 최단 거리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굴절 등의 우연적인 요소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특정 목표지점에 도착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최단 거리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소설에선 '목표는 이미 결정되었으며 남는 것은 최소와 최대라는 목적 뿐'이라고 표현한다(이 내용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므로 페이지 표기는 생략합니다).

 

5. 결정론적 세계관

여기까지 전개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흔한 말로 '운명론적 태도'로 이미 결정지어진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태도인데, 여담이지만 이쯤 이르면 뉴턴의 역학이론에서 출발해 아인슈타인 - 하이젠베르크 - 슈뢰딩거를 거쳐 다시 뉴턴인가 싶은 약간의 논리적인 비약의 유혹도 살짝 생긴다. 

 

궁금한 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과연 낙관적, 긍정적인 태도로 볼 것인가인데, 일단 소설은 '인과적 해석'에서 '목적론적 해석'으로의 시간 패러다임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일생을 시작(탄생)과 끝(죽음)으로 연결된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적으로 관조하는 루이즈의 변화는 비극이 예정된 미래를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기실 이러한 관점이 긴 생애 동안 마주치게 될 비극을 받아들이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면 갈등도 고민도 없다.

 

6. '세월의 책'

소설은 미래를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식인 인과론적 태도와 목적론적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의 책'을 등장시킨다. 한 여자의 생애가 기록된 '세월의 책'이 있다. 여자는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 그녀가 하게 될 일을 미리 읽어본다. 그리고 그 날이 왔을 때, 그녀는 책에 적힌 대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유의지'이다.

이 딜레마가 재미있는 건 행동을 해도, 안 해도 이미 그녀의 자유의지는 박탈당했다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가 기본 상수로 이미 지정되었기 때문에 이후 그녀의 행동은 그 상수에 따른 결과일 뿐이고, 때문에 자유의지는 박탈되었다는 해석이 재미있다.

결론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려면 '세월의 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면 '세월의 책'을 읽지 않던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건 그 순간이 왔을 때 어떤 행동을 해도 or 안 해도 이미 자유의지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말하자면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이 50년인 걸 알며 그 책의 결말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당연하다). 루이즈는 남편과 이혼할 것이고 이후에 딸이 산악 등반 중 추락으로 사망할 것을 안다. 하지만 루이즈는 이미 자신이 봤던 그 미래의 길을 간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고 동시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터득한 루이즈에게 시간은 이제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미래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인데 루이즈에겐 그 미래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이미 일어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듯 이미 알고 있는 미래도 의미가 달라진다. 미래를 아는 루이즈에겐 이혼도 딸을 잃는 것도 자신의 전 생애가 씌어진 50년 인생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루이즈에게 의미를 갖는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7. 미래가 갖는 의미 

숙명은 뒤에서 다가오고, 운명은 앞에서 다가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숙명은 피할 수 없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선 굉장히 결정론적인 이야기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지만 바꿀 수 없고, 그리하여 정해진 미래로 간다는 것이니까.

여기서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

a. 미래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인가, 아직 내가 모르는 시간인가.

b.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것은 미래인가 아닌가.

c. b가 미래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兩義的)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와 헵타포드들의 조상들이 처음으로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는 양 종족 모두 동일한 물질 세계를 지각했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궁극적인 세계관의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에 비해, 헵타포드들은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지각한다. 헵타포드들은 모든 사건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pp.188-189)

 

놀라운 점은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과 언어학의 개념을 황새 다리 쫓는 뱁새 심정으로 쫓아가던 와중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 정확하게는 조금 앞 부분의 '그릇을 사는 장면'을 읽으면서부터 고개를 갸웃(진짜 갸웃- 했다)하다 다시 지나간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가며 내용 전개 상의 시점을 재확인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어? 뭔가 좀 이상한데... 오독했나... 근데 아닌 것 같아... 어, 진짠가? 아닌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세 번째 읽었을 때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순차적 시점으로 책 속 사건의 흐름을 의심 없이 쫓아갔던 것이다.

 

사족이지만 재미있는 점은, 스스로 좀 놀라운 깨달음이기도 한데, 나는 무의식 중에 루이즈에게 일어난 비극이 과거이길 바랐다는 점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다시 앞 부분을 뒤적거린 데는 그러한 바람이 컸다. 나는 이미 일어난 비극은 덜 슬프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을 사고로 잃은 개인사가 이미 발생한 과거이면 루이즈의 개인적 고통이 덜어지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앞서 액자식으로 등장했던 루이즈의 개인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라는 엔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울러 이 저항심이 정확한 시제를 확인하고자 책을 여러 번 읽게 했던 동기이기도 하다.

 

 

8. 컨택트(원제: Arrival) by 드니 빌뵈브

 

 

국내에 들어오면서 현지 제목 'Arrival'이 'Contact'가 되었다. 영화의 주제와 크게 동떨어진 제목은 아니다. 제목을 고른 센스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굳이?' 하는 의문은 남는다.

 

책과 달리, 당연한가?, 상대적으로 영화는 헐리우드 상업영화의 키워드를 곳곳에 배치한 점이 많이 아쉽다. 이들 키워드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소영웅주의'인데 이를 위해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언어가 안 통하는 외계인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중국과 그에 동조하는 몇몇 국가들, 우주전쟁 카운트 직전 헵타포드의 언어를 완전히 깨우치면서 미래를 미리 본 루이즈가 직통전화로 중국의 수장을 설득하고 우주전쟁을 막는 것,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 목적은 3천 년 뒤 루이즈로 인한 도움을 받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 것 등등... 상업영화 마인드에 충실한 사족은 개연성을 떠나 그냥 좀 많이 오글거렸다.

 

SF소설을 영화화할 때 역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텍스트로는 부족한 상상의 빈 부분을 영상으로 확인한다는 것일 텐데, 이 작품의 경우는 이를 테면 헵타포드A와 헵타포드B로 정의되는 헵타포드들의 언어 - 글자가 그에 해당한다. 그것이 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하나의 원이 분화? 변이? 등등의 형태로 '± 나선' 구성인가 막연히 상상만 했던 것을 작가와 관련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영상으로 구현한 장면을 확인하는 건 책에서 얻을 수 없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아래 이미지 참고)

 

 

루이즈가 들고 있는 판넬의 이미지가 헵타포드의 언어다. 

 

대개 원작을 시나리오화 할 때 원작자의 자문을 받기 마련이고 <컨택트> 역시 작가가 자문을 하였으니만큼 작가의 의도가 왜곡될 리도 만무하다. 책이 은유와 암시를 반전의 묘미로 활용했다면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착각할만한) 효과로 루이즈가 미래를 보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건 루이즈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앞서 얘기한 '소영웅주의'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부분이다. 미래를 본 루이즈가 중국의 수장을 설득해 우주전쟁을 막는다니... 아, 이건 몇 번을 떠올려도 오글거린다.

 

쉽지 않은 내용이다. 머리는 이해하는데 적응이 안 될달까. 지구는 둥글다고 했을 때 16세기 이탈리아인들의 인지부조화가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시간을 시제(時制)와 무관하게 총합의 결과물로만 인지하는 이러한 태도가 정말 낙관적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알아도 그닥 쓸 데는 없지만 그래도 궁금한 의문.

- 봉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 루이즈와 대화를 나누는 헵타포드 둘의 이름이 원작과 다르다. 왜?

- 원작이 있을 경우, 원작 - 영화 순으로 감상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다면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

 

 

* 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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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해피엔딩 - 황경신 연애소설
황경신 지음, 허정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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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구성:

1부 덜 사랑하는 자

2부 더 사랑하는 자

3부 모두에게 해피엔딩

 

 

예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와 비의 엇갈린 연애가 안타까워서 애닳아하고 그것도 모자라 책을 덮은 뒤에도 이런 찜찜한 연애소설이라니, 괜히 읽었다는 후유증이 오래 갔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책장을 훑다가 문득 눈에 띄어서 다시 읽은 이 소설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당황스럽다. 나와 에이와 비의 얘기는 더 이상 애틋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기 때문. 변한 게 있다면 아마 나일 거다. 정확히는 내 감성이 변한 것일 테다. 나이 들어 어릴 적 첫사랑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이 소설보다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첫사랑 연애담이 이 소설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재미있으리라는 거.

 

중/고생 때 등교하지 않는 날은 집에서 케이블 채널의 영화를 보곤 했다. 그 중에 <풋사랑>이라는 한국영화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1년 개봉작인데 출연자가 무려 나훈아, 문희, 노주현 되시겠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어떠한가 하니..., 여주가 남주1도 좋고 남주2도 좋고, 결국 두 남자 중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없어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린다는 여주 멘붕 스토리. 천지 구분 못하던 시기임을 감안해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결말이지만 그래도 풋사랑의 '풋'이 어떤 의미인지 어린 나이에도 개념 공부는 됐다.

 

갑자기 왜 거의 반 세기 전의 영화를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 <풋사랑>의 연애소설 버전이『모두가 해피엔딩』이기 때문. 재미있는 건,『모두가 해피엔딩』을 몇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영화 <풋사랑>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는 거다. 그러니 변한 건 '나'다.


『모두가 해피엔딩』은 소제목을 길라잡이로 진행된다. 얜 너무 좋아서 못 가지겠고, 쟨 덜 좋아서 못 가지겠고, 에라 모르겠다 너(3의 인물)하고 놀아야겠다. 그럼 모두가 해피엔딩이지?... 가 줄거리.

 

우정이냐 사랑이냐,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황경신의 글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전형적인 십대 소녀감성인데, 그래서 이 소설은 연애소설 보다는 감성소설로 읽으면 차라리 속편하다.

정통소설이라기엔 글의 밀도가 약하고 오히려 장문의 아포리즘을 읽는 기분에 가까운데 이건 소설과 에세이를 경계 없이 쓰는 황경신의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분명 소설인데 고백에세이와 차이가 안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실상 노희경의 에세이『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몇몇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면 그거랑 이거랑 뭐가 달라? 싶기도 하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좀 고지식한 데가 있어 장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작가의 애매모호한 글쓰기 방식은 좀처럼 응원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황경신의 글이 전반적으로 이런 형식을 고수하니 결국 황경신과 내가 맞지 않는 거다.

그럼 연애소설의 예를 들어봐라, 한다면 아마 드라마 작가 노희경 때문인가 싶지만 지금 막 떠오르는 건 김수현의『겨울로 가는 마차』. 이거 수애 주연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면 배우도 작가도 시청률도 대박날 텐데...는 아묻따 내 생각.

 

뭐 어쨌든,

영화 <풋사랑>은 결말이 공감은 안 가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주에게 동정적이기라도 했다면『모두가 해피엔딩』은 연애를 장기판으로 보고 에이와 비와 예술가를 장기말로 부리는 여주를 보는 기분이라 뒷맛이 영 찜찜하다. 마지막의 '모두가 해피엔딩이지' 하는 여주의 독백도 실상 여주에게만 해피엔딩일 뿐 그녀의 연애스토리에 들러리가 된 세 남자는 무슨 죄인가 싶다. 첫 독서 때 내 감성이 그토록 자극 받았던 건 아마 여주에 빙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해본다. 무려 세 남자에게서 사랑받는 여자라니, 게다가 세 남자 모두 여전히 선택지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결말이라니 한마디로 '여주만 좋지 아니한가' 결말인 거지. 

 

이 소설을 재독하기 전에 황경신의 신간 서너 권을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장바구니에서 뺐다. 그중『국경의 도서관』은 내 책장에 있는『초콜릿 우체국』의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하니 조금 더 고민하고 장바구니에서 삭제했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걸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껏 변치않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안 읽히는 글은 안 읽는다라서.

최근 몇 년은 내 감성이 좀 심하게 메마른 사막이라 가끔 오아시스처럼 사막에 습기를 뿌려줄 감성충만한 글이 필요해- 위기의식을 느낄 때는 이런 류의 소설을 막 쓸어담는데 이번은 적절한 때에 브레이크가 걸린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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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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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읽게 되면 대개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오스카와 사랑에 빠지던가, 오스카 그게 뭐? 하던가.

동성 스캔들로 2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서 연인 더글러스에게 쓴 서간문『심연으로부터』의 첫 페이지를 열 때, 내게 오스카 와일드는 그저 <행복한 왕자>를 쓴 동화작가였으나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이런 첫인상은 완전히 전복된다. 이토록 예민하고 감성충만하며 나르시시즘 덩어리인 작가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이 '좋아해'는 좀 복합적인 감정이어서 '좋아서 미치겠어'가 아니라 연민, 동정, 호감, 비호감 등등을 단서로 달고있는 '좋아해'다.

 

육체적 죽음이든, 사회적 매장이든 작가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이 스러지는 현장이기 때문.

 

 

문학은 언제나 삶을 앞지르지.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빚는 거야. - p.9

 

책을 읽다 보면 유미주의자이며 자타공인 나르시시스트였던 그가 현실의 삶과 문학 속 삶을 혼동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드문 일은 아니지만 오스카의 경우는 불행히도 혼동에서 나아가 현실의 삶이 가상의 세계에 매몰되어 현실 세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재능에 대한 대가랄까, 피그말리온의 비극은 예술가들의 숙명인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오스카의 생애 마지막 5년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문학적이다. 사랑과 배신과 용서와 우정으로 점철된 마지막 시기는 참으로 드라마틱해서 그러한 불행조차도 오스카가 스스로 조탁한 문학의 한 방식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

  

 

어느 날, 와일드의 어머니의 친구였던 애나 드 브레몽 백작 부인이 그에게 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지 묻자(그녀는 전날 그를 모른체 했던 것을 미안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미 글로 쓸 수 있는 것을 다 썼습니다. 나는 삶이 무너지는 의미를 모를 때 글을 썼지요. 이젠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p.32)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일화인데, 이는 오스카 스스로 자신의 작가적 생명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장면이기 때문.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스스로 사망 선고를 내린 오스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예술가인 자신이 예술가의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인간을 포함해 지상의 모든 것 위에 존재했던 예술이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것들과 섞이자 단 한 줄도 못 쓰게 된 것이다.

예술은 대중의 사랑을 자양분으로 삼는데 애초에 사랑을 못 받았으면 모를까 성공의 가장 정점에서 추문과 함께 끌어내려진 오스카는 아마 실형을 받고 레딩 감옥에 입소할 때까지도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기소 전과 선고 직후 해외로 달아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거부했던 것일 거고.

아주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시각으로, 문학적 틀 안에서, 문학적인 삶을 지향했던 오스카는 감옥에서 그 어떤 것보다 냉엄하고 엄혹한 현실과 직면했을 것이고 그 경험은 오스카를 비로소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에 발 딛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지상에 발을 딛은 그는 더 이상 예술의 허구를 끌어안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가짜가 진짜의 흉내를 더 잘 내는 법이다.

그리하여 2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때 작가 오스카는 이미 인간 오스카가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스카는 자신이 다시 작가로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레딩 교도소장의 예언보다 조금 더 살긴 했지만 불과 3년을 못 넘기고 사망한다. 그의 육체적 사망을 연장했던 것도, 앞당겼던 것도 아마 소설에 대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사소한 일이나 큰일 같은 건 없어. 모든 게 다 똑같은 가치와 똑같은 크기로 이루어졌지. 모든 것에서 당신에게 굴복하는 내 습관ㅡ 처음에는 대부분 무관심에서 비롯된ㅡ은 서서히 진정한 내 본성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 거야. 내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습관은 나의 기질을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한 가지 성격으로 고착시키고 만 거라고. (p.56)

 

'Dear Bosie'로 시작하는 옥중 서간『심연으로부터』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장렬한 구애이며, 로비(로버트 로스)를 통해 전하게 한 건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라는 장정일의 해석에 동의하기 힘든 것은, 오스카가 더글러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 때문이다. 오스카는 언제나 더글러스를 내려다 봤다.

연민은, 츠바이크에 의하면 양날의 검이다. 오스카는 악덕, 위악, 경박, 천박, 즉물성으로 다져진 더글러스의 모든 단점을 제법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것을 연민하고 때로 동정하며 가련한 한 인생을 자신이 구원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감히 자신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신의 흉내를 냈던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가 거듭 말하는 것처럼 그는 실제로 더글러스에 대해 더글라스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스카의 통렬한 자기순애보적 고백, 자기참회는 동성 스캔들로 인해 야기된 현실적인 문제보다 왜 삶은 문학을 모방할 수 없는가를 향한 비탄으로 읽힌다.

오스카는 무신론자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가톨릭 영세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그의 회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진 건 사후였다.

 

신들은 참 이상해. 우리를 벌줄 때 우리의 악덕을 그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파멸로 이끄니 말이야. - p.80

 

난 이제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뿐 아니라 자신의 선행 때문에도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 나는 그러는 것이 정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어. -p145-146

 

11장은 이전 장에 비해 오스카의 종교적인 태도가 뚜렷해진 차이가 확실히 느껴진다.

 

 

"당신은 이야기를 눈으로 듣는군요. 그래서 당신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나르키소스가 죽자, 들판의 꽃들은 몹시 슬퍼하면서 강물에게 그를 애도하기 위한 물방울을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러자 강물은 이렇게 대답했죠. '그럴 수 없어요. 내 물방울들이 모두 눈물이 된다면 내가 나르키소스를 애도하는 데 필요한 물이 부족해질 거예요. 난 그를 사랑했어요.' 그러자 들판의 꽃들이 말했어요. '오! 어떻게 나르키소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을 말이에요.' '그가 아름다웠나요?' 강물이 물었어요. '누가 그걸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겠을까요? 그는 매일 당신의 기슭에서 몸을 숙여 당신 물속에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보았는걸요…….'"

와일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러자 강물이 대답했어요.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일 때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와일드는 야릇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덧붙였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제자」입니다."

 

-pp.251-252,「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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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보관함에 담은 6-7월 신간.

요즘 책을 구매하는 패턴은 M&M's 지퍼백에서 손에 걸리는대로 골라 먹는 식의, '보관함 picker'에 빙의 중. 한마디로 구매 우선 순위가 없다. 출판사 이벤트에 휩쓸릴 때도 있고, 아무 전조 없이 한참 뒷페이지 보관함의 책을 장바구니에 옮길 때도 있고.

 

 

워크룸프레스의 사뮈엘 베케트 선집으로 '장편'과 '단편집'.

가지고 있는 책과 목록이 겹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워크룸프레스가 이 시리즈에 비소설 산문도 포함했는지 궁금하다. 산문이 나오면 바로 구매각.

'선집', '전집' 등의 타이틀이 붙으면 반드시 꼭 사야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이래저래 전작주의자는 피곤.

 

 

 

보르헤스의 신간『꿈 이야기』『상상동물 이야기』

남미 환상문학 작가를 향한 내 선호는 보르헤스 >>> 마르께스.

이쯤이면 보르헤스 전집이 한번 나와줘도 좋을 텐데, 늘 목마르게 기다리는 소식.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사 트릴로지 중 3부『딕타토르』

신간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일순 흠칫.

나 좀 모자란가봐- 했던 것이, 트릴로지이니 당연히 3부작인데 1, 2부를 구입하고선 관심을 끊었다는 거다. 우연히 발견 못했더라면 책장에 책 두 권 꽂아두고 내내 "로마사 트릴로지가 조기 있넹" 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년 1월에 시즌2 방영 예정인 동명 미드의 원작『익스팬스 1,2』

로커스상 수상, 휴고상 최종 노미네이트작. 덕분에 오랜만에 미드를 둘러봤다.

한드에 관심을 끊으니 미드, 일드, 중드 모두 시들. 이럼 안 되는데...ㅠㅠ

 

데이비드 웨버의 아너 해링턴 시리즈 중 장편소설『여왕 폐하의 해군』이 행책 작가선집으로 출간됐다. 근데 전작『바실리 스테이션』은 폴라북스, 후작은 행책이다...;  다행히 행책의 배려인지 표지의 위화감은 거의 안 느껴진다. 역자는 모두 김상훈. 행책 작가선집은 자칫 절판 지뢰를 밟을 위험이 크므로 이 책은 무조건 구매 우선 순위.

 

제임스 P.호간의『별의 계승자』가 아작에서 복간됐다. 나는 오멜라스 시리즈로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이 절판 뒤 중고가가 꽤 높았던 모양이다. 상품페이지 평에 온통 중고가와 복간 얘기인 걸 보면서 가진 자의 여유랄까 '오, 그랬군' 신기했다. 여튼, 복간됐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관심이 있거나 구매하려고 찾아 헤맨 사람은 얼른 얼른 사는 게 좋다. 어차피 이 장르 수요는 거기서 거기라 국내 SF출간작은 절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The Sea of Fertility' 4부작 영문소설. 모두 국내 미번역.

이하 시리즈 순 짧은 소개. (출처. 알라딘)

 

SPRING SNOW

Kiyoaki Matsugae's passionate and ill-fated love for the betrothed daughter of a Tokyo aristocrat brings him into disfavor at the Imperial Court

 

RUNAWAY HORSE

In Japan during the 1930s, a young man and his father discover they have conflicting views on patriotism

 
THE TEMPLE OF DAWN

A Japanese lawyer on pilgrimage to Bangkok and India in the early 1940's meets a beautiful young Thai princess and degenerates from spiritual seeker to sexual voyeur

 
THE DECAY OF THE ANGEL

During the last years of his life, Honda adopts an orphaned boy and teaches him about Japanese society and tradition

 

짧은 소개만 보면 제일 끌리는 건 3부 'THE TEMPLE OF DAWN'.

'from spritual seeker to sexual voyeur' 라니...... 우왕♥

이 연작은 검색해보니 1910-1960 까지 50년에 걸친 연인의 환생을 다루는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할복자살을 했다.

미시마는 다자이 오사무를 대놓고 싫어했는데 아마 아쿠타가와상을 두고 심사위원인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다자이가 반목했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암만 그래도 죽은 사람을 두고 '생긴 거 운운'은 너무 찌질했지만, 본인이 아니니 그 속을 어찌 알리오.

현지인이 아니니 전후 일본의 분위기는 모르지만 가와바타, 미시마, 다자이 모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걸 보면 문학을 하려면 역시 남다른 감성을 지녀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다자이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미시마가 노벨상을 받았더라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아마 두 사람 모두 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튼 소설만 써도 아까운 삶인데 왜 엄한 데 영혼을 빼앗겼는지 참 알다가보 모를 양반 중 한 명. 이 양반의 생을 엿보면 작가로서 자부심이나 명예욕이나 욕심이 남못지 않았던 게 읽혀서 더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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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리우의 불안한 치안'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봤는데 조금 보다가 화면을 껐다. 내 비위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내 비위야 그렇다 치고 다음은 영상으로 인해 깨달은 몇 가지 사실들.

 

올해가 올림픽이 열리는 해라는 것,

올림픽 개최 도시가 브라질 리우라는 것,

리우 올림픽 개막식이 이번주 토요일이라는 것,

 

이 세 가지를 오늘 새벽에야 알았다. 그나마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것도 아니다. 불과 5분 여 본 것만으로도 끈적이는 타르가 정신에 들러붙은 것처럼 찜찜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고서 알았다. 한마디로 나는 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다.

 

월드컵에 이어 올림픽까지. 왜 갑자기 브라질일까.

 

브라질은 내겐 개인적으로 두 가지 사건으로 기억되는 나라인데 첫 번째는 초5 때 단짝이 가족 이민을 간 나라로, 두 번째는 존 업다이크의 소설로 깊은 인상이 남은 나라다.

대개 이민이라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북미이거나 혹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이었기 때문에 '아마존' 밖에 안 떠오르는 브라질로 간다니 어린 마음에도 우리는 친구를 걱정했다. 구체적으로 뭘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걱정했는데 초딩의 단순한 논리로 부유한 친구네가 왜 '하필' 브라질로 이민을 가는지 좀처럼 이해를 못했다. 브라질은 그만큼 내겐 오지였고, 지구 촌구석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진 후엔 내가 어지간히도 북미 중심의 사고를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여튼 당시에는 그랬다.

 

그리고 존 업다이크의 소설『브라질』... 이 소설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인식의 저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내 이십대의 시작은 이 소설이 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이 하는 생각은 '이 소설을 읽다니 지지리 운도 없지'. 

카프카의 문학론은 언제나 공감하고, 추천 백만개를 날리고 싶고, 자주 인용하지만 그것도 객관화가 가능할 때 얘기이지 도끼와 망치가 두드리는 게 내 머리통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내 감성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보드랍고 연하고 깨어지기 쉬운 멘탈을 방패로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네 책장에 꽂혀 있던 낡은 책을 우연히 꺼냈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는 한동안 후유증을 겪었다.

 

업다이크의 대표작이 '토끼 시리즈'라고들 하지만 내겐 업다이크 하면 단연 '브라질'이고 이후 내 머릿속에서 업다이크의 인상은 이 소설과 함께 박제되었다.

절판된 장편소설『브라질』은 인종, 계층, 계급, 성(性), 종교... 유사 이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이 등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인공인 연인들의 배경부터가 그렇다.

 

(아마 외교관인가 정치가였던 걸로 기억하는)고위급 공무원의 딸이자 백인인 이사벨과 빈민가 하층민이자 부랑아인 흑인 트리스탕은 사랑에 빠진 연인이지만 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너무나 많다. 결국 겪을 수 있는 모든 시련을 겪은 끝에 마지막으로 이사벨은 주술의 힘을 빌어 자신과 트리스탕의 피부색을 바꾼다. 그리하여 백인의 피부색을 갖게 된 트리스탕은 그가 모체의 자궁에 배태되는 순간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그 모든 편견과 차별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주류사회에 편입된다.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아마 이 소설은 그렇고 그런 로맨스 판타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기어코 엔딩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트리스탕은 피부색을 바꾸고 이사벨의 배경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지던 모든 차별과 편견의 속박에서 벗어나지만 단 하나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본질은 벗어던지지 못한다. 피부가 하얗게 변하고 돈과 권력을 쥐어도 그의 본질은 하층민 부랑아 흑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며 형상은 말그대로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껍데기와 본질이 일치하지 않으니 트리스탕은 물리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정신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처럼 어딘가 불안하다. 그리고 트리스탕이 주류의 삶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때 소설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처음 이사벨을 만났던 해변으로 간 트리스탕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흑인 부랑아의 칼에 찔려 죽어간다. 

이사벨은 모든 남자의 아이를 가졌지만 단 한 사람, 사랑하는 트리스탕의 아이는 가질 수 없었다. 이는 끝내 합일을 이룰 수 없는 이사벨과 트리스탕의 본질을 매우 강박적으로 보여준 일종의 우화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엔딩은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책장을 덮을 당시엔 작가 때문에 불쾌했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이사벨 때문에 슬펐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트리스탕을 위한 해피엔딩이라고 수긍하게 되었다.

트리스탕을 찌른 건 과거의 자신이며, 찔린 건 거짓 껍데기였으며, 거짓 껍데기를 벗어던지며 트리스탕은 본질을 되찾는다. 결국 트리스탕은 스스로 자신의 껍데기를 찌르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작가와 화해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업다이크가 브라질리언이라 철썩같이 믿었다. 그만큼 소설 속 브라질은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존 업다이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잠깐이지만 인지부조화를 겪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94년에 출간되자마자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얘기가 하나도 안 이상한 이 소설은 브라질을 정의하는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금기와 본능과 광기가 전복되고 해체되고 조롱당한 후의 카니발의 새벽을 훔쳐본 기분이 드는 이 소설은, 다시 생각해도 스무살 새내기가 읽기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BLACK is a shade of brown. So is white, if you look. On Copacabana, the most democratic, crowded, and dangerous of Rio de Janeiro's beaches, all colors merge in one joyous, sun-stunned flesh-color, coating the sand with a second, living skin.

 

- i. The Beach, 『Brazil』

 

발췌는 소설『브라질』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첫 문단.

 

 

그리고 별 거 아닌 얘기_.

 

i. 한때 절판된 이 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 아마존닷컴 장바구니에 담아놓고선 까맣게 잊었는데 새벽에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아마존닷컴에 접속했다. 그리고 연관 카테고리 '이 책 구매자가 구매한 다른 책'에 한강의『Vegetarian』이 있어 리뷰를 잠깐 읽던 중에 나도 모르게 하하- 웃었다. 이유는 카테고리만큼이나 두 소설에 대한 리뷰어들의 호불호가 비슷해서인데 두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고 싫어하는 이유도 같으니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ii. 문동은 나머지 토끼들을 언제 출간해줄건지...?

 

iii. 토끼도 있고 역자 김진준도 있는데 혹 문동이 복간을 해주려나 기대하면 무리수인가.

 

iv.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는 원제가 <브라질>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소설과의 연관성을 찾으며 봤던 이 영화는 다 보고 나면 두 번 분노한다. 국내판 제목에 한 번, 테리 길리엄의 제목에 또 한 번.

 

v. 올초에 나온 츠바이크의 신간이 마침『미래의 나라, 브라질』이다. 신간 소식을 보고도 조금 시들했는데 역시 읽어봐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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