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지음 / 1984Books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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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게 강아지 같네."

세계의 말에 얼굴이 달궈졌다. 나는 두 손으로 볼을 감췄으나 더 뜨거워진 마음은 가릴 길이 없어 벌거숭이로 춤을 췄다.

얼마나 붉었을까, 나의 마음은?

세계는 붉어진 벌거숭이를 봤을까?


-p.48 「끝난 연극에 대하여」



번역가이며 에세이스트인 신유진의 단편소설집으로 다섯 편이 수록되었다.


첫 장을 펼치고 첫 문장부터 조금씩 가라앉던 나는 세 번째 단편 '첼시호텔 세 번째 버전'의 넋두리에 완전히 침몰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떠오르지 못했다. 


권태기에 접어든 연애는 연인과 약속한 장소로 가는 걸음을 게으르게 잡아챈다. 미적대다 약속 시간에 한참 늦은 시각. 지하철 안에서 이안에게 문자를 보낸다. '가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나서 이안에게서 두 통의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는다. 어차피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갑자기 지하철이 멈춘다. 테러로 지하철 운행을 멈춘다는 소식. 테러가 발생한 곳은 하필 약속 장소다. 휴대폰을 꺼내자 이안이 보낸 문자가 보인다. '오지 마'. 정작 이안에게 보낸 문자 '가고 있어'는 전송 실패로 전송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못된 기집애. 나는 온마음으로 '나(소은)'를 비난했다. 착한 이안이가 가엾고 애틋해서 남은 단편을 읽는 내내 틈틈이 소은을 욕했다.


다섯 개의 단편은 마음을 주었던 사람, 시간, 장소를 상실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읽고 나면 세상이 잿빛 무채색이 되는 이야기들. 작가 후기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아주 오랫동안 작가를 원망했을 거다. 왜냐하면 나는 특히 슬픈 이야기에 면역이 없기 때문이다. 저건 픽션이라고, 소설일 뿐이라고, 가짜라고 아무리 주지시켜도 도통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예상했으나 예상보다 더 멜랑꼴리한 단편들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 따위!' 했다.


이 소설을 읽기 이틀 전에 확신의 'T'인 M에게 나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는 비극에 면역이 없어서 슬픈 소설, 슬픈 영화를 못 보겠어. 다큐도 아닌 픽션에 마음이 이렇게까지 들쑤셔져야 해? 슬픈 영화 슬픈 소설이 뭐라고 그걸 보면서 통곡할 일이야? 

그날 나는 비극에 면역력을 키워보고자 책 두 권을 주문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내가 해답을 구하는 방식은 여전히 책이 일순위다.


최은영('밝은 밤', '쇼코의 미소')보다 낫다. 신유진의 책이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내가 읽은 건 구판이다. 1984books가 만드는 책은 예뻐서 선물 같은 기분이 든다. 다만 신유진의 책은 유독 표지 변경이 잦아서 의아하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신유진의 에세이 두 권은 표지만 세 번째 바뀌었다. 개인취향으로 3쇄(?)≥개정판>초판 순으로 표지가 예쁘다. 유감스럽게도 내 책은 검색도 잘 안 되는 초판이고. 대충 배아프다는 얘기.


아니 에르노 팬들은 좋겠다. 신유진이 번역하고 1984books가 만든 에르노 컬렉션을 책장에 꽂을 수 있으니까.


* 검색해보니 개정판 에세이는 새 글이 한 편 씩 추가되었다고 한다. 기존 책을 가진 독자가 원하면 추가된 글은 pdf로 보내준다는 것 같다. 전자책 이용자라면 문의해보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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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인지한 건 좀 됐는데 그에 비하면 책을 읽은 건 많이 늦은 편이다. 각설하고. 정희진의 첫 책으로 『혼자서 본 영화』를 고른 건 '영화 에세이'이니만큼 저자와 첫만남으로 무난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망픽인 것 같다.

 

책 전반에 걸쳐 느낀 정희진 작법은 이분법적 구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말하자면 '조건화 되지 않은 일반화에 의한 오류'와 '거짓 원인의 오류'로 층층이 우물을 쌓고 독을 푼다. (cf. 맥스 슐만  「사랑은 오류」'Love is a Fallacy')





미카엘 하케네의 2002년 개봉작 <피아니스트>는 54회 칸에서 그랑프리, 남우주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원작소설은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혼자서 본 영화』에 수록된 스물여덟 편 영화 중 <피아니스트>에서 페이지가 유독 안 넘어갔던 이유는 내가 본 영화와 정희진이 본 영화가 너무 달라서다. 정희진은 <피아니스트>에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나라면 '사드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로 했을 거다. 그러니까 굳이 이런 부제를 써야 한다면 말이다.


정희진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정희진『혼자서 본 영화』

 

그러나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자들에게 남자의 벗은 몸은 공포요, 폭력이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서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p.054)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p.059)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라면 동시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운동이 유기적으로 진화하려면 함께 가는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인지, 특히, 젠더 운동가들은 이 부분을 종종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그렇게 해야만 하는 내부 사정이 있는 건지 철지난 꽃노래만 자꾸 부르니 시의성이 사라지고 공감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발췌문은 전형적인 일반화 오류로 야동이 더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시대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지금은 성별을 떠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지 않는 시대이며 광장에서 몸과 성욕과 섹스를 떠드는 시대다. 시대가 변했으니 성 담론도 바뀌어야 된다는 얘기. 그런 점에서 '이성애자 여자가 남성의 시선으로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을 보며 성욕을 느낀다'는 정희진의 주장 혹은 의견이 확증편향 혐의를 벗으려면 이런 결론에 다다른 과정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시각적 자극이 성욕에 미치는 영향 어쩌고 하는 뇌과학은 다들 아는 얘기일 테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여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변태 성욕'이라고 규정 짓는 것도 마찬가지. 저자 본인의 주장인지 따로 출처가 있는지 궁금한 대목인데,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에리카의 불행은 에리카가 이상성욕자여서가 아니라 상대를 잘못 고른 데 있다. 역지사지 해보자. 호감을 주고받던 남녀가 호텔에 갔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자신은 가학 성향이라 여자를 묶어놓고 때리면서 강간하고 싶다고 한다. 혹은 피학 성향자인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을 묶고 입에 양말을 물리고 옷을 찢고 강간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성향이 아닌 여자는 이상성향인 남자의 제안을 거부하고 비난한다. 와중에 욕도 하고 주먹도 쓴다. 이 상황에서 여성은 가해자인가?

 

 

울면서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는 정희진은 월터 클레머에게 분노한다.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정희진『혼자서 본 영화』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당신은 미쳤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무시하면 어떡해?" "사랑은 함께 하는 거야. 같이 즐기는 거야."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못 때린다." "다시는 남자를 모욕하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비웃음을 모두 참기 힘들었다. 그 남자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같이 즐기는' 그 각본은 누가 짜는데? 네가 한 강간이 같이 즐기는 거야? 네 손은 일상적인 폭력으로 더러워져 있잖아? 만일 그녀가 미쳤다면 그것은 그녀가 단지 중년 여자이기 때문이고, 네가 미치지 않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단지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야. 만일 그녀가 변태라면, 넌 (성폭행)범죄자야. 그녀의 '변태성'은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아. 하지만 넌 그녀를 대상으로, 물건으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미치고 안 미치고는 누가 결정하는데?

영화의 마지막 성폭력 장면은 남자주인공, 아니 남자 일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의 종착지가 결국은 삽입(강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 주체는 삽입 섹스를 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안드레아 드워킨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pp.59-60)

 

  

안드레아 드워킨이 얼마나 빼어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젠더가 생계수단이라는 저자가 인용할만한 문장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득 진모 씨의 남근다발 어쩌고가 떠오르네.

 

정희진이 체리피킹한 클레머의 폭언은 연인 간 보통의 섹스를 기대했던 클레머에게 에리카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피학성향을 고백하고 기구들을 보여주며 편지에 목록으로 정리한 방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라고 부추긴 이후에 등장한다.

정희진이 성폭행 강간범이라고 분노의 플래그를 꽂은 월터 클레머는 그녀를 학대하고 물건(악기)처럼 다루어주길 원하는 에리카의 편지를 읽고 에리카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방식은 당신을 다치게 할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다.  

 

 

소설은 에리카의 편지를 읽는 클레머의 심리를 보다 성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ㅣ문학동네

 

그가 큰 소리를 내어 편지를 읽는 건 단지 자신을 신명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원하는 걸 참아내려 했다가는 누구든 조만간에 저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종류를 열거한 목록일 뿐이다. "이대로 하자면 나는 당신을 완전히 물건처럼 다뤄야 해." (p.286)


"그건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에리카." 클레머는 자기의 어떤 부탁도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에리카의 당부를 읽으면서, 도저히 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p.287)


"그럼, 그렇게 해서 나한테 돌아오는 대가는 뭐지?" 클레머가 농담처럼 말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란 그에게 아무런 재미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다. (p.288)


클레머는 편지를 보고, 그가 그녀를 꿀꺽 삼켜주기를 여자가 원한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밥맛이 떨어져 그걸 정중하게 거부한다. 클레머는 '사람들이 네게 하지 않길 바라는 일은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격언으로, 자신이 거절하는 이유를 댄다. 그리고 그 역시 재갈을 물고 사슬을 몸에 감기는 싫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절대로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어.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가 없다구." 클레머는 그렇게 말한다. "누구나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결코 편지에서 읽은 대로 따르지 않을 거라는 건, 그에게는 이미 확고하게 결정돼 있는 일이다. (p.291)

 

정희진이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후 맥락을 생략한 정희진의 글만 보면 클레머가 갑자기 휙 나타나서 에리카를 강간하고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편지와 강간 사이에는 중간 과정이 있다. 정희진이 언급하지 않은 중간 과정은 이렇다. 에리카의 편지(피학 리스트)를 읽은 클레머는 에리카가 원하는 사드마조히즘 섹스를 거부하고 아파트를 떠난다. 이튿날 에리카는 클레머를 찾아가 (묶지도 때리지도 않는 정상적인)구강성교를 시도하지만 행위 도중에 에리카가 구토를 하고 그 모습에 클레머는 모욕을 느낀다. 그리고 그날밤 에리카의 아파트에 들이닥친 클레머가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하겠다고 덤비는데 이어지는 장면이 정희진이 분노한 문제의 성폭행, 정확히는 동의를 강요한 비동의 강간이다. 행위 중에 클레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은 '이런 걸 원하지 않았냐'였다.

 

문제의 장면에서 정희진의 주장처럼 클레머가 여성 성기에 삽입을 함으로써 강간 판타지를 이루었다고 느꼈다면, 단언하건데 정희진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이 장면은 에리카와 클레머 둘 모두에게 불행한 장면으로 에리카는 자신이 원했음에도 막상 피학에 놓이자 이상과 다른 현실에 절망하고, 클레머는 단호하게 거부했던 에리카의 리스트를 실행한 자신과 그녀를 조롱한다. 정서적 오르가즘이 배제된 사정은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배설의 충격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포르노 동영상이 에리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현실이다.


영화는 에리카와 클레머의 호흡과 표정, 움직임으로 폭력 혹은 폭행의 시작과 끝을 거칠게 보여주는데 같은 장면을 소설은 다소 차분하고 냉소적으로 서술한다. 소설이어서 가능한 서술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행위보다 더 격렬한 클레머의 자의식인데 자기긍정, 자기부정, 자가당착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클레머의 자아는 일견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클레머가 에리카의 아파트에 들이닥치는 장면부터 아파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이르는 동안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당위로 이어지는 클레머의 심리 변화를 강박적으로 묘사한다. 


정희진은 <피아니스트>를 마조히스트 에리카와 강간범 클레머로 단순 분류하지만 발췌에서도 볼 수 있듯 클레머의 서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정희진은 언급하지 않지만 에리카에게 클레머만큼 혹은 클레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에리카의 엄마다. 페미니스트에게 '여적여'가 금기어에 가깝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 영화는 에리카 모녀를 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에리카의 이상성욕과 편집증의 기저에 정상적이지 않은 모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찍 사망한 아버지 대신 남편 역할을 하며 엄마와 기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한 에리카는 서른 중반이 되도록 엄마와 심리적으로 감금, 종속된 관계다. 다양한 관계과 역할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화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엄마의 시선에 갇혀 거울 속 자아만 보며 성장한 에리카의 이상성욕은 타인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그 정점이 월터 클레머다.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에선 에리카가 지긋지긋한 엄마 대신 클레머가 이상적인 엄마의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심리를 읽을 수있다.

 

정희진은 에리카를 마조히스트로 규정하는데 그런 규정만으로는 에리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에리카는 엄마와 클레머에겐 사디/마조히스트, 피아노 교습생들에겐 사디스트 성향을 보이는데 이런 차이는 에리카가 엄마와 클레머에겐 자신의 바닥을 보이는 걸 허용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전체적인 감상은 정희진은 괜찮은 영화 평론가는 될 수 없겠다는 거다. 

 

 

덧1. 정희진은 '가부장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정희진이 쓰는 전통적 방식의 가부장제와 2000년 이후 그러니까 딸바보 등장 이후의 가부장제는 의미가 달라졌다. 생계노동은 남성, 가사노동은 여성으로 부부 역할을 고착화했던 기존의 질서는 이미 오래전에 깨어졌다.

 

덧2. 정희진은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p.063)이라고 마르크스 주의를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실상 변증법의 핵심인 '낡은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존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말로 사회운동가들의 지향점이지 않던가? 

 

덧3.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옐리네크는 과격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반페미니스트로 배척받았다고 한다.

 

덧4. '에리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진단과 분석이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병리학적 고민도 같이 해야 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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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예로 비유하자면 서사는 없고 모티프만 있는 것 같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한마디로 난해하다. 난해하다는 건 다른 말로 불친절하다는 의미. 그중에서도 특히 불친절한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을 본 건 중3 때인데, 무조건 봐야되는 걸작이라는 친구의 등쌀에 여름방학 때 친구네 거실에서 나란히 앉아서 봤다. 그리하여 졸리는지 지루한지 구분 안 가는 상태로 눈 뜬 장님처럼 멍하니 앉아서 본 <희생>이 그 여름 내게 남긴 건 '칸 수상작은 지리멸렬하고 재미없고 어렵구나' 였다.


위안이 되는 건 타르코프스키를 수면제로 삼은 게 나뿐만은 아니라는 거다. 


“최근에는 바디 럽이라는 베개 회사에서 상금 1000만 원이 걸린 잠 안 자고 오래 버티기 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대회가 시작되고 10시간 뒤 버티는 참가자들을 보내버리기 위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상영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대회장에서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망할 롱테이크!


-p.77, 정지돈 『영화와 시』 







그러니까 영화를 서사와 플롯이 움직이는 활동사진이라고 정의할 때 <희생>은 영화적인 재미(=자극)를 느낄만한 요소가 딱히 없다. 영화를 텍스트로 읽고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 혹은 영덕들이야 환호할 요소가 있겠지만 지면 혹은 상상에 갇혀 있던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그것에 서사와 플롯이라는 날개를 달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 공식에 익숙한 일반 대중에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그러니까 인간을 응시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불친절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일반 대중이라, 타인의 잠꼬대가 기억에 남지 않는 것처럼 줄거리도 플롯도 뭐도 기억 안 나는 불친절한 <희생>이 시간의 층층을 뚫고 내 기억에 남긴 건 단 한 장면이다. 영화 포스터이기도 한 황량한 대지에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그것인데,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과 상실이 있겠지만 <희생>을 얘기하고자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장면 밖에 안 떠오른다. 아, 그 나무에 때때로 아버지와 아들이 물을 주던 장면도 기억에 있다. 그리고 기억하는 건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다는 거. 새삼 깨닫는다. 영화 <희생>은 내게 기억을 더듬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영화라는 걸.


그 여름 이후 <희생>을 다시 떠올린 건 대학 시절, 아트시네마를 쫓아다니던 학과 동기가 어느날 타르코프스키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내가 <희생>을 봤다 하니 동기가 무척이나 반가워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줄거리든 감상이든 내겐 영화에 대해 동기와 나눌 얘기가 없었다. 떠오르는 건 이미 썼듯 그저 앙상하고 어린 나무 한 그루 뿐이다. 그리고 동기에게 나무 얘기를 하다 깨달은 건 망명지를 떠돌며 외롭게 작업했던 감독의 유작이 내겐 활동사진이 아닌 회화의 이미지로 남았다는 거였다.




'활동사진'은 'Motion Picture'를 직역한 단어다.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시민들에게 관람료를 받고 최초로 활동사진을 상영했을 때 영사기가 뿜어내는 '움직이는 열차'에 모여있던 시민들이 격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렇듯 최초엔 움직이기만 해도 감동을 주었던 활동사진은 이후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듣고 보는 얘기'로 종합예술의 지위를 획득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Moving Picture' 즉 'Movie'다. 


대개 영화를 무비, 필름, 시네마로 구분하는데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트시네마를 찾아다니던 동기는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 흥미를 느끼는, 말하자면 '필름'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이 친구와 극장에서 영화를 보노라면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쇼트, 인서트, 롱테이크 등등. 지금은 공기처럼 익숙한 용어들이지만 대부분 이 친구에게 귀동냥으로 얻은 것들이다. 이 친구는 특히 장이머우를 필두로 하는 중국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이 친구에게 지금까지도 고마운 건 지극히 대중적인 내 취향을 비웃지 않고 개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영화를 극장에서 함께 봐준 거였다. 여담이지만 이 친구를 만나기 전의 나는 중국 영화와 홍콩 영화를 구분 못했다.



“나는 당신의 영화를 일주일 동안 네 번 봤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만 보려고 극장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몇 시간이나마 진정한 예술가들과 진정한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 내게 부족한 것, 내가 동경하는 것, 나를 화나게 하는 것, 구역질 나게 하는 것,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 내게 밝고 따듯한 것, 내가 살아 있게 하고 내가 파멸하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영화에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봤습니다. 내게는 처음으로 영화가 현실이 됐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 잠시 그 속에 들어가 살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p.22, 『시간의 각인』 

 
 

『시간의 각인』 작가 서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감독으로 사는 동안 받았던 많은 편지를 언급하는데 편지를 보낸 이들 대부분은 토목기사, 설비기사,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는 학생, 여교사, 정년퇴직한 늙은이 등이다. 위에 인용한 편지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어느 여자 노동자가 보낸 것인데 이쯤되면 속물적인 혼란이 온다. 내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즐기지(樂의 의미가 아님) 못하는 건 내가 속한 사회환경적 태생의 문제 때문인가. 좀 더 즉물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노동자(블루 컬러) 계급이 아니어서인가, 라는 원론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다시 '노동자 계급'의 정의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은 엉뚱한 곳에 좌표를 찍기 시작한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고골을 읽으며 제정러시아를 통과하고 고리키와 파스테르나크의 책을 손에 쥐고 혁명과 냉전을 치러낸 공산사회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밖에 모르는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기저를 갖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라는 거다. 그 여름의 나는 너무 어렸으니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그의 영화를 보면 답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노동자'를 보니 떠오르는 기억 하나. 

대학 신입생 때의 일. 교필에서 상상도 못했던 수학II 암습을 맞고(난 문과생이라고ㅠㅠ) 좀비 상태로 기어들어간 과방에서 구석에 누가 던져 놓은 책을 생각 없이 집어들었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꿈쩍도 않고 절반 정도를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카프카 식으로 말하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는데 책은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이었다.
 















스무 살의 새벽 노래
 
스무 살이 되기까지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다
새벽은 이미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으며
온몸으로 부르던 새벽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다

나는 처음 노래했지만
노래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누구의 가슴에나 이미 있었고
누구라도 받아쓰지 않으면 안 될
우리들 가난한 사랑의 절규였다

p.12, 박노해 『노동의 새벽』


밤새워 일하고 지친 몸에 차가운 소주를 들이부으며 새벽과 맞서던 누군가의 스무 살과 맞닥뜨린 그 해 3월. 

나도 스무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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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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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앨리스, 현피터, 정웰링턴, 선우학원...

『모든 것은 영원했다』 에는 우리 역사의 한 장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종종 기시감을 느꼈는데, 정지돈의 소설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함께 읽는 기분을 느낀 배경은 두 소설 모두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조국을 떠나 타국을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천착하는 정서 '외로움'에서 기인한다.


한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격변기에 던져진 어떤 인간은 필연적으로 유목민이 된다. 자처했든, 강요당했든 유목의 길에 나선 그들은 매일밤 외로움을 이불 삼아 덮고 자고, 외로움과 어깨를 걸고 낯선 거리를 걷는다.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인간은 끊임없이 실존을 의심하고 회의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불안에 직면한 외로운 인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너무나 적다. 이것 또한 필연이다.


"스무 살에 혁명가면 마흔 살에는 살아 있기 힘들겠군." -p.25 


 

 

미국에서 만나 친구로, 동지로 지내다 북한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체코로 함께 건너온 선우학원과 정웰링턴은 북한으로부터 입국을 거부 당한다. 이후 선우학원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정웰링턴은 체코에 남는다. 

 

선우학원은 그날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이론에 대한 회의, 제도에 대한 회의, 인간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회의. 세계를 이해하려 들면 믿음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세계를 바꾸려 드는 사람만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제야 선우학원은 마르크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와 멀어질 수 있었다. -p.67 

 

 

 

믿었던 세계에 대한 회의가 날선 신념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을 때 정웰링턴과 선우학원의 선택을 가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혈육을 향한 애착이지 않았을까. 미국 시민권자인 현앨리스는 이혼 후 LA로 갔고 그곳에서 정웰링턴을 낳았다. 이후 남한과 미국을 오가다 양국으로부터 추방 당하고 북한에 정착하는데 현앨리스가 북한으로 건너간 이후 두 모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현앨리스는 1956년 박헌영과 함께 숙청 후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정웰링턴은 1963년 근무하던 병원에서 독극물을 삼키고 생을 마감했다.

 

나는 삶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빚지지 않았다. 하와이의 한인 사회에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에도 부채가 없고 어떤 이념과 철학에도 빚지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내게 많은 빚을 졌다. 우리 가족에게도 빚을 졌고 친구들에게도 빚을 졌다. 나는 어떤 것도 돌려받지 않을 것이다. 윌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세계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자살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나의 선택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숫자, 개념 따위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p.132 

 


 

체코에 정착한 정웰링턴은 서방세계에서 북한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안나를 만나 결혼하는데 애정과 별개로 두 사람이 세계를 보는 관점은 판이하다. 정웰링턴은 결정론적 관점으로, 안나는 비결정론적 관점(불확정성의 원리)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반면 정웰링턴은 우연을 세계와 생명의 근본 원리로 볼 수 없었다. 그의 가족의 삶은 의지적인 삶이었다. 의지적인 삶이 우연의 작동에 의해서 파멸로 이어졌다는 말은 의지의 무의미함을 의미했고 그건 곧 자신과 가족의 삶이 무의미함을 뜻했다. -p.21 

 



이로써 정웰링턴이 코뮤니스트인 것은 확실하다. 변증법의 3요소이자 요체인 정반합(正反合 : These, Antithese, Synthese)을 초간단 요약을 하면 정과 반의 갈등으로 합이 탄생한다는 이론인데 마르크스는 역사를 정반합의 끝없는 발전 순환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태초에 正이 있고, 정의 역반응으로 反이 등장하고 정과 반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다 새로운 合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합은 시간이 흐르면 정이 되고, 반이 등장하고, 합이 탄생하고... 무한반복된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정과 반이 대립/갈등하는 과정에 인간의 의지가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그 결과 합이 이루어진다는 거다. 즉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덧붙여 마르크스는 제정시대 왕족/귀족과 농민이 대립하고 이 대립이 정점에 이르면 민중 봉기가 일어나 제정이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의 세상으로 이행이 이루어진다고 역사의 흐름을 예언했다.


+) 의지(意志)는 철학에서 넓은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의지적인 인간이었던 정웰링턴은 세계를 결정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정웰링턴에겐 의지적인 시민이 주체가 된 사회가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체코에서 머물며 자신의 손으로 북한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과정에서 정웰링턴의 의지는 점차 무중력 상태가 된다.

 

죄가 있다면 죗값을 치르고 나올 텐데 죄가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설명이나 저항을 하려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 투정을 부리는 내게 『다니엘서』 6장에 나오는 사자 굴에 빠진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사자들은 그를 해치지 않았단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두려워 말고 의심하지 말거라. 그런데 사자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나요? 피터는 물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단다. 중요한 건 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야. 현피터가 말했고 정웰링턴은 더 이상 종교를 믿지 않게 된 이후에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pp.90-91) 

 

 

 

책은 모두 207페이지이고 그중 2/3는 소설이며 나머지는 작가가 체코에서 정웰링턴의 족적을 훑는 기행기다. 즉 소설+산문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종종 해방 후 북한을 선택했던 지식인들의 선택이 궁금했는데 정지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2000년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김석형은 해방정국에서 월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 예술인이었고 월남하는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다고 말했다. (…중략)

해방 이후 북한을 택한 작가들의 존재는 월북이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역설한다. 식민지 시절 최고의 문장가이자 단편소설가였던 이태준은 카프나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지 않는 문학주의자였다. 그는 1943년 철원의 안협에 칩거해 낚시와 독서를 하며 소일했지만 해방 후에는 남로당에 가입하고 북한으로 향했다. 최인훈은 『화두 』에서 이태준의 선택을 공산주의와 북한이 아닌 일종의 도피이자 망명으로 해석한다. 쉽게 말해 이태준은 친일 관료들이 한자리 해먹는 남한을 참아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pp.141-142)

 

동시대에 친일매국하던 놈들이 해방 조국에서 호의호식하는 꼬라지가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그 감정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하여간에 친일 청산이 문제다. 친일매국인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과반세기가 넘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민에게 청구서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완독 직후 구글 검색을 했다. 작가의 상상이 빚은 가상 인물이 아닌, 역사에 분명하게 흔적을 남겼던 인물들을 확인하니 울적하다. 울적한 이유는 당연히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이 건강하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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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인간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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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좋고. 안마. 여보세요.

손짓하는 억새풀. 저 뒤편에는 분명 무덤가가 있습니다.

길을 물으니, 여자는 벙어리였네, 메마른 들판.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이것저것 적혀 있다. 무슨 메모를 할 생각으로 적어둔 것일 텐데 나도 잘 모르겠다.


창밖에 검은 흙 사이로 바스락바스락 기어가는 못생긴 가을나비를 본다. 유별나게 튼튼해 죽지 않고 살았다. 결코 허무한 모습은 아니다. 라고 적혀 있다.


이걸 쓸 당시 나는 몹시 괴로웠다. 언제 쓴 것인지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선 밝히지 않겠다.


- p.183, 「아, 가을」


죽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땀을 흘려보고 싶습니다.

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p.189, 「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어떤 작가는 읽는 순간 아, 이건 누구의 글이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문처럼 식별되는 자신만의 문장과 문체를 쓰는 작가가 있다. 이를테면 다자이 오사무처럼.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삼도천을 건너는데 성공한 다자이 오사무는, 사실 예전에는 막연히 염세주의, 허무주의에 발목을 잡힌 인간이려니 했다. 그러나 이번에 오랜만에 그의 산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삶의 의미가 무거운 것과 삶의 의미를 못 느끼는 건 분명 의미가 다를텐데. 다자이 오사무가 죽음을 동경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별개로 삶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에게 삶은 너무 무거웠던 게 아닐까. 길가를 구르는 돌멩이와 나비에게 조차 삶의 편린을 보았던 그는 그저 가벼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정부와 함께 아타미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그의 아내가 아이들 서넛을 데리고 아타미까지 쫓아와 한 여관에 투숙했다가 작심하고 아이들을 죽인 뒤 자살해버렸다. 한편, 남편과 정부도 그날 밤 다른 여관에서 동반자살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몰랐고 남편도 아내와 아이들이 아타미까지 와서 다른 여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편과 아내는 각기 상대에게 한 사람은 사과의 유서를 한 사람은 원망의 유서를 남기고 죽음을 맞았다.


-p.273, 「온천마을 엘레지」


아내는 남편의 사과를 듣지 못했고, 남편은 아내의 원망을 듣지 못했다.

아내에겐 불행, 남편에겐 다행일까.

혹은 용서할 권리를 빼앗긴 아내야말로 남편의 유서를 읽지 않아 다행이었을까.


26인 작가의 산문 중 가장 재미있었던 사카구치 안고의 『온천마을 엘레지』. 

제목이 아재 감성이라고 스킵하면 후회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지루한 구석 없이 다 재미있다. 작가의 입담이 장난 아닌데 말발이 워낙 좋아 필담과 입담을 구분하는 게 의미 없는 작가로 국내는 황석영 정도가 떠오른다. 음. 두 사람에게 조금 못 미치지만 김영하 작가도 끼워주자. 


이 책에 실린 사카구치 안고의 산문은 「온천마을 엘레지」한 편이지만 분량만 보면 다른 작가들의 산문 두, 세 편과 맞먹는다. 근데 분량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읽게 된다는 거. 일본의 유명 온천이 자살자들로 몸살을 앓는다는 간단한 소재에서 출발한 글은 자살의 메카가 된 온천에 얽힌 사건 사고와 유래를 물 흐르듯 막힘 없이 풀어간다. 


이 책은 북마크를 해두고 싶은 괜찮은 산문이 많지만 사카구치 안고의 산문 한 편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데 드는 유무형의 비용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오카모토 가노코는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던 작가인데 「복숭아가 있는 풍경」에서 관능적인 문체로 사람을 홀리더니 「갈색의 구도」에선 어용 신문에 기고한 매문인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실망스럽다.


눈 딱 감고 복사꽃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게 잊혔다. 교태롭게 해쓱한 연분홍빛 선비가 기모노와 피부를 투과해 미각에 상쾌한 차가움을 전했다. 그 미각을 맛보는 혀가 신체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맛이 느껴졌다. 이 복숭아종이 흡사 사람 이름처럼 '덴주로'였다는 게 생각나 우스워졌다. 나는 아하하 소리를 내 웃었다.


-p. 240,「복숭아가 있는 풍경」 오카모토 가노코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독일 베를린 유학 시기 불교 사원에서 만난 독일인 학생과 나눈 대화는(「갈색의 구도」) 일본 특유의 정서인 교조적인 상황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라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나 뜨악스럽다. 특히 현실에 혼란을 느껴 방황하는 와중에 붓다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 독일인 대학생이 작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장면은, 나아가 작가가 헤세의 '싯다르타'를 추천하는 장면에 이르면 뭐라 덧붙일 의욕조차 사라진다. 뭐. 본인이 그랬다는데 그랬겠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튼 나는 부끄러웠다.


오카모토 가노코의 「복숭아가 있는 풍경」과 가지이 모토지로의「벚나무 아래는」은 미문(美文)과 현학적인 글의 차이를 비교하기에 좋은 예다. 미문은 오감을 글자를 훑는 눈에 집중하게 하는 반면 현학적인 글은 문장이 눈을 통해 뇌로 전달되기도 전에 글자 위에서 눈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맥락인데 미문은 하나의 소재 혹은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면 현학문은 소재, 주제 같은 글감보다 단어 자체의 개념을 쫓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부사와 형용사가 지나치게 많아 맥락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니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뭔 소리를 하는 거야'가 되는 거고.


벚나무 아래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 말은 믿어도 된다. 왜냐고? 그렇지 않고서야 벚꽃이 그렇게 아름답게 필 수 있을까. 나는 믿을 수 없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요 며칠 불안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겨우 알게 되었다. 벚나무 아래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 말은 믿어도 된다.


-p.294, 「벚나무 아래는」 가지이 모토지로


발췌는 산문의 첫 대목인데 읽으면서 와, 감각적! 했던 감탄은 다음 문단으로, 또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피로해진다. 불과 다섯 페이지 분량인데 첫 문단을 빼곤 뭘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아쉽다.


가자이 모토지로의 약력에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문체로 주목받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의 글을 보면 수긍이 가는 평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글이라는 건 문체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문학이 타인과 소통하는 매개는 글자인데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문장이라면 독자를 따돌리는 방백과 뭐가 다른가. 






『슬픈 인간』에 실린 작가들의 생몰은 대개 19세기 전후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근대사와 떼놓을 수 없는 연대인데 신기할 정도로 관련 내용을 주제나 소재로 다룬 산문이 없다. 소설도 아니고 산문인데도. 


그나마 고바야시 다키지의「감방수필」에서 동시대 세태를 엿볼수 있는데 다음은 읽으면서 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던 대목.


옆방에는 조선인 동지가 있었다. 우린 가끔 서신을 통해서나, 운동이나 목욕을 다녀오는 길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고향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도쿄에서 비합법운동을 하다 잡혀왔기에, 동지들도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에게 뭘 넣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미결수인데도 파란 옷을 입고 파란 이불에서 잤다. 내 경우는 가끔 가족들이 필요한 물건도 넣어주고 과일이나 과자도 살 수 있었지만, 이 조선인 동지는 한번도 밖에서 누가 뭘 넣어준 흔적이 없었고 물건을 사는 법도 없었다. 특히 여기서는 어디서 누가 무슨 물건을 받고 샀는지 훤히 알 수 있어서, 내 물건이 들어올 때마다 옆방 동지 생각에 맘이 쓰였다.

언젠가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간수의 눈을 피해 그의 독방 문을 두드리며,

"괜찮나? 아픈 데는 없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안에서,

"괜찮소."

조선인답게 또록또록한 발음으로 대답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 옆방 동지가 이불을 꺼내며 무슨 말인가를 했다. 문득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니, 이불만 시켜주지 말고, 인간도 햇볕을 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 ㅡ나는 엉겁결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아까 한 말을 듣고 곧바로 조직적으로 뒤를 이어준 것이다!

"뭐야, 아까 18번방이 하는 소릴 들은 거냐? 니들한텐 진짜 질렸다."

보라! 나는 생각했다 ㅡ동지란 이런 것이다!

나는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르며 응원했다.


-pp.159-161, 「감방수필」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 다키지의 옆방 조선인은 어떻게 됏을까. 바깥에선 그가 투옥된 걸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조선인의 이후 행로를 짚어보려니 여러모로 심란하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공선』의 작가인데 그의 생몰연대가 1903-1933 이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자로 노동자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작품을 쓰고 노동 투쟁에 앞섰으나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던 중 서른 살에 사망했다.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전후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산문에 근대사를 다룬 내용이 없어 묘하다 했는데 책은 마지막에 가서야 근대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하라 다마키의 산문 두 개를 내놓는다.


나는 그때 살아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암흑이 머리 위로 쏟아져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그때 나는 나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머리 위로 부서진 파편들이 떨어졌다. 하지만 훨씬 더 엄청난 것에 두드려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어마어마한 속도가 내 안을 훑었다. 그때부터 나는 '갑자기'라는 말이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으로 내팽개쳐진 인간이었다. ……그날 밤 일을 떠올려본다. 히로시마의 거리는 밤에도 내내 불타고 있었다. 나는 강가 자갈밭에 모로 누워 사람들 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어떻게 될까. 다들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이상한 고요함이 있었다. 아마도 지구는 파멸할 것이고 인류에게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데서 오는, 이상한 고요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둑한 가운데 부상자와 피난민이 한가득 웅크리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 웅크린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육안으론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것 같았다.

"아저씨 옆에 꼭 붙어 있어. 아저씨 옆에 있으면 괜찮아."

남자는 같이 있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반복해서 말했다.

"길 잃은 아이인데 어제부터 제 곁에 붙어서 걷고 있습니다."

나는 남자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내팽개쳐졌다는 격앙된 감정 속에 길 잃은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도 남자도 그리고 나도 모두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속에 내팽개쳐 있었다. 그러니 그 순간 세계가 소멸한다 해도 내게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는 소멸하지 않았다. 날이 밝았지만, 나는 다시 참극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후로 길 잃은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가 정말로 아이를 보호하고 구해주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남자와 헤어져 외톨이가 됐을까.


-pp.310-311, 『불의 아이』


늘 궁금했다. 일본 국민은 왜 일본 정부를 향해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앉는가. 뿐더러 당시의 위정자들은 세습을 거쳐 21세기 일본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다. 전후(戰後) 독일과 다른 노선을 선택한 일본의 행보는 종종 청산되지 않은 전범국의 무덤을 보는 기분이 든다. 독일 대학생에게 헤세의 소설을 추천하고 학생의 미래를 걱정하는 오카모토 가노코의 산문이 일종의 모욕에 가까운 희비극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독은 대기 중에 녹아버린 듯하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속눈썹에 눈물이 고여 있던 너……. 손에 박힌 가시를 바늘 끝으로 빼주시던 어머니……. 사소한, 너무도 사소한 사건이, 아무도 없는 지금에서야 내 안으로 둥실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이가 아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죽은 네가 나타났다.

"어디가 아파?"

너는 손끝으로 내 이를 빙그르 문질렀다. 그 손가락의 감촉에 눈을 떴을 때,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p.331. 『염원의 나라』


이곳은 내가 자주 다니는 철도 건널목인데 차단기가 내려오면 여기서 한동안 기다리곤 한다. 전차는 니시오기쿠보 방면에서 오거나 기치조지역에서 온다. 전차가 다가오면 철로가 상하로 확실히 흔들리며 움직인다. 전차는 쌩하니 전속력으로 이곳을 지나쳐 간다. 나는 그 속도에 어쩐지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든다. 전속력으로나의 인생을 스쳐가는 사람을 나는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욱 초연한 눈빛으로 이 선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 세상에 부대끼며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쳐도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넘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언제나 이 선로 부근을 서성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건널목에 우뚝 서 있는 나, ……나의 그림자도 어느새 이 선로 주변을 서성이는 것은 아닐까. 


-pp.332-333, 『염원의 나라』


『염원의 나라』는 「1951년 무사시노시」라는 부제로 시작한다.

1905년에 출생한 하라 다마키는 1951년 기치조지역의 철로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작가의 이런 이력을 알고 읽어서일까. 『염원의 나라』는 작가의 유언처럼 느껴진다.


목록에 제목이 안 보여서 표제 『슬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 궁금했는데 아마 하라 다마키의 『불의 아이』에 등장하는 친구의 묘사에서 따온 듯 싶다.


"그러니까 이런 일도 있었어. 내가 아이 때 장난을 쳐서 아버지가 벌로 두 손을 줄로 묶고 벽장 속에 가둬버렸지. 잠시 후 내가 벽장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는데 묶였던 끈이 풀렸으니 다시 묶어달라고 운 거였네. 세상에 이렇게 슬픈 아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내가 그 시절 막연히 그 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건, 그 친구 안에 존재하는 남달리 슬픈 인간의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p.322, 『불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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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26인의 산문으로 꽉 채워진 『슬픈 인간』은 읽고 나서 한껏 포만감이 들었던 한 권이었다.

일본문학으로 국한하자면 20세기 초반, 구체적으로 1950년 이전 출생 작가들의 글이 여전히 취향임을 확인했고.


그중 특히 좋았던 산문은 의식흐름을 따라 들고 나는 서정적인 문장이 돋보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의 스미다 강」, 재미있는 글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카구치 안고 「온천의 엘레지」, 그리고 여러가지로 인상적인 다카무라 고타로 「촉각의 세계」. 특히 「촉각의 세계」는 제목부터도 그러하지만 조각가가 글을 쓰면 이런 촉각적인 문장이 나오는구나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묵직한 문장의 울림이 깊고 무거웠던 하라 다마키의 산문은 가끔 기억날 것 같다.


주례사 비평이 미덕인 듯 상식인 듯 보편화된 업계의 전통에 비추어 책 표지를 장식하는 유명 작가들의 추천사에 눈길을 주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는데 『슬픈 인간』은 허은실 시인이 남긴 추천사도 버릴 데가 없다.


어떤 밤엔, 저물녘 새의 예감으로 떨리는 글이었다. 

어떤 날엔 속눈썹에 묻은 눈물 같은 글이었다. 책을 덮고 먼데를 자주 바라보았다. 어떤 글은 위태로운 아름다움으로 아슬아슬해서, 저자의 생애를 앞질러 들추어보고는 아득해졌다(하략…) 

- 허은실 시인

『슬픈 인간』을 읽노라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국내 문인 51인의 산문을 엮은 방민호 교수의 『모던 수필』이 떠오른다. 향연에서 출간된 이 책은 『모단 에쎄이』로 제목을 바꾸어 다른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시대 배경의 영향이겠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모던 수필』과 이번에 읽은 『슬픈 인간』은 여러모로 복합적인 감상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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